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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적이 된 계양산성

계양구는 인천의 가장 북쪽에 있다. 김포와 등을 마주대고, 동쪽으론 부천과 닿아있다. 불과 40~50여 년 전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드넓은 부평평야에 황금물결이 일렁였다. 80년대 중반 논밭을 메워 도시를 만들어 부평으로부터 독립했다. 1995년의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일산과 분당 등과 함께 1세대 신도시로 분류된다.

하지만 계양은 다소 밋밋하다. 심심하다. 특별한 매력도, 남다른 멋도 찾아보기 힘들다. 전국 어디서든 본 듯한 풍경이 이어진다. 조금 가혹하게 말하면 그냥 전형적인 베드타운이다. 도시정책입안자들이 왜 이렇게 설계했을까 살짝 의구심이 들기까지 한다. 기왕 넓은 땅에 새로운 그림을 그릴 바엔 더 멋지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쉽기만 하다.

그렇게 특별하지 못해선지 역대 구청장들은 계양을 도대체 무엇으로 포장하고 홍보할까를 고민해 왔다. 소위 마케팅 포인트나 계양하면 떠오르는 브랜드 이미지가 딱히 없었다. 오랜 숙제였지만 명쾌하게 답을 찾은 구청장은 아직 없었다. 그런데 최근 그 실마리를 찾은 듯하다. 지난해부터 부쩍 눈에 띄기 시작한 문화재 표지판에서 그런 움직임을 감지했다.
 
산성과 도호부, 향교를 한 셋트로 붂은 문화재 표지판. 지난해부터 부쩍 많아 눈에 뜨인다.
▲ 묺화재 안내판 산성과 도호부, 향교를 한 셋트로 붂은 문화재 표지판. 지난해부터 부쩍 많아 눈에 뜨인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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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계양을 지나다 보면 계양산성, 계양산성 박물관, 부평도호부청사, 부평향교 등을 한 세트로 묶은 표지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지난해 5월 '계양산성박물관'이 문을 열면서부터였다. 결국 구는 계양산성과 도호부 청사, 향교 등의 문화유적을 마케팅 수단으로 삼고, 계양산을 브랜딩하려는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읽힌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그 중심에 있는 계양산은 구의 랜드마크일 뿐 아니라 인천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해발 395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저 흔한 동네 야산과는 격이 다르다. 일단 외형만으로도 그렇다. 작아도 산세가 힘차고 웅장하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도 있다. 모든 인천 시민들이 사랑한다. 계양구라는 도시 이름도 그 산에서 따 온 거다.

거기에 산성이 있었다. 무려 비류 백제 시대의 것이었다. 산성에 쓰인 벽돌처럼 일정한 모양을 한 자연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종종 발견됐었다. 거기에 '동국여지지' 등에서는 계양산성의 존재를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학계 등은 이를 규명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고 관(官)이 이를 받아들였다. 20여 년 동안 10여 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유적 유물들이 발견됐다. 목간, 토기, 수막새 등 종류도 형태도 다양했다. 계양산성의 역사는 허구가 아니었다. 구는 그렇게 찾아낸 소중한 보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박물관을 지었다. 박물관 바로 위의 산성터도 깔끔하게 정비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박물관 개관에 즈음해 계양산성이 국가유적(사적 제556호)으로 지정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호국의 길
 
부평향교의 입구에 배치된 홍살문. 당시 것은 아니고 재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 부평향교 홍살문 부평향교의 입구에 배치된 홍살문. 당시 것은 아니고 재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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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기획의도대로 부평향교와 도호부관아, 계양산성박물관과 산성터를 걸어 보기로 했다. 열흘에 한번 쉬는 소중한 날을 내놨다. 당일 하늘은 청명했다. 오전 10시인데도 온도계는 벌써 30도에 육박하고 있었다. 겁도 나고 꾀도 났지만 기왕 나선 길이었다. 여정은 경인교대입구역에서 출발한다. 5번 출구로 나와 계산1동 행정복지센터 쪽으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부평향교가 나타난다.

향교는 공자를 위시해 옛 성현과 조상들에게 제를 올리는 공간인 동시에 후세들을 교육하는 배움의 전당이다. 흔히 두 동의 건물이 중심이 되는데 앞에 교육시설을 그 뒤에 성전과 문묘를 배치한다. 이른바 전당후묘(前堂後廟) 양식이다. 부평향교는 그 원칙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앞에 있는 명륜당에서는 학동들이 글을 읽었고, 뒤의 대성전에서는 제사를 지냈다.
 
