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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과대학을 나와도 농사를 짓는 사람이 거의 없다. 농사가 힘든 반면에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서울대학교 비농업학과를 나와 함께 농사를 짓는 부부가 있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농민운동에 투신한 부안군 하서면의 유재흠(부안군 우리밀영농조합법인 대표)-임덕규(부안군 여성농어업인 센터 대표) 부부 얘기다.

이들이 부안에서 농사를 지은 지 30년이 되었다. 강산이 세 번 변했다. 그들이 왜 농업에 투신했고, 투신 후 농사지으며 어떻게 지냈는지,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는지 그리고 지역을 바꾸는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 궁금하다. 오랜 지인 유재흠을 지난 8월 23일 부안군 우리밀영농조합 사무실에서 만났다.

애인 따라 고향도 아닌 부안으로
 
 인터뷰 하는 유재흠 부안군 우리밀 영농조합법인 대표
 인터뷰 하는 유재흠 부안군 우리밀 영농조합법인 대표
ⓒ 지역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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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춘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진학한 것이 1986년이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 이른바 건국대 항쟁(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3박 4일 동안 건국대학교에서 일어난 대학생들의 점거농성 사건)을 거치고 고향(춘천시 동내면)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경험하면서 운동에 대한 고민도 깊게 하였다. 87년 대학 2학년 때 진로를 결정했다.

운동을 평생 하려면 직업을 뭘 할 거냐를 고민하다가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농사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고, 휴학하고 내려와서 농사일을 좀 해 보니 그게 내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농민운동을 하기로 딱 정리했다.

운동을 같이 할 사람을 찾던 중 지금의 아내 임덕규를 만났다. 그 무렵 임덕규는 영어영문학과(86학번) 학생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서울대 농민분과장을 맡고 있었다. 서로 관심이 같으니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내가 인문대 학생회장이 되어 평양축전준비위원장을 하다가 8개월간 옥살이를 했는데 임덕규가 내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1990년에 출소를 했고 임덕규는 91년에 농민운동을 위해 부안으로 떠났다. 1992년 그녀를 따라 부안으로 내려왔다. 임덕규가 고향(수원)도 아닌 부안에 내려간 것은 전대협 차원의 일종의 파견이었다. 당시 부안에는 엄영애라는 걸출한 여성운동가가 여성농민의 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활동가 파견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약칭 전여농, 1989년 창립)에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 땅 한 평 없이 몸뚱이 하나로 시작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진짜 농사꾼이 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정착 과정의 어려움에 대해 말해 달라.

"사람들은 귀농을 해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전원생활을 꿈꾸지만, 나는 내 집도 없이 16년간 남의 집에서 살았다. 92년 결혼해서 97년까지 6년간 남의 집 곁방살이를 했고, 97년부터 2002년까지 남의 재실(齋室)에 거처했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는 하서미래영농법인 옆 작은 사무실에서 6년을 살았다. 그 사이에 딸(1993년 생)과 아들(1997년생)이 태어나서 자라고 있었으니 그 불편함은 말할 나위 없었다.

2008년 농약 사고로 영농조합법인이 풍비박산이 났다. 지금까지 앞도 보지 않고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도 되고 해서, 아내에게 우리가 시골 와서 16년을 살았는데 뭐 가진 거 있냐고 물었더니 집 지을 돈은 있다고 했다. 2009년 내 집을 짓고, 2010년 1월 눈이 60cm나 내린 소한에 꽹과리를 치며 집들이를 했다. 새벽에 사무실 문 두드리는 사람이 없으니 세상 행복했다.

처음에는 내 땅이 없으니 정미소에서 날일로 시작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점차 안정되어 갔다. 1993년에 경운기로 논밭을 갈아주었고, 남의 논 5마지기를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의 반값 농기계 정책으로 이앙기도 구입(150만 원)했다. 경운기와 이앙기가 있으니 땅을 계속 빌려 1995~1996년 무렵에는 35마지기까지 늘렸다.

96년에 처음으로 농업후계자 자금을 받아 논 1200평 한 필지를 평당 3만 원에 구입한 후 농업기반공사의 전업농 자금 등을 이용하여 2016년까지 계속 땅을 늘려왔다. 현재는 내 땅 1만 4천 평(논 1만 평과 밭 4천 평)에 남의 땅 1만 8천 평을 합쳐 3만 2천 평(논 2만 4천 평, 밭 8천 평) 농사를 짓고 있다."

