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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수 십미터 구덩이에서 유해가 쏟아져 나왔다. 폭 2-3미터 남짓의 이 구덩이는 한 골이 약 100 여 미터에 이른다.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수 십미터 구덩이에서 유해가 쏟아져 나왔다. 폭 2-3미터 남짓의 이 구덩이는 한 골이 약 100 여 미터에 이른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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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닝턴의 기사는) 흉악한 조작이다."
- 영국 주재 미국 대사관, 1950년 8월.


영국 <데일러워커> 편집자이자 특파원으로 활동한 앨런 위닝턴 기자는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남한 군인과 경찰에 의한 대전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을 보도했다.

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등 7000여 명이 대전 골령골에서 한국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기사는 "학살은 미국 고문관의 감시 하에 진행됐다"고 썼다.

보도에 영국 런던 주재 미국 대사관은 즉각 "흉악한 조작"이라고 부인했다. 당시 딘 애치슨 미 국무성장관은 주한 미 무쵸 대사에게 "우리는 이 만행 날조(데일리워커 관련 보도-기자 주)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상세하게 부정하는 것을 보내주면 감사하겠다"는 전보통신문을 보냈다.

실제 이후 대전 골령골 민간인 학살은 수십여 년 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 한국도, 미국도, UN도 이 사건을 역사의 뒤꼍에 묻어 버렸다.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수 십미터 구덩이에서 유해가 쏟아져 나왔다. 폭 2-3미터 남짓의 이 구덩이는 한 골이 약 100 여 미터에 이른다.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수 십미터 구덩이에서 유해가 쏟아져 나왔다. 폭 2-3미터 남짓의 이 구덩이는 한 골이 약 100 여 미터에 이른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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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전 골령골 현장에는 말 그대로 유해가 쏟아지고 있다. 10일 찾은 발굴 현장은 민간인 학살 전문가인 기자마저도 눈을 절로 감게 했다.

폭 2미터에 불과한 구덩이 수십 미터에서 사람의 뼈가 셀 수 없이 널려 있다. 수십 명의 인부가 호미를 들고 유골을 수습하고 있다. 한 마디로 '유골밭'이다. 이 구덩이는 지난 6월과 7월 발굴한 또다른 구덩이와 연결돼 있는데 총 길이가 100m가 넘는다. 게다가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구덩이가 위아래로 연결돼 있다.

유해 중에는 10대와 여성도 상당수다. 좁은 구덩이 안에 쪼그려 앉은 채 뒷머리에 총을 맞아 다리뼈와 머리뼈가 붙어 있는 유해도 수십여 구에 이른다. 일부 유해는 휘발유 등 불에 그을렸다던 증언처럼 장작더미 속에서 발굴됐다.

위닝턴 기자의 보도 이후 골령골 학살 보도가 세상에 나온 건 42년 만인 1992년 <월간 말>을 통해서였다. 1992년 <월간 말>(2월 호)가 인터뷰(글쓴이 소설가 노가원)한 당시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이자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 내용을 간추려 보았다.

변홍명 증언에 따르면, 학살 초기 미군과 지역 내 사회 유지들은 현장에서 총살 장면을 지켜봤다. 1950년 당시 "학살은 미국 고문관의 감시 하에 진행됐다"고 한 위닝턴의 보도와도 일치한다.
 
 골령골 학살 사건 당시 미군에 의해 촬영된 군인과 경찰의 총살 직전 장면.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Abbott) 소령은 1950년 7월 골령골 학살 현장을 찍어 본국으로 보냈고, 이 자료는 비밀문서로 분류 50년동안 비공개돼 왔다.
 골령골 학살 사건 당시 미군에 의해 촬영된 군인과 경찰의 총살 직전 장면.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Abbott) 소령은 1950년 7월 골령골 학살 현장을 찍어 본국으로 보냈고, 이 자료는 비밀문서로 분류 50년동안 비공개돼 왔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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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령골) 능선에는 경비헌병이 지키고 있었고 미군하고 사회 유지들도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총살 이유는 '북한군에 동조할 우려' 때문이었다. 총살과 암매장 과정은 글로 옮기기에도 끔찍하다.
 
"소방대원들이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트럭이 그 앞에 와서 죄수들을 쏟아부었지요. (트럭에 실린) 죄수들이 도착하면 억지로 돼지 새끼 끌어내리듯 끌어내린 겁니다"

"소방수들이 죄수들을 구덩이 앞에 엎어서 눕혀 놓고 물러나면 사수는 왼발로 (죄수) 발을 밟고 총구를 대각선으로 겨냥합니다. '사격 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참, 사람이 못할 일이었습니다"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골이 튀어나와 온몸에 튀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이 나지요"

"사수가 물러나면 기관단총으로 다시 두 번을 왔다 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확인사살을 합니다"