부평향교 명륜당. 학동들이 글을 읽던 배움의 전당이다. 이 뒤에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이 있다.
▲ 명륜당 부평향교 명륜당. 학동들이 글을 읽던 배움의 전당이다. 이 뒤에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이 있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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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직접 본 부평향교는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적어도 문학동의 인천향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규모는 그보다 훨씬 작았다. 보존상태도 썩 훌륭하지는 않아 보였다. 글 읽는 소리도 없었고, 향내도 나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내부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건물 겉만 휘 둘러보고 나와야 했다. 관람하고 사진 찍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언덕을 내려와 계산종합시장을 지나 20여분 쯤 걸어가니 부평도호부관아가 얌전하게 맞아준다. 부평초등학교에 붙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건물로 축조 당시에는 객사와 좌우익랑 등을 제대로 갖춘 상당히 규모가 큰 관아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동헌과 사또들의 치적비들만 남아 있다. 남은 건물은 오늘날의 파출소보다 작았다.
 
부평도호부 동헌. 생각보다 작다. 원래의 크기를 잔뜩 줄여 옮겨 놓은 것이라한다. 후손들의 어리석음이 안타깝다.
▲ 부평도호부관아  부평도호부 동헌. 생각보다 작다. 원래의 크기를 잔뜩 줄여 옮겨 놓은 것이라한다. 후손들의 어리석음이 안타깝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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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부읍지에 따르면 원래 23동에 238칸의 규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1909년 초등학교를 짓기 위해 그 많은 건물들을 다 허물고 동헌만 남겨 한 구석으로 이전시켰다는 것이다. 그것도 'ㄱ'자 건물을 일(-)자로 펼치고 축소시켰다고 한다. 아이들 교육만큼 중요한 것은 또 없겠으나 조상들의 유산까지 허물 정도일 줄은 몰랐다.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욕은지'와 '어사대'가 뜬금없이 동헌 앞마당에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모두가 소중한 유산인 것은 맞지만 서로 어울리지는 않는다. 거긴 사또가 죄인들을 심문하고 억울한 민원인들의 하소연을 듣는 곳이다. 인공연못이나 임금이 활을 쏘는 곳은 아니다. 실망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저 모아 놓는다고 보존은 아닌데, 조상들의 소중한 유산이 이렇게 취급받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박물관과 산성터를 찾아서

관아를 뒤로하고 계양산성박물관으로 향했다. 심경이 복잡했다. 실망감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조상께 죄송스럽기도 했다. 박물관은 괜찮으려나, 걱정도 들었다. 속내가 그러니 태양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숨이 턱턱 막혔다. 박물관 가는 길이 하염없이 길었다. 게다가 계산역을 지나면 오르막이 시작된다.

가서 보니 산성박물관의 겉모양은 제법 위엄이 있었다. 지대가 워낙 높고 경사가 가파른 곳인지라 층계를 더 쌓아 올렸다. 외관은 성벽의 형태를 화강암과 유리로 재해석한 듯했다. 지하1층부터 지상2층까지 모두 3개 층이다. 지하라 하지만 지상층이나 마찬가지다. 뒤의 지대가 높아서 그런 것뿐이다. 실내도 잘 꾸며 놓았다.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국내 최초 산성박물관이다. 제법 위엄있어 보인다. 가파른 경사에 지어 지합층부터 시작한다.
▲ 계양산성박물관  국내 최초 산성박물관이다. 제법 위엄있어 보인다. 가파른 경사에 지어 지합층부터 시작한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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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1층에 들어서니 안내데스크 앞의 홀을 확 틔워 놨다. 시원한 감은 있었으나 뭔가 허전했다. 관람객들의 발 아래로 계양산성의 축소모형을 만들어 깔아 놨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관람객들이 하늘에서 산성을 내려다보는 기분으로 다닐 수 있게 말이다. 물론 실물을 보진 못했으니 완벽하게 재형할 순 없을 터, 그럴 땐 상상력도 필요하다.
 
잘 정리해 전시했다. 공들인 티가 났다. 계양산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산성을 조망할 수 있다.
▲ 계양산성박물관 내부 잘 정리해 전시했다. 공들인 티가 났다. 계양산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산성을 조망할 수 있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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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박물관답게 제1전시실에서는 우리나라 전역의 산성을 개괄한다. 산성의 개념과 유형 그와 관련된 역사 등을 꼼꼼하게 전시해 놓았다. 제2전시실에서는 비로소 계양산성을 만날 수 있다. 다양한 유구들과 성벽을 재현해 놓은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 찾아낸 벽돌 같은 자연석들도 한무더기 쌓아 놨다. 대체로 정리도 잘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정성이 느껴졌다.

지금은 코로나로 많이 축소되었지만 2층의 교육실에서는 다양한 교양과 체험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한다. 열린 자료실에서는 산성을 중심으로 한 학술지와 CD등이 구비되어 있다. 누구든 열람할 수 있다.
 
산성이라기보다는 알프스의 목장 같은 느낌이다. 멀리 허연부분이 성벽의 일부로 추정된다.
▲ 게양산성터 산성이라기보다는 알프스의 목장 같은 느낌이다. 멀리 허연부분이 성벽의 일부로 추정된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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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코스만 남았다. 산성터다. 계양산 중턱에 있다. 이정표를 따라 박물관 뒤편의 가파른 언덕길을 5분쯤 오르니 갑자기 시야가 확 틔며 푸른 초원이 나타났다. 거기에 나무 펜스와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 마치 알프스에라도 오른 듯싶다. 키 작은 잡목들은 모두 뽑아내고 아름드리나무들과 잔디를 곱게 심어 놨다.