- 맨몸으로 시작해 내 땅 1만 4천 평을 갖게 되었고 연소득도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나은 부농(?)이 되었으니 성공한 귀농인이다. 성공 비결(?)이 궁금하다. 한참 농사를 지을 때는 새벽 2시부터 밤 10시까지 10년간 일했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

"농사를 가장 많이 지을 때는 48필지(300마지기) 6만 평이 넘었다. 그런데 이들 논이 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5개 면에 흩어져 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3시간 정도 물꼬를 보고, 4~5시에 트랙터를 끌고 나가서 아침 9~10시까지 로타리를 치고(모내기를 할 수 있게 논을 판판하게 고르는 일), 이앙기를 끌고 나가서 저녁 7시까지 모를 심고, 밤 10시까지 초벌 로타리를 친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밥 먹고 잔다.

2008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이렇게 일했다. 이 무렵에는 내 논 6만 평 이외에 남의 논 12만 평의 기계 작업을 했으니 18만 평 농사를 지은 셈이다. 기계 작업만으로도 1년에 몇천만 원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인데, 그 무렵에는 40대 한 창 때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다행히 논농사는 4월부터 6월 사이에 40일 바짝 일하고 여름에는 쉰다.

그러나 9월 중순 이후 벼 수확이 시작되면 다시 정신없이 바쁘다. 9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벼를 베고 건조장에서 일한다. 10월 5일경부터 벼가 밀려들기 시작하면, 한 열흘은 넣고 빼고 말리고 하는 작업을 반복하느라 거의 잠을 못 잔다."

농약 사고
 
 초창기 영농법인 앞에 선 유재흠
 20년전 지은 하서미래영농조합 앞에 선 유재흠
ⓒ 지역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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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내려간 것은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 농사도 열심히 지었지만 농민운동에도 헌신했다. 부안군 농민회 총무, 간사, 사무국장을 거쳐 전북 농민회 도연맹 정책위원장을 2006년까지 열심히 했다.

그런데 2000년 무렵부터 농민운동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사회의 민주화나 농민운동의 과제가 혁명적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농민운동의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혁명적 과제가 없어진 마당에 혁명의 깃발을 들고 열심히 달린다 한들 의미가 없었다.

나의 시대적 과제는 투쟁을 통해서 얻은 성과를 생산 현장, 생활 현장에서 새로운 장으로 열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농사짓기로 마음먹고 했던 공부가 협동운동에 관해서였다.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라는 책을 읽으면서, 정착 초기에는 이런 배움을 현실에 적용해 보려는 꿈으로 부풀어 있기도 했다. 낯선 현실 앞에서 뒤로 밀려났던 희망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협동운동 그 다음에 지역운동, 지역농업을 조직화하기 위한 생산조직을 결성하자고 고민을 정리하였다.

2000년 17명의 회원으로 친환경 쌀 작목반(18ha)을 결성했다. 농업의 미래를 열자는 뜻으로 '미래작목반'이라 이름 지었다. 밥맛도 좋고, 환경을 생각하고, 먹는 이의 건강을 생각하며 농사를 짓자는 데 뜻을 모았다. 2003년에 5개 마을작목반, 100ha로 확대되면서 '미래작목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4년 12명이 500만 원씩 출자해 자본금 6천만 원으로 '하서미래영농조합법인'을 조직하고 땅도 1200평 구입했다. 정부의 친환경 농업지구 조성사업으로 창고와 건조시설, 퇴비생산시설 등 기반을 갖추었다. 정부로부터 8억 원을 지원받고 2억 원을 자체 부담했다. 생산물은 초록마을과 아이쿱 생협에 판매하고, 홈페이지를 제작해 인터넷 판매도 했다.

정부의 친환경 농업지구 조성사업으로 생긴 '청옥들 친환경단지' 안에 있는 주변 사람들은 다 들어오라고 했다. 농림부에서 친환경 자재를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참여자가 늘어났다. 단지 면적이 300ha, 생산량이 1800t으로 늘어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사고가 터진 것이다."

