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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은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집을 나선다. 이날은 늘 사용하는 휴대전화 외에 공기계 하나를 챙겨서 미리 가방에 넣어 둔다. 실상 매너 모드로 해놓은 휴대전화는 수업하는 내내 사용을 못 하는 대신 공기계가 십분 제 기능을 발휘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놓치기에 십상인 강의 내용을 녹음하거나, 후다닥 지나가는 영상 자료를 촬영해 두면 학습 매니저로 이만한 게 없다. 혼자만 이 요란을 떨면 눈치도 보통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닐 텐데, 나이 많은 수강생들이 함께하다 보니 비슷한 부류가 적지 않다. 속내야 알겠냐마는 강사님들도 크게 눈치를 주거나 저지하지 않으니, 불량스러운 수업 태도는 제동이 걸리지 않은 채 몇 달째 이어졌다.
 
같은 수업을 듣는 수강생 한 분은 정성 들여 꼼꼼하게 수업 내용을 필기하고 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수강생 한 분은 정성 들여 꼼꼼하게 수업 내용을 필기하고 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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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저녁 강의를 수강할 때다. 수강생들 사이를 걷던 강사님이 화들짝 놀란다.

"아니! 선생님, 공책 정리를 어떻게 이렇게 꼼꼼하게 하셨어요"

평소에 지각 한 번 안 하고, 과제 한 번 안 밀리는 모범생의 공책을 들여다본 강사님의 반응에 뭇시선이 한곳으로 쏠린다. 쉬는 시간이 되자, 우르르 몰려든 수강생들은 모범생의 노트를 보고는 한결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누가 봐도 타이핑한 것마냥 깔끔한 필기였으니. 정서한 노트를 보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다른 수강생들과 달리, 뜨끔! 나는 살짝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나 돌아갈래!

어려서는 학교 선생님이든 집안 어르신들이든 연필만 잡았다 하면 "글씨 바르게 써라"가 인사였다. 귀에 딱지가 내려앉게 하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라도 또박또박 예쁜 글씨를 쓰려 애썼다. 그 덕분인지 필체가 나쁘단 소린 안 듣고 자랐는데, 세상이 좋아져 필기구 잡을 일이 줄어들면서 요즘은 어쩌다 손으로 글씨를 쓰게 되면 나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휘갈겨 쓰는 게 다반사다.
 
계미년에 통신사 서기로 간 퇴석(退石) 김인겸(金仁謙)이 쓴 한글기행가사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는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로 총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 디자인은 '일동장유가'의 글씨(오른쪽 회색)와 '문체부 궁체 흘림체(왼쪽 검은색)' 일부를 조합하여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 일동장유가 필사집 계미년에 통신사 서기로 간 퇴석(退石) 김인겸(金仁謙)이 쓴 한글기행가사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는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로 총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 디자인은 "일동장유가"의 글씨(오른쪽 회색)와 "문체부 궁체 흘림체(왼쪽 검은색)" 일부를 조합하여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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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장유가> 제1권의 첫 페이지 필사를 끝냈다.
 <일동장유가> 제1권의 첫 페이지 필사를 끝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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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부터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원장 조한필)에서는 공주시와 함께 2021년 세계유산문화 활용프로그램(조선통신사, 공주에 납시었네)의 일환으로 '집콕, 일동장유가 필사 챌린지'를 진행하고 있다.

모집 선착순 200명에 들어 <일동장유가>의 필사집을 받아들었을 때의 벅찬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763년(영조 39년)에 조선통신사 수행으로 뽑혀 일본에 다녀온 퇴석 김인겸이 쓴 총 4권의 기행가사 <일동장유가>는 한글로 기록된 데다, 필사집의 필사면을 채우는 비교적 손쉬운 비대면 프로그램이어서 며칠 내에 끝낼 것을 자신했다. 오죽 의욕이 넘쳤으면 연필로 한 번 쓰고, 그 위에 볼펜으로 덧쓸 각오를 다졌겠는가.

그러나 제1권의 몇 장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막상 퇴석 선생이 쓴 바른 글씨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 글자 한 글자 공을 들이다 보니, 평소 습관처럼 마구 휘갈겨 쓸 때와 천양지차라 너무도 힘들었다. 

그 와중에 궁금한 단어와 모르는 인물을 살펴 가며 써 내려가다 보니, 소요 시간은 예상보다 3~4 갑절은 걸렸다. 마음먹은 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슬그머니 흥미가 사라질밖에. 얼마 못 가 필사집은 이 핑계 저 핑계 끝에 책장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게 됐다. 

기록, 글자에 뜻을 입힌 것

서서히 내 기억 속에서 <일동장유가>의 필사집이 잊혀져 갈 즈음이다. 필사집을 받은 지 한참 만에 프로그램 담당자와 통화를 하게 됐다. 

"아무래도 10월 말까지 4권은 못 끝낼 것 같아요..."
"가족들과 나눠서 하시는 방법도 있어요. 본래 사업 취지에 부합하기도 하고요."


위안이 되는 통화를 마치고 나서 마음을 다잡았다. 고이 모셔둔 <일동장유가>의 필사집을 다시 꺼냈다. 어쩌면 프로그램 담당자의 조언대로 최후의 전술을 쓰게 될지도 모르지만, 남은 한 달간 혼자서 마지막 스퍼트를 내 볼 생각이다. 천만다행으로 소싯적처럼 글씨체를 가지고 잔소리할 사람이 없다. 찜해놓고 보는 드라마나 구독하고 싶은 유튜브 채널도 없다. 

설령 일정대로 4권의 필사를 끝마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마지막 장까지 마무리는 지을 생각이다. 퇴석 선생이 <일동장유가>를 통해 후세에 전하고자 한 대의의 편린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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