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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0월 일본 해군과 미국 해군 사이에 벌어졌던 레이테 만 해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필리핀을 빼앗기면 일본은 말라죽고 만다'는 절박함에 일본 해군이 사활을 걸고 총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항공모함 4척, 전함 9척, 중순양함 14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35척에 달하는 일본의 대함대는 필리핀 레이테 섬에 상륙한 미군을 격멸시키겠다는 결의로 닻을 올렸다.

그러나 일본 함대의 화려한 수치 이면엔 패망으로 치닫고 있던 제국 일본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4개월 전의 필리핀해 해전에서 항공전력이 완파되고 말았던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이라는 전략자산을 의미있게 운용할 수 없었다. 새로 보충된 조종사들은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착함조차 해내지 못할 정도로 훈련 수준이 낮았다(관련 기사: "흥폐가 너희 어깨에 달렸다" 일본군 '노오력' 신화의 침몰).
  
진주만 공습 이래 숱한 해전에 참가해왔던 즈이카쿠는 행운의 항모로 여겨졌으나, 전쟁말기 약화된 항공전력으로 인해 마지막 전투에서는 미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규항공모함이 그저 미끼로 사용된 사태는 일본 해군의 정상적 작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 침몰 직전의 즈이카쿠의 갑판 위에서 "만세"를 외치는 수병들 진주만 공습 이래 숱한 해전에 참가해왔던 즈이카쿠는 행운의 항모로 여겨졌으나, 전쟁말기 약화된 항공전력으로 인해 마지막 전투에서는 미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규항공모함이 그저 미끼로 사용된 사태는 일본 해군의 정상적 작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 Naval History and Heri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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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주만 공습 이래 숱한 해전에 참가하며 일본 해군의 긍지로 빛나던 항공모함 '즈이카쿠'(瑞鶴)에 주어진 역할은 미 해군의 눈을 돌릴 미끼 역할에 불과했다. 즈이카쿠가 미 기동함대를 유인하는 사이에 나머지 전함 부대가 레이테 만으로 진입해 미 상륙군을 공격한다는 계획은 사실상 즈이카쿠를 버리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10월 25일 이른 아침, 무방비로 남겨진 즈이카쿠에게 130기에 달하는 미군기가 쇄도해왔다. 이미 제대로 응전할 전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즈이카쿠는 미군기의 공습에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와중에도 '적 함대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는 전보를 발신했다.

즈이카쿠는 임무를 다했고 어머니를 부르는 수병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쓸쓸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즈이카쿠의 희생에도 전함 부대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레이테 만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다. 결과적으로 일본 연합함대는 레이테 만 해전으로 궤멸 상태에 이르게 됐고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즈이카쿠가 침몰하고 일본 해군이 수상 함대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잃어버린 이날, 그 유명한 가미카제 특공대(특별공격대, 아래 특공)가 역사상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의 생명을 던져 미 함대에 격돌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등장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다. 가미카제는 일본어로 '신이 일으키는 바람'이라는 뜻이었다.

'자폭' 군인들, 가미카제가 불러온 충격... 그 배경

그저 미끼로 쓰이다 침몰된 정규항공모함, 전투기를 몰고 자폭하는 조종사들. 이날의 아비규환은 두 가지 사실을 방증했다. 일본군이 더 이상 정상적인 작전으로는 미군에게 유효타를 입힐 수 없다는 것, 정상적인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몰락했음에도 일본군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관련 기사: '가미카제'의 최후를 본 96세 일본 노인의 증언).
  
첫 가미카제 특공은 선전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대적으로 상영되었다. 후에 해군 군령부 차장으로 영전한 오니시 중장은 '2천만 국민을 특공시키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주장하며 마지막까지 항복에 반대하였고, 패전 직후 자살하였다.
▲ 첫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을 전송하는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 첫 가미카제 특공은 선전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대적으로 상영되었다. 후에 해군 군령부 차장으로 영전한 오니시 중장은 "2천만 국민을 특공시키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주장하며 마지막까지 항복에 반대하였고, 패전 직후 자살하였다.
ⓒ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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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의 첫 가미카제 공격을 지휘한 것은 제1항공함대사령장관 오니시 다키지로(大西瀧治郎) 중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미카제 공격 직전이던 20일에 직접 특공대원들을 선발하고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일본은 지금 위기다. 이 위기에서 일본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젊은이들뿐이다. 따라서 국민을 대신해 부탁한다. 여러분은 이미 '신'이기 때문에 세속적 욕망은 없을 것이나, 나는 특공이 천황 폐하의 귀에 닿도록 하겠다."

첫 특공을 지휘했던 까닭에 오니시 중장은 가미카제의 창시자로서 오랫동안 비판 받아왔다. 그러나 오니시 중장 개인의 독단만으로 가미카제가 탄생하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사실 군인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 '특공'에 관한 논의는 훨씬 더 오래전부터 일본 해군 상층부 내에서 논의되고 기획돼 온 것이었다.

"일본이 위기" "충열 빛나리"... 젊은이들 죽음으로 내몬 구호들 

1943년 8월 해군군령부 참모진 내에서 처음으로 '필사필살 전법'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수세에 몰리기는 했지만 아직 일본 해군이 미 해군을 상대로 어느 정도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고 있던 시점의 일이다. 별 주목을 받지 못하던 특공 논의는 1944년으로 접어들면서 급물살을 타게 됐다. 그해 2월, 일본 연합함대의 근거지인 트럭 섬이 미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면서 해군 내 위기감이 고조됐다.

악화하는 전황을 뒤집을 대책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진주만 공습 당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대장의 참모로 종군했던 군령부 제2부장 쿠로시마 카메토(黒島亀人) 소장이 특공 병기의 도입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쿠로시마 소장은 진주만 공습의 성공 전력, 이미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의 후광 등에 힘입어 군령부 내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관련 기사: '소년 자폭공격' 추진한 일본 군인의 기막힌 결말).

