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조슈번의 번조는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1553~1625)인데, 세습으로 지방영주가 되었다. 임진왜란시 제7군으로 편성된 모리부대는 조선으로 들어온 왜군 부대중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3만을 이끌고 부산을 거쳐 성주, 개성을 침략하였다. 당시 조선침략을 위한 군역을 부과하는 기준은 영지와 미곡산출량에 의거했는데, 조슈번으로 줄어들기 전의 규모를 알려준다.

주로 경상도에서 진을 치고, 왜군의 이동과 물자수송을 방어하고, 연락망을 구축하면서 조선군, 조선 의병과 격전을 펼쳤다. 이듬해 명과의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모리는 8월에 히로시마성으로 돌아온다. 정유재란시 병중이라서, 대신 양자인 히데모토가 이끄는 3만을 보내, 조선군과 명군과 싸우게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1600년 10월 세키가하라 전투는 전국의 다이묘(大名)가 동서로 나뉘어 패권을 겨루는 싸움이었는데,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서 명목상 서군을 이끈 장수가 모리 테루모토였다. 이 전투에서 모리는 서군의 총대장으로 소극적인 전투태세로 임했다. 가신 깃가와(吉川広家)가 도쿠가와의 승리를 예상하고, 주군의 안전과 영지보존을 내걸며, 동군과 내통하면서 밀약하여, 그를 살리고 영지를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쇼카 손주쿠, 요시다 쇼인이 실제로 가르치던 교실 모습이다.
 쇼카 손주쿠, 요시다 쇼인이 실제로 가르치던 교실 모습이다.
ⓒ 김광욱

관련사진보기

 
테루모토와 같은 조부를 둔 사촌인 깃가와는, 동군과의 전투에 임하면서 종가(宗家)인 모리가를 살리기 위해, 목표를 영지를 보전하는데 두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과 결탁한 서류를 근거로 모리 테루모토에게 감봉처분을 내려, 조슈번이 지배하는 영지는 산인(山陰)과 산요우(山陽) 등 8개지역에서 나가토(長門)와 스오우(周防)의 2개 지역이 되어, 이전에 비해 영지는 3분의 1로 줄어들게 된다. 조슈번조 모리 테루모토가 오랫동안 원성을 받는 이유가 된다. 영지는 줄어들고 감봉이 되면서, 하기성 시대가 시작된다.

이후, 막부에 대한 불신은 조슈번으로 하여금 260여년간 절치부심하면서 때를 기다리게 한 것이다. 가신을 줄여야 했고, 산이 많고 논이 적어, 신전(新田)을 개간하고, 경제력을 증대시켜야 했다.

조슈번은 구리광산을 개발하고, 밀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번재정을 안정화시킨 것은 막부말 신병기와 함선을 구입하고 엘리트를 육성하는데 집중한다. 이는 사쓰마번과 함께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다.

조슈번교 명륜관(明倫館)에서 가르치던 요시다 쇼인(1830~1859)은 숙부 다마키(玉木文之進)로부터 병학사범을 물려받아 우리나라 서당과 같은 사숙인 쇼카 손주쿠에서 훈장 역할을 한다. 요시다의 숙부가 개설한 쇼카 손주쿠는 유학을 중심으로 한학, 병학을 배우는 곳이었다. 당시, 요시다 쇼인을 포함하여 그의 제자들은 명륜관에서도 수학을 마쳤거나, 수학 중이었다. 명륜관에서는 유학을 학습받을 수 있었는데, 동시에 유학에 비판적인 오규 소라이(荻生徂徠1666~1728) 등의 일본식 유학을 중시하고 있었다.
조슈번의 번교 명륜관
 조슈번의 번교 명륜관
ⓒ 김광욱

관련사진보기

 
번교 명륜관이 무사계급을 위한 교육기관이라면, 사교육기관인 쇼카 손주쿠에서는 무사계급이 아니더라도 상인, 농민의 자식 등 신분에 상관없이 배울 기회가 주어졌다. 손주쿠에서는 논어, 맹자와 무교전서(武教全書) 등에 대한 교육과 함께 토론이나 과외활동, 예를 들면 소풍이나 수영, 고기잡이 등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숙생 간의 유대감이 강해졌다. 요시다가 가르칠 때, 숙생의 규모는 50여명 정도였다.

사교육 기관인 쇼카 손주쿠... 신분 상관없이 가르쳤다

아편전쟁(1840년)에 충격을 받은 병학사범 요시다는 재래식 무기만으로는 일본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군사부문의 서양화를 외치게 된다. 요시다는 당시 젊은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군사력을 배경으로 함포외교로 일본을 제압하면서, 개방시키려는 방식에 분개하면서 존왕양이를 외친다. 요시다는 일본의 목표를 부국양병에 내걸고, 군함을 도입하는 등 군사근대화에 기울여야 한다면서 찾아오는 강습생들에게 설파한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젊은 혈기의 요시다 쇼인은 모두 다섯차례 투옥되는데, 조슈번의 관용으로 네번이나 풀려날 수 있게 된다. 1852년 스물을 조금 넘은 요시다는 친구와의 약속시간을 지켜야 한다며 번으로부터 여행증명을 받지 않고 동북지방에 자주학습을 위한 여행을 떠나, 탈번으로 죄를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막부가 미일수호통상조약(1858년)을 맺은 것이 계기가 되는데, 요시다는 존왕양이의 입장에서 외세에 굴복한 것이라고 반발하면서, 막부와 조슈번에 대항하게 된다. 이를 제자들과 함께 분개하면서, 힘을 규합하여 저지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다섯번째 막부에 의한 투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조슈번의 형무소였던 하기의 노산옥(野山獄) 옛터
 조슈번의 형무소였던 하기의 노산옥(野山獄) 옛터
ⓒ 김광욱

관련사진보기

 
한갓 시골 서생에 불과했던 요시다 쇼인이 메이지유신후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실력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슈번 하기를 중심으로 10대와 20대초 젊은이들은 요시다로부터 배운 기억과 수학하는 과정에서 쌓은 동문과의 연대로 막부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고, 유신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치가로 부상하였다.

정치가로 부상한 요시다의 제자들 

요시다 쇼인은 아편전쟁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위기로 인식하면서,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중국의 유학을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중요하다면서 일본이 군사강국으로 나가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요시다 쇼인에게서 배우거나 그를 따르는 인물 중에서는 조선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도 그 중 하나다. 이토 히로부미는 1년 남짓 손주쿠에서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었는데, 가쓰라 타로는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손주쿠를 물려받은 나카타니한테 배우게 된다. 가쓰라 타로도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동향인이기도 하지만, 나카타니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조슈번의 중심이었던 하기는 도꾸가와 막부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메이지유신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주도한 정치가와 지휘관을 공급한다. 그 여세로 조선을 몰아치며 병합하는데, 그 중심에 요시다 쇼인과 제자들의 사고와 행동이 자리잡고 있다. 다음 호부터 요시다 쇼인과 제자들이 한반도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첨부파일
GBW 23 (21-10-11).docm

덧붙이는 글 | 다른 매체에 게재한 적이 없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나라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잡은 성숙도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일본거주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