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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할까 한다. 나는 건강 문제로 인해 수술을 두 번 받았고, 병역판정에서 4급을 받았다. 4급 판정을 받게 되면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게 되는데, "공익목적 수행"을 위해 "공익 분야에 복무"(병역법 제 2조 10항)하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일했던 곳은 사람들을 많이 대면할 수밖에 없는 기관이었고, 스트레스를 참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진전된 것도 있었다. '군 병사 월급 인상'이 문재인 정부의 공약이었던 덕에 2018년 기준으로 3개월 차 복무자의 급여는 49만여 원에 달했는데, 나는 1년가량은 50만 원 넘게 받으면서 일했다. 분명 파격적인 변화였던 것은 맞다. 그러나 최저임금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현역'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ILO는 군사적 성격으로 복무하는 것이 아닌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을 금지(제29호)하고 있는데, 징병제하에서의 병역의무라고 하더라도 노동력을 동원하는 형식의 비군사적인 작업을 강제노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복무요원 제도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2007년 8월 당시 공익근무에 대한 질의 회신에서 ILO는 대한민국의 공익근무에 대하여 "전적으로 군사적 성격의 노동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ILO 협약의 적용 제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노동존중' 정부의 아킬레스건, ILO 핵심협약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산하 전문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 차기 사무총장직 선거에 출마한다. 사진은 문재인 정부 출범부터 3년 반 넘게 외교부를 이끌어온 강경화 장관이 지난 2월 8일 오후 외교부청사를 떠나며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산하 전문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 차기 사무총장직 선거에 출마한다. 사진은 문재인 정부 출범부터 3년 반 넘게 외교부를 이끌어온 강경화 장관이 지난 2월 8일 오후 외교부청사를 떠나며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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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산하 전문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 차기 사무총장직 선거에 출마한다고 한다. 지난 1일 정부는 주제네바대표부를 통해 ILO 사무국의 강 후보자의 등록 서류를 제출하였음을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이 소식을 듣고 이러한 나의 사회복무요원 경험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노동을 했지만 제대로 된 노동으로 쳐주지 않는, 그러나 군 복무라는 차원에서 정당화되는.

대한민국이 국제노동기구의 수장이 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뒷맛이 씁쓸한 점은 어쩔 수 없다. 한국의 노동 현실이 여전히 녹록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가 있다. 지난 30년간 한국은 제29호를 포함하여 결사의 자유(87호)와 자율적 단체 교섭권(98호) 및 강제노동 폐지 협약(105호) 등 네 가지 핵심협약에 대한 비준을 미뤄오면서 국내외로 많은 비판에 직면해왔다. 

지난 2월, 세 가지 핵심협약(29호, 87호, 98호)에 대한 비준동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가까스로 통과했다. 정부는 이를 두고 "국가 신인도 제고에 기여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2020년 12월 '노조 3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면서 실업자와 해고자도 노조 가입 기회가 열리는 등의 변화가 생겼지만, 파업 등의 처벌로 강제노동을 금지하도록 규정한 핵심협약 105호의 경우 국내 형벌체계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예 비준 대상에 오르지도 못했으며 노조 활동이 가능한 노동자의 범위가 여전히 좁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사회복무요원 제도 역시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29호를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정부는 29호를 비준했다는 것이 사회복무요원 제도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뜻을 고수하고 있다. ILO는 비군사적 복무의 경우에도 대상자에게 복무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강제노동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내놓은 대안은 2021년 10월부터 사회복무요원과 사회복무요원 소집대상인 보충역에게 현역 복무에 대한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심지어 별도의 신체검사 없이 신청서 제출만으로 현역병 입영이 가능해지는 것인데, 이것을 단순히 '선택권을 부여했으니 강제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ILO의 지적을 '꼼수'로 피해 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인구 감소의 여파로 병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하는 상황에서 현역 입영 대상을 늘리는 조치의 연장선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상징성만 챙기는 일이 되지 않길

정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강 후보자의 ILO 사무총장 진출 시 '노동 선진국'으로서 우리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음을 밝혔다. 앞서 살펴본 내용으로 말미암아 볼 때, 대한민국을 노동 선진국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과도한 자화자찬이다. 

ILO만 우리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다. 유럽노총은 지난 1월 "ILO 협약 비준은 2011년 EU와 체결한 무역협정의 분명한 조건"이라면서 한국이 노동기준을 위반하고 있는 건에 대해 EU 차원의 제재가 필요하다는 입장서를 낸 바 있다. 또한, 2020년 발표된 국제노동조합연합(ITUC)의 전 세계 노동권 지수 보고서에서 한국을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나라로인 노동권 보장 5등급 국가 중 하나로 분류했다.

이렇듯 우리의 노동인권 상황은 해외 국가와 교류하는 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그러한 차에 ILO 사무총장 진출 소식이 들린 것이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노동 현안들이 있으므로 우리가 사무총장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번 일을 사회복무요원 제도에 대해 재논의할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강 후보자 역시 이 사안에 대해 좀 더 진전된 입장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던 '노동존중 정부'로의 이행은 정권 막바지에 이르러 냉철하게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아시아 최초'와 '여성 최초'라는 상징성만을 노린다는 비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태그:#ILO핵심협약, #사회복무요원, #강제노동, #노동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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