별다른 설치물이나 장식은 없었다. 펜스 너머 가파른 산기슭에 5미터 쯤 질서정연하게 돌들이 쌓여있는 게 보였다. 땅속에 파묻힌 성벽의 일부였다. 거기에도 따로 설명이 없어 확인할 길은 없었다. 너른 터를 다 둘러보고 나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상엘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지만, 오기를 부려보기로 했다.

후회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완만한 능선을 지나자마자 곧 지옥문이 열렸다. 계단을 설치했지만 계양산 깔딱고개의 악명은 그대로였다. 경사가 족히 60~70도는 되는 것 같았다. 한창 때 20~30분이면 오를 거리를 한 시간이 넘게 걸려 올랐다. 하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상에 설 때의 기분을 안다. 그 때문에 오른다. 그래서인지 그 뜨거운 날에도 정상의 정자엔 빈자리가 없었다.

계양산 정상의 남쪽으론 아파트 빽빽한 부평이 한눈에 든다. 멀리로는 인천앞바다와 웅장한 인천대교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북동쪽으론 김포와 일산, 그 말 많던 아라뱃길(일명 경인운하)도 바로 코앞이다. 북서쪽으론 강화 마니산까지 보인다. 계양산성은 과연 천하의 요새였다. 아무나 쉽게 근접하지 못하고 침입하려는 누구라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즐거운 상상
 
부대는 외곽으로 이전하고 너른 터와 비석만 남았다. 내 생명 조국을 위하여라고 쓰여있다.
▲ 예비군 부대 터  부대는 외곽으로 이전하고 너른 터와 비석만 남았다. 내 생명 조국을 위하여라고 쓰여있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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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쾌한 광경으로 조금의 위안과 힘을 얻어 겨우겨우 산을 내려왔다. 평지에 내려서니 허기와 갈증이 밀려들었다. 그때까지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했다. 바쁜 마음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식당 찾아 가는 길에 예전 예비군 훈련 받던 군부대가 눈에 띄었다. 지금은 도시 외곽으로 이전해 부대 터는 텅 비었다. 옛 생각에 철망 문 너머로 부대 안을 둘러보았다.

위병소 근처에 큼지막한 돌에 새긴 비문이 보였다. 자못 비장한 서체로 '내 생명 조국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었다. 군기 다 빠진 예비군들의 다짐이라 하기엔 다소 억지스러워보였다. 철망에 매달려 부대 안을 구경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상상을 했다. 이 넓은 빈 땅에 관아며 향교를 옮겨 놓는. 기왕 하는 거 옛날에 없앴던 것들도 모두 재현해 놓는.

터는 충분하니 아예 마을 하나를 만들어도 좋을 거다. 초가와 기와집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에 있는 향교에선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관아에선 구청장이 민원인들을 만나는 거다. 장터도 들여 국밥과 막걸리를 팔고 마당놀이도 신명나게 벌이면. 아이들이 산성터와 계양산을 오르며 호국의 정신을 배우고 심신을 단련하게 한다면.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구청에 알아보니 부대는 이전을 마쳤지만 그 땅의 활용 문제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엄연히 땅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담당부서도 따로 없다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설마 거기에 아파트 지을 생각이나 할까. 어쩌면 그래서 기회인지도 모른다. 과감하게 부딪쳐보는 거다. 좋은 데 쓸 테니 달라고 졸라보는 거다. 뭐든 두드려야 열리는 법이다.

뭐든 하려면 제대로 하고 어설프게 하려면 아예 안 하는 게 맞다. 특히 역사에 관한 것이라면 더 그렇다. 잘못하면 선조들을 욕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접 걸어 둘러본 계양구의 '호국의 길'에선 실망과 희망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서너 시간 남짓한 여정은 결국 극적인 반전으로 막을 내렸다. 땡볕을 뚫고 걸은 보람은 충분했다.
 
갈증과 허기를 달래준 냉문사발과 막걸리. 시장표 묵에 MSG육수였지만 맛은 깊었다. 비결은 김치였다.
▲ 냉문사발  갈증과 허기를 달래준 냉문사발과 막걸리. 시장표 묵에 MSG육수였지만 맛은 깊었다. 비결은 김치였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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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지치고 허기진 처지라 뭘 가리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그냥 가장 가까이 있던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 중 가장 시원해 뵈는 '냉묵사발'을 시켰다. 시장에서 사온 묵과 멸치와 MSG로 만든 육수로 추정됐지만 의외로 맛이 깊고 달큰했다. 비결은 김치였다. 생김은 중국산 같았지만 주인은 아니라고, 제 손으로 직접 담갔다고 거듭 강조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특히 열무김치가 좋았다. 막걸리와 찰떡궁합이다. 가게 이름이 '전과 막걸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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