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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명한 하늘
 청명한 하늘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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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정성이 모여 만들어진 길
    
오늘도 나는 다시 걷는다. 발에 착 감기는 신발 밑창으로 흙을 밟으면 종아리와 허벅지 안쪽 근육이 당겨진다. 양팔이 자연스럽게 흔들리면 머리는 수많은 생각들로 술렁거린다.

마침내 묵어있던 것들이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온 몸은 박하사탕을 입안에 넣은 것처럼 환해진다. 한줄기 땀이 목덜미를 따라 등골로 흐르면 뺨은 붉게 물든다. 이마를 훔치는 한줌의 소금기 품은 바람,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잘 마른 생선 같은 고슬고슬한 햇살... 내 발걸음은 용수리 돌담길에서 시작해서 중산간 숲길로 향한다.

마침내 올레 26코스 절반인 13코스에 들어선 것이다. 2007년 9월, 시흥리의 작은 초등학교에 삼삼오오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이 모여서 발걸음을 뗀 것이 제주올레의 시작이었고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닦아놓은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그저 길이 있어서 걸을 뿐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온 시간들이 제각각의 가치로 빛난다. 용수포구에서 2km 즈음 걸어가서 아담한 순례자 교회가 나왔을 때 나는 괜스레 무명의 그들의 고마움에 잠시 묵념을 하고는 내 걷기의 안녕 또한 기원한다.
 
 제주올레 화살표와 표지판
 제주올레 화살표와 표지판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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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인근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제방을 쌓아 만든, 여전히 갈대밭과 부들밭, 인근 묵논습지가 어우러져 망망한 풍경을 자아내는 용수저수지를 걷고 나면(철새도래지인 용수저수지 구간을 내가 걸었을 때는 AI 방역을 위해 출입이 통제되었다) 특전사 숲길과 마주한다.

50여 명의 특전사 대원들이 이틀 동안 총 3km, 7개 구간에 걸쳐 정비하여 한때 사람들의 왕래가 끊겼던 숲길을, 다시 세상에 내놓은 길. 고사리 잎과 고목이 한데 어우러져 흡사 비밀의 통로 같은 오솔길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갑작스럽게 포장도로로 빠져나오게 된다. 속세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는가 싶을 때 또다른 이색 조형물에 탄성을 터트리게 된다. 의자마을 초입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아홉굿 의자 마을
  
 낙천리 아홉굿 의자마을
 낙천리 아홉굿 의자마을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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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굿 의자 마을은 한경면 낙수로 97번지 중산간에 있다. '굿'은 제주말로 '연못처럼 물이 고인 곳'을 말한다. 이곳의 흙은 점성이 뛰어난 찰흙이라 옛날 사람들은 흙을 파내 솥도 만들고 옹기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9개의 구덩이가 생겼는데 파낸 그곳이 점토질이라 물이 잘 고였다. 9개의 구덩이는 연못이 되었고 마을은 '아홉굿 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말 그대로 아홉 개의 연못이 있는 마을을 뜻한다.

물이 몹시 귀했던 시절, 그 연못들은 소와 말뿐만 아니라 아낙네의 물허벅 행렬이 줄을 이을 정도로 가축과 사람 모두에게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제공했다. 이런 생활상을 반영하듯 즐거운 '락(樂)'과 내 '천(川)'을 써서 '낙천리'라는 지명까지 생겼다. '낙천리 아홉굿 마을'이 된 것이다. 가뭄이 심했던 1997년, 9개의 연못을 합쳐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민물낚시와 농업용수를 조달하는 수원지로 활용되고 있다.
 
 밭담길
 밭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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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전의 '굿'처럼 마을에 여전히 연못이 있다. 그 연못 한 가운데에 이제는 턱, 하니 의자가 한 자리 차지하며 여전히 이색적인 풍광을 자랑한다. 의자 공원 입구에도 집채만 한 의자가 버티고 있다. 마을에는 무려 천여 개의 의자가 있다고 한다.

낙천리 아홉굿을 '의자마을'로 불리게 된 것은 2011년 무렵이다. 그해 사람들은 테마마을 프로젝트로 마을 상징물로 의자를 선정했다. 이때부터였다. 마을에 작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

마을 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의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의자에 써넣을 이름과 문구를 공모해서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글귀를 각각에 적어두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농어촌 마을 대상'을 수상하였다. 발을 단 입소문은 전국으로 이어져 사람들이 모여들기에 이르렀다. 나또한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을 배경 삼아 야외 의자에 앉았다.

누구를 위한 의자들인가
  
 밭담길
 밭담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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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아 땀에 젖은 발을 풀면서 나는 아주 먼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을 소급한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0). 문명 생활을 등지고 2년 2개월 동안 혼자 숲속에서 생활하다가 <월든-숲속의 생활>(Walden, 1854년)을 발표하여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그.

내가 그를 부른 것은 그의 의자 때문이다. 그는 오두막에 세 개의 의자를 들여놓았다. 의자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를 위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면 아홉굿의 천 개의 의자들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낙천리 아홉굿 의자마을을 떠나 둥근 밥사발 같은 저지오름의 분화구를 빙 돌면서도 내내 나는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했다가 다시 도리질을 반복했다. 마침내 13코스 마지막인 저지예술정보화마을에 이르러서야 만족할 만한 답을 내렸다. '나'를 위한 것이기도 '친구'를 위한 것이기도 '고독'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누구를 위한 것'이라는 수식어를 떼고 의자 자체로도 존재 이유가 있다고.
 
 순례자의 교회
 순례자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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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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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다. 2016년부터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와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장편소설 《죽음의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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