특공 도입을 주장하던 쿠로시마 소장을 향해 일부 상식적인 군령부 참모들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쿠로시마 소장의 특공에 의문을 표했던 토리스 켄노스케(鳥巣健之助) 중좌는 전후의 해군반성회에서 당시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는 '이 병기(인간어뢰)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 6함대로서 거절합니다'라고 했습니다만, 쿠로시마 씨가 열화와 같이 화를 내더군요. 이 비상시에 무엇을 못할쏘냐고, 국적(역적)이라고. 국적 취급을 받았습니다."

특공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해군 군령부 내부의 자정 능력은 마비됐고, 광기에 찬 특공 병기 투입안이 그대로 쇼와 천황에게 보고됐다. 쇼와 천황은 특공대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이 계획에 대해 군말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도장을 찍었다.
 
"일기명중으로 신주(일본)를 지킨다. 아, 가미카제특별공격대. 충열이 만세에 빛나리"라고 적혀 있다.
▲ 가미카제 특공대를 예찬하는 전시간행물 "일기명중으로 신주(일본)를 지킨다. 아, 가미카제특별공격대. 충열이 만세에 빛나리"라고 적혀 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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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인간어뢰 카이텐과 자폭보트 신요가 신병기로써 정식 채용됐다. 1944년 10월 25일의 첫 가미카제 공격은 이미 제국의 지도부가 결정한 특공을 일선에서 실시한 것에 불과했다. 제국의 지도자들은 이 특공이 '군대'와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에 따라 특공을 찬미하는 영상과 출판물들이 쏟아졌다. 1945년 1월 25일의 '최고 전쟁지도회의'에서는 '국민총동원에 의해 전쟁을 계속하고, 특공을 주된 전법으로 한다'는 방침까지 세워졌다.

이렇듯 특공은 이제 전 국민에게 요구되는 미덕이자 의무가 됐다. '일억총옥쇄' '일억총특공'과 같은 구호들 속에서, 누군가가 '항복'을 입에 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공은 적에게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전법을 넘어 전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는 도구가 됐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은 그렇게 지탱됐고 무의미한 희생은 늘어만 갔다.

군 간부들이 만든 '특공' 신화... 그러나 '인간어뢰' 명중률은 약 2%
 
호위항공모함 세인트 로는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된 최초의 미군 함정으로 기록됐다. 첫 가미카제 공격이 적함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하자 일본 해군 상층부는 특공의 효용성을 오판하기에 이르렀다.
▲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되는 호위항공모함 세인트 로  호위항공모함 세인트 로는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된 최초의 미군 함정으로 기록됐다. 첫 가미카제 공격이 적함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하자 일본 해군 상층부는 특공의 효용성을 오판하기에 이르렀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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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요란하게 선전되고 독려됐던 특공이라는 것은 전쟁의 흐름에 있어 얼마나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탑승원의 목숨을 내던져 공격을 시도하는 특공 전법에 미군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난 미군은 철저한 대책을 강구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군의 화망을 뚫고 자폭에 성공하는 특공기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됐다.

결과적으로 미군을 상대로 한 특공의 전과는 미미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NHK가 방위연구소를 인용해 2009년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인간어뢰 카이텐의 명중률은 2%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나온다. 바꿔 말하자면, 나머지 98%의 카이텐 대원들은 적함에 닿지도 못한 채 어두운 바다 속에 영영 가라앉고 만 것이다.

의미 없는 특공에 동원된 것은 대부분 10대 중반에서 20대에 이르는 소년들과 청년들이었다. 육해군을 합해 5000여 명 장병들이 특공에 출격했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제국의 지도부는 어린 청춘들을 자폭으로 내몰고도 패전을 막아내지 못했다. 패전을 막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공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든 회피하고자 했다.

패전 직후, 해군 군령부는 연합군사령부에 의해 전쟁 중의 '특공'이 '전쟁범죄'로 심판될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연합군의 추궁으로부터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를 골몰했고 그 매뉴얼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나갔다.

책임 회피 나선 군 상층부... '자발적' 강조   

그들이 특공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대책으로 내놓았던 매뉴얼은 의외로 전쟁 당시의 선전과 일맥상통했다. 해군 군령부는 특공이 상층부의 명령에 의해 실시된 사실을 강력히 부정하며, 특공대원들의 출격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즉 특공이라는 것은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일선 장병들이 애국심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므로 비인도적인 전쟁범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결과적으로 특공에 대한 책임을 지고 누군가가 전범으로 기소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초의 가미카제 공격을 지휘했던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2000만 국민을 특공으로 보내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주장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항복에 반대하다가 자살했다. 특공 병기의 도입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쿠로시마 카메토 소장은 공직에서 추방되는 정도로 일신의 안위를 보전했고, 이후 기업체 임원으로서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 쿠로시마 소장이 특공에 대해 입에 담거나 글로 남기는 일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외의 관계자들 역시 '특공은 자발적인 것'이라는 책임 회피 매뉴얼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쯤 되면 '마음으로는 반대했지만 당시에는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정도의 회고는 차라리 양심적인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총력전 수행과 전쟁 책임 회피 과정에서 구축되고 이용됐던 특공 예찬론은 오늘날 일본 사회에도 여전히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특공은 물론 전쟁 자체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가운데, 일본회의나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국수주의 집단들은 특공 신화를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특공으로 희생된 이들이 오늘날의 시대에 전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진정으로 전몰자들을 기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는 특공의 책임자들이 면피에 손쉽게 성공한 역사 위에서, 특공이 일부 극단세력에 의해 여전히 예찬되는 현실 위에서 간단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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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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