- 영농조합법인에서 농약 사고가 터져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들었다.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무슨 뜻인가?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2008년 10월 28일 오후 2시 부산시 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전화가 왔다. 소비자 민원이 있으니 잔류농약 검사에 동의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사해 보니 판매한 쌀과 수매한 벼에서 잔류 농약이 검출되었다. 인증이 취소되고 판매가 중단되었다. 예상 손실액은 3억 원쯤 되었다. 이리저리 뛰며 읍소하여 모두 정리하고 나니 실제로 1억 원쯤 손실이 있었다.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되었지만 4월이 지나서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억울함도 두려움도 아닌 절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감정의 자락을 통제할 수 없었다. 긴장을 늦추려고 술을 먹었다. 아침 7시부터 소주를 맥주 컵으로 한 컵씩 하루 종일 마셨다. 그래도 이상하게 취하지 않았다.
 
 20년 전 지은 녹슨 하서미래영농조합법인 창고. 미래영농조합법인과 우리밀 영농조합법인이 이웃하고 있다.
 부안군 우리밀영농조합법인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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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였을까. 5월 어느 날 아침 노무현 대통령 서거 소식에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는 대목의 유서를 읽으며 그분의 절망을 절절하게 공감했다. 불면의 밤은 이쯤에서 멈추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는 타인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끊임없이 타인의 이기심과 타협했다. 

문제를 끄집어내고 밝혀내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을 피하려고 두루뭉술하게 정리하는 것이 대중적으로 잘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조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누구는 새벽에 화학비료를 뿌린다더라'라는 수군거림에 대한 너그러움이 결국 큰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고름을 짜기로 다짐했다. 맨 먼저 나의 마음속에 있던 '보상 심리'라는 고름부터 짜내기로 했다. 금전적 손해도 컸지만 정말 나를 괴롭힌 건 배신감이었다. 믿었던 이웃이 몰래 농약을 쳤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한바탕 방황 끝에 사람을 원망하는 이유는 뭔가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이고, 그 기대의 밑바탕엔 '내가 당신들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마음을 바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자고, 그것이 나를 살리고 남도 살리는 길이라고."

- 농약 사고 이후 법인을 어떻게 재건했나. 농민들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농약 쳐서 사고를 내 법인이 작살이 났는데 친환경 쌀값을 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농민도 있었다. 친환경 자재를 나누어 주면 '친환경 자재를 줘서 잘 쓰기는 하는데, 내가 자네가 주는 자재를 써주는 대신에 자네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고 묻는 농민도 있었다. 이대로는 법인이 지속가능하지 않아 조합원을 정리하기로 했다. 단지화, 규모화라는 명분으로 친환경에 대한 개념도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느라 엉뚱한 사고가 난 것이다.

300ha를 할 때는 5개 작목반에 100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는데 이것을 2개 작목반, 23명, 80ha로 줄였다. 1800t씩 수매하다가 수매량이 400t으로 줄었다. 작목반을 줄인 이후로 아직까지 한 번도 사고가 나지 않았다. 참여 농가가 모두 친환경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작목반원을 줄이니 친환경단지가 무너졌다. 친환경 농사를 짓는 논 옆에 관행 논이 있다. 그 논에서 농약을 치면 옆의 친환경 논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행 논의 피해를 막기 위해 4m의 이격 거리를 두기로 하였다. 조합원이 친환경으로 짓더라도 논두렁 양쪽 4m까지는 관행으로 처리했다. 즉, 수확할 때 양쪽 4m의 벼를 먼저 베어 관행 벼 처리하고 나머지 벼만 친환경 벼로 수매했다. 1200평짜리 논은 4000 평방미터(40미터×100미터)인데, 실제로는 3200평방미터(32미터×100)만 친환경 벼로 수매하는 것이다.

그래도 문제가 있다. 관행 농사를 하는 사람은 논두렁에 제초제를 습관처럼 친다. 제초제가 친환경 논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1m의 논두렁을 양쪽에 하나씩 더 쌓는다. 결국 새로운 논두렁 기준으로 이격 거리를 두면 1200평 기준 1000평방미터(10미터×100미터)의 벼가 관행으로 처리되지만 조합원들이 잘 지키고 있다."

국산 밀 자급도시 부안 만들기 프로젝트
 
 밀 심기
 밀 심기
ⓒ 부안군 우리밀 영농조합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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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군 우리밀 영농조합법인의 대표를 맡고 있는데. 우리밀의 자급률이 1%에 지나지 않는다. 전망은 어떤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법(PL480)으로 밀이 대량 수입되면서 우리밀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전두환 군사정권이었다. 1982년 밀 수입이 자유화되고, 1984년 밀 수매제가 폐지되었다. 밀 수입자유화 이후 무역장벽은 관세율이 유일한데, 이 수치가 3% 정도로 정말 너무나 낮아 국내 밀 산업 보호에 무용지물이며, 이를 통해 생겨난 관세조차 국산밀 발전에 사용된 적도 없다. 그런데 최근은 이 3%의 관세율마저도 완전히 사려졌다. 우리나라 밀 주요 수입국 미국, 호주, 캐나다 그리고 프랑스가 든 유럽연합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에서 밀 관세를 0%로 하자고 합의한 때문이다.

