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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후반 토성동 조선와사전기(주) 앞, 전차가 지나간다.
 1910년대 후반 토성동 조선와사전기(주) 앞, 전차가 지나간다.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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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0월 31일, 부산 전차 첫 개통(동래선, 부산진-온천장)은 부산 근대화의 신호탄이었다. 이를 통해 부산의 시간은 압축될 수 있었다. '쇠막대기로 전기를 잡아먹고 그 힘으로 달리는 괴물'로 불렸던 부산 전차는 대표적인 대중교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1968년 철거되기까지 53년간 부산을 수놓았다.

동래선 전차 개통 다음으로 1916년에는 대청정선(부산역-부산우체국-대청동-보수동-부평시장-토성동)이, 1917년에는 장수통선(부산우체국-광복동-토성동)이 개통됐다. 시내 일주 순환선이 마련된 것이다. 표용수 전 부산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은 저서 <부산 전차운행의 발자취를 찾아서>(2009)에서 "교외선(동래선)과 연계됨으로써 전차가 시민의 발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 결과를 '근대 부산의 교통 발달과 기록-기차와 전차를 중심'(김동철, 2011) 논문을 통해 살펴보면, 1919년 당시 부산 인구가 7만 4138명이었으나 당해 부산 전차 승차 인원은 251만 4655명이었다(동래지역 통계 제외). 1인당 평균 약 33번 전차를 탔다는 것이다. 

'일본인'을 위한 '부산' 전차

부산 전차의 배경에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을 향한 수탈과 차별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반이었던 동래선 개통 당시 부산 전차 건설은 지역민 교통편의 측면보단, 일본인 휴양지였던 온천욕장 증대를 위한 경제적 측면이 강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동아대학교 전성현(사학) 교수는 노선에 부산진·동래 조선인 마을까지 포함한 것에 대해 논문에서 "장기적으로 조선인 마을을 일본인 중심의 영향권 안으로 포섭하여 공간별로 위계화하는 구심력도 강했다. 또한, 부산 내륙으로 확장되는 전차 노선을 연이어 계획했다. 부산항을 기반으로 한 일본인들의 영향력을 내륙으로 확대하는 원심력도 강했다"고 설명했다. 

궤도 부설 시기부터 일제의 수탈이 있었다. 조선인 마을인 동래지역에 궤도 부설을 위해 공익사업을 명목 삼아 3.3평방미터 당 30전 이상 사유지를 평당 15전으로 강매하고 이를 거부할 시 경찰서에 구금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래 노선과 시내 노선 요금 차이에 따른 차별도 있었다. 부산발 부산-동래 운임 할인은 있었지만, 동래발 동래-부산 운임 할인은 없었다. 동시에 시내 노선과 같은 거리일지라도 동래 노선은 운임을 더 높게 책정했다.
 
1930년 대청로. 선로를 따라 전차가 다니고 있다.
 1930년 대청로. 선로를 따라 전차가 다니고 있다.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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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와 얽힌 조선인의 저항
 
1916년 부산진 조선인 마을 앞 영가대(동구 부산진성 공원 내 정자) 근처에서 조선인들이 전차에 치였다. 그중 한 명은 즉사했다. 현장 주변으로 조선인들이 몰려들었고, 군중 가운데 한 명이 "저 전차가 사람을 치어 죽였다"라고 말하자 더 많은 조선인이 운집해 일제히 돌을 던지며 결국 전차를 전복시켰다. 사고 수습을 위해 경찰관을 태운 다른 전차 역시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조선인들에 의해 전복됐다. 

'일제시기 지역철도 연구-근대 식민도시 부산의 전철 건설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역학관계'(전성현, 2012) 논문에 따르면, 위 같은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일본인 언론과 경찰 및 검찰 등은 조선인들은 '원래 부화뇌동(附和雷同)'을 잘하고, '폭동을 재미로 일삼'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규정했다. 아울러 죽임당한 조선인을 향해 '조선인 특유의 느긋함에 선로에서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책임 전가했다. 

1918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영가대 언덕길에서 전차가 조선인을 치었다. 그 조선인은 바로 즉사했으며 일본인 기관사는 전차를 몰아 달아나 버린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회사 측은 사고를 모르쇠로 일관하자, 분노한 민중들은 전차로 몰려갔다. 그들은 전차를 밧줄로 묶어 언덕 아래로 당겨 굴러떨어지게 했다. 

전성현 교수는 "봉기는 우발적이긴 했지만 잠재된 불만의 표현이었다"라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집단행동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이러한 사건은 조선인들의 식민권력·식민정책을 향한 저항"이었다며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부산 전차 노선도
 일제강점기 당시 부산 전차 노선도
ⓒ 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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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은 '전차임인하운동'을 펼치면서 전차 운영사를 대상으로 요금 인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인 중심의 부산부민 주도로 전개하는 '전차임균일제운동(시내선 구간 및 요금제 균일요구)'·'전차부영화운동(부산부 전차운영사 매입 요구)'과 연대하기도 했다. 

교외선은 개통 당시 3구간 12전이었으며 1921년 4구간 20전으로 요금이 증액됐다. 전 교수에 의하면 해당 요금은 '세계 유례가 없는 비싼 요금'이었다. 그러자 반발한 동래 조선인은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운임할인규정의 지역적 차별 문제 제기, 왕복 승차권 할인 등을 주장했다.

1926년에는 동래-부산 간 전차 구간 및 요금제 개정 등을 요구하면서, 동래지역민 1900명이 연서했다. 1931년에도 2구간 10전으로 개정을 요구하는 서류를 운영사에 제출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움직임에도 소득 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여러 전차 운동의 결실은 일본인 중심 시내 지역 위주로 돌아간 것이다.

(*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동아대학보>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부산전차, #노면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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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알리 부국장, 동아대학보 선임기자, 前 동아대학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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