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6월 항쟁 당시 시위대
 ▲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6월 항쟁 당시 시위대
ⓒ ⓒ 6월항쟁기념관

관련사진보기

 
마침내 '6월항쟁' 이 시작되었다.

6월 10일 오전 10시경, 서울에서는 전혀 상치되는 두 개의 큰 집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열려 전두환이 육사동기인 노태우의 손을 높이 들어주었다. 

같은 시각, 서울 중구 태평로 대한성공회에서는 재야와 야권의 연합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규탄 국민대회' 가 열렸다. 한쪽에서는 축하와 감격의 꽃다발이 오가고, 다른 쪽에서는 분노와 규탄의 피울음에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경찰의 최루탄으로 시위자들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촉발에 큰 역할을 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1987년 6월 항쟁 촉발에 큰 역할을 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민주세력은 박군 고문살해와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 에 반대하여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시각에 맞춰 서울을 비롯,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규탄집회에 들어갔다. 각 대학들은 출정식을 갖고 '독재타도' '직선제개헌' 을 외치며 도심으로 몰려나왔다.

이날 오후 6시 정각, 국민대회가 열리는 대한성공회 종탑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성당의 종이 42번 울리는 것을 신호로 성당 구내에 있던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고 도심을 지나던 차량들도 일제히 경적을 울려댔다. 이로써 6ㆍ10대회, 나아가서 6월 민중항쟁이 공식적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에 시위가 벌어졌다.

민주세력의 '성공회 6ㆍ10대회'는 아침부터 전경들에게 에워싸여 일반시민들이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따라서 출정식을 가진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오후 5시경 을지로 2가 로타리, 을지로 네거리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벌였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경찰은 사과탄을 마구 쏘아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소단위로 신세계백화점, 남대문시장, 퇴계로 2가, 을지로 입구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시위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이한열군의 죽음을 사진으로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정태원 전 로이터 한국지국 사진부장이다. 피격직전 이한열군이 교문앞에 나와있던 왼쪽 사진은 정태원 선생의 동생이 찍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이한열군의 죽음을 사진으로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정태원 전 로이터 한국지국 사진부장이다. 피격직전 이한열군이 교문앞에 나와있던 왼쪽 사진은 정태원 선생의 동생이 찍었다.
ⓒ 정태원

관련사진보기

 
시장상인들도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며 경찰을 비난했다. 학생들과 야당의원들은 여기저기서 노상 약식규탄대회를 열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등을 외쳤다. 오후 6시가 넘자 학생들의 시위는 차츰 격렬해지고 시민들의 합세도 점점 늘어갔다. 

가두시위를 벌이던 학생 1천여 명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명동성당 점거농성은 6월항쟁의 '태풍의 눈' 이 되었다. 15일 해산될 때까지 5일 동안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성당 밖에서는 연일 대학생들과 이들에 합세한 인근 사무직 노동자들의 지원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6월 9일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군이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하자 범연세인 규탄대회가 전국 각 도시로 확산되었고, 국민운동본부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 로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최루탄 추방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전국 14개 도시에서 2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1987년 6월, 독재타도를 외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6월 항쟁 시위군중들
 1987년 6월, 독재타도를 외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6월 항쟁 시위군중들
ⓒ 박용수

관련사진보기

 
국민운동본부는 D데이를 6월 26일로 잡고 이날 평화대행진을 강행할 것을 결정했다. 정부의 비상조치설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정부는 부분 계엄령 또는 위수령을 내리기 위해 군부대를 도시 외곽지대로 이동시켰다. 성남시 근방에 출동부대가 집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6월 24일,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전두환과 김영삼의 여야 영수회담이 결렬되자 국민운동본부는 26일의 평화대행진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6월 26일, 드디어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시작되었다. 전국 33개 시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날 시위는 밤늦게까지 격렬하게 전개되어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ㆍ학생들은 '호헌철폐' 등에서 '민주쟁취' '독재타도'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등으로 격화되었다. 6ㆍ26대행진은 철저히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했다. 최루탄에 쫓기면서도 시위대들은 '질서' 를 외쳤다. 일부 방화와 파괴 그리고 투석전 등 과격양상을 띤 것은 경찰의 과잉방어와 최루탄 난사 때문이었다.
 
'노대표, 직선개헌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6.29선언을 머리기사로 올린 당시 <경향신문> 기사
 "노대표, 직선개헌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6.29선언을 머리기사로 올린 당시 <경향신문> 기사
ⓒ 경향신문

관련사진보기

 
제5공화국 이래 최대의 인파가 참가한 6ㆍ26대행진에 정부여당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고, 막다른 골목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이 노태우의 6ㆍ29선언이었다. 마침내 6월민중항쟁이 군부독재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