"구덩이가 차면 소방대원들이 매장하게 되는데 주위는 온통 피 반 흙 반이에요. 아무리 흙을 덮어도 발이 툭툭 불거져 나와요. 밤 9시가 넘었는데 그래도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있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더라고요. 다시 흙을 제치고 사수들이 소리가 안 날 때까지 M1 소총으로 마구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1950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 구덩이 위에서는 시신을 내던지고 구덩이 아래에서는 던져진 시신을 나란히 정돈하고 있다. 산자락 바로 아래로 폭 3m, 깊이 2m 가량의 'ㄱ'자 형태의 구덩이가 길게 뻗어 있다.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Abbott) 소령이 찍고,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말 NARA에서 발굴했다.
 1950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 구덩이 위에서는 시신을 내던지고 구덩이 아래에서는 던져진 시신을 나란히 정돈하고 있다. 산자락 바로 아래로 폭 3m, 깊이 2m 가량의 "ㄱ"자 형태의 구덩이가 길게 뻗어 있다.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Abbott) 소령이 찍고,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말 NARA에서 발굴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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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골령골 1학살지에서 드러난 희생자 유해
 대전 골령골 1학살지에서 드러난 희생자 유해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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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터뷰 말미에 '사람 죽이는 게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말로 당시 경험으로 인간성을 잃어간 자신을 비롯해 다른 경찰들의 사례를 소개했다.
 
"정말로 산내면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현장 근처가 온통 피바다였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대상자들 중엔 20세 미만의 아이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한 번 죽여본 사람은 사람 목숨 알기를 파리목숨으로 알게 돼요. 극단에 가면 사람 죽이는 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심리가 그렇게 돌아가더라고요"

누가 학살을 지시한 것일까? 인터뷰 당시 그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넘어 이승만 대통령을 지목했다.
 
"나는 경찰이었으니까……. 죽이고 싶었겠습니까, 시키니까 할 수 없이 쏘았을 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당시 현장에서 느낀 바로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 그런 사람들이 지시하지 않았겠는가?"

"더 올라가면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겠어"

그는 1945년 경찰에 지원했는데 골령골 학살에 대한 트라우마로 불교에 귀의, 충남의 한 암자에서 유명을 달리한 영령을 위로하며 속죄하며 살았다고 한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대상으로 최소 4000여 명, 최대 7000여 명의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가해자들은 충남지구 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었고, 그들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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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은 또 보복을 낳고... 북한군, 우익인사 1557명 보복학살
 
 대전형무소에서 북한군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들.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하자 '양민을 탄압·학살한 혐의' 등으로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1500여 명을 붙잡아 대전형무소에 수감했다. 북한군은 퇴각 직전인 1950년 9월 25일 새벽부터 27일까지 3일간 수감자들을 집단 처형했다. 정치보위부 간부가 심사 및 처형 명령을 내렸고, 인민군과 정치보위부원, 내무서원이 총살을 집행했다. 조사 결과 충남지역 우익인사 희생자는 1557명이었다.
 대전형무소에서 북한군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들.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하자 "양민을 탄압·학살한 혐의" 등으로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1500여 명을 붙잡아 대전형무소에 수감했다. 북한군은 퇴각 직전인 1950년 9월 25일 새벽부터 27일까지 3일간 수감자들을 집단 처형했다. 정치보위부 간부가 심사 및 처형 명령을 내렸고, 인민군과 정치보위부원, 내무서원이 총살을 집행했다. 조사 결과 충남지역 우익인사 희생자는 1557명이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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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경에 의한 골령골 학살은 또 다른 우익보복 학살로 이어졌다.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하자 '양민을 탄압·학살한 혐의' 등으로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1500여 명을 붙잡아 대전형무소에 수감했다. 경찰, 군인, 공무원,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인사들이었다. 인민군은 퇴각 직전인 1950년 9월 25일 새벽부터 27일까지 3일간 수감자들을 집단 처형했다.

정치보위부 간부가 심사 및 처형 명령을 내렸고, 인민군과 정치보위부원, 내무서원이 총살을 집행했다. 조사 결과 충남지역 우익인사 희생자는 1557명이었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북한군이 취조과정에서) 체포된 모든 사람은 '양민을 투옥하고 학살했다'라는 내용이 들어간 자술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라고 밝혔다. 한 수감자가 그런 일이 없다고 자술서를 쓰자 심하게 구타당했다.

이를 본 다른 수감자들은 모두 "양민을 학살했다는 허위자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끝까지 자술서를 쓰지 않은 수감자들은 석방됐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1950년 6월 말부터 9월 말까지 4개월 동안 대전 골령골에서 최소 4000명-7000명, 대전형무소에서 1557명(북한군에 의한 보복학살) 등 최대 8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학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북한군이 퇴각하자 이승만 정부는 다시 북한군에 동조하거나 협조한 부역 혐의자(북한군에 대한 정보 제공, 안내, 자진 방조 등)를 찾아내 대전형무소 등에 감금했다.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9월 28일부터 11월 13일까지 충남경찰국에서 검거한 부역혐의자 수는 1만 1992명에 이르렀다. 이중 최소 수천 명이 처형되거나 열악한 수용시설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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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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