1991년에 생명농업을 추구하던 농민운동 지도자들과 시민운동세력이 힘을 모아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를 결성했다. 16만 명이 32억 원을 출자했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은 자급률 0%였던 우리밀을 한때 1만t까지(자급률 0.5%) 늘릴 정도로 성공했지만 과잉생산과 불안정한 소비로 경제사업으로는 실패했다.

부안에서 밀농사를 시작한 것은 우리밀 살리기 운동과 때를 같이 한다. 처음에는 운동으로 시작해서 2000년대에는 우리밀 농협, ㈜우리밀, 아이쿱생협 등과 관계를 맺으며 생산을 확대해 갔다.

2011년 '부안군 우리밀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해 부안 관내에서 밀 재배하는 농가를 하나로 모았다. 설립 당시에 밀 재배 면적이 70~80ha였는데 첫해 170ha, 이듬해 300ha, 2015년에 500ha로 꾸준히 늘어났으나 그 후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생산량 및 판매액은 연도별 풍흉에 따라 2019년 1400t 13억 원, 2020년 850t 8억 원, 2021년 2260t 21억 원으로 다소 불안정하다. 현재 조합원은 320명이고 자본금은 4억 2200만 원이다. 우리나라 전체 밀 생산량이 대략 2만5천t(자급률 1.2%)이니, 우리가 거의 10% 생산하는 셈이다.

정부가 최근 식량계획을 발표했는데 밀 자급률 2025년 5%, 2030년 10%를 목표로 하고 있다. 농가에 대한 지원(종자 반값, 보관·건조·기계시설 지원 등)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판로 확보를 위해 대규모 소비처를 발굴하고, 조직체를 육성하겠다는 등 다섯 가지 기본전략을 내세우고 있는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기대를 해본다.

우리밀은 일반 시장이 없다. '우리밀 농협', 생협, '주식회사 우리밀'이 수매를 하는 특수 시장이다. 값싼 수입 밀에 대항해 일반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서는 밀 값을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농가들에게 식량자급 직불금을 지급해서 밀 값을 20kg 포대 당 2만 원대로 낮추는 것도 방안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제2녹색혁명'을 내걸고 국산밀 자급률 10% 달성을 목표로 유사한 정책을 추진한 바 있으나 실패했고, 자급률은 여전히 1%대에 머물고 있다. 국산 밀 가격에 대한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 필자)

- '국산 밀 자급도시 부안 만들기'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1050억 원이 들어가는 엄청난 프로젝트인데 가능한 일인가.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 커졌다. 1050억 원은 과한 의지의 표현이다. 생산시설부터 인력육성까지 모든 체계를 갖추려면 많은 돈이 들겠지만 1년에 예산 2억 원만 있으면 부안군 자급률 30%가 가능하다. 나라 전체로 보면 500억 원이면 국산밀 자급률 10% 달성할 수 있다. 국내·외 밀 가격차가 150% 수준이면 국산 밀 소비가 가능한데, ha당 250원의 밀 직불금을 주면 된다. 자급률 10% 물량은 20만t이니 500억 원이 필요하다. 밀 평균 생산량이 ha당 4t을 상회하므로 ha당 단가는 100만 원 정도면 될 것이다. 

소비처를 늘려가며 다음으로 필요한 것을 찾아 시설 등을 하면 된다. 그렇다고 이 프로젝트가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다. 우리밀을 부안군의 특화 품목으로 육성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저장시설 확충, 부안지역 국산밀 소비업체 발굴 등은 이미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당초 유재흠이 부안군 요청으로 제출한 기획안은 56억 원 프로젝트였으나 군과 도를 거치면서 농림부에 제출된 프로젝트는 1050억 원으로 부풀어졌다. 공무원들은 소비처를 찾고 투자를 늘리는 게 아니라 투자 계획부터 먼저 세운다. 유재흠은 밀 직불금 500억 원이면 밀 10%의 자급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는데 1050억 원 프로젝트는 좀 뜬금없는 거 아닌가. - 필자)
 
 부여군 우리밀 영농조합법인이 운영하는 밀 저장고
 부여군 우리밀 영농조합법인이 운영하는 밀 저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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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쿱 생활협동조합의 전국 생산자회 '파머스 쿱'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고, 구례 쿱 라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아이쿱이 친환경농업 생산자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쿱은 소비자 중심, 대농 중심이라는 비판도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연대라는 관점에서 아이쿱과의 관계를 설명해 달라.

"2008년 농약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아이쿱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아이쿱에 하서미래영농조합법인의 쌀과 우리밀 영농조합법인의 밀을 계약생산하고 있다. 정부 수매 이외의 전량을 납품하고 있다. 아이쿱 생협의 생산정책은 생산자 정책이 아니고 소비 우선 정책이다. 어떤 판단 기준으로 소비를 할 것인가, 그걸 윤리적 소비로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생산자와 계약을 한다. 아이쿱의 매입가격이 다른 생협에 비해 반드시 높지는 않지만, 생산자는 소비가 가능한 수준을 고민하며 농산물의 품질 수준과 가격 결정에 참여한다.

소비 우선 정책이란 점에서 생산자가 뒷전이라는 오해가 생길 수 있는데, 시장에는 빼도 박도 못하는 경제 논리가 있다.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생협도 살아남지 못하고, 생협이 죽으면 생산자도 살아남을 수 없다. 소비자를 중시하면서 생산자와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것이 소비 우선 정책의 핵심 내용이다.

구례와 괴산에 클러스터(가공·소비·휴양 복합시설)가 만들어지면서 생산회원들에게 1억 원 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현찰 1억 원을 가진 농가가 많지 않으니 생협에서 80~90%를 빌려주기도 한다. 투자금에 대해서는 결산에 따라 배당금도 나오고, 생산 장려금도 나온다. 생산자들은 계약을 통해 생산물을 안정적으로 팔 수 있고, 그 생산물을 2차 가공해서 발생하는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 다만, 아이쿱 생협의 전체 생산자가 3천 명쯤 되는데 생산자 정회원이 4백 명이라는 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농업에서 협동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미농사 회원들
 미농사 회원들
ⓒ 부안군 우리밀영농조합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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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군 지역농업의 미래를 위해 젊은 농부를 육성하는 '협동농사'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인데 잘 되고 있나.

"영농조합법인에 젊은 사람들이 막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청년 모임이 결성되었다. 하서미래영농조합법인의 조합원 7~8명에 농사는 짓지 않지만 뜻을 같이하는 '마음 농부'들이 결합했다. 16명이 2016년 창립총회를 열고 '미친 듯이 농사짓는 사람들'(약칭 '미농사')을 결성했다. 젊은 친구들이 좀 길게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에 비전이 필요하다. 이 친구들이 가장 어려운 건 농지를 늘릴 수 없다는 거다. 직불금도 나오고 해서 논을 구하기 더 어렵다. 그래서 단위 면적당 소득이 높은 밭농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밭농사는 한 마지기에 조수익(생산비를 포함한 수익) 기준으로 논의 6배 정도가 나온다.

밭농사는 개인이 하기 힘들기 때문에 협업 방식으로 시도했다. '농사를 어떻게 협업할 것이냐'는 주제로 몇 차례 토의를 하고 일본 연수도 다녀왔다. '기술의 고도화와 비용의 최소화'라는 협동 농사의 원리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7명이 뜻을 모아 양파 공동농사를 시작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했다. 육묘부터 수확-선별-출하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하고 공동 정산했다. 4000평에 양파를 심었는데 농사는 잘 되었지만 결산을 해보니 남는 게 없었다. 경험과 전문성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함께하다 보니 비효율적이었다.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게 무엇보다 필요했다. 이런저런 교훈을 남기고 양파공동농사팀은 해체되었다.

그러던 중 젊은 층에서는 한 단계 더 높은 공동농사의 모델을 만들었다. 양파공동농사를 함께했던 사람 가운데 4명이 모든 농사를 통합 일원화하는 시도를 했다. 밭농사뿐 아니라 논농사까지 모든 작물을 공동으로 재배하고 공동 계산하는 '살림통합협동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모두 즐겁게 일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양파공동농사와 살림통합협동농사의 실험은 우리에게 '농업에서의 협동은 어떤 모델이 어느 수준까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협동의 어려운 점은 책임을 나누는 것이다. 자연 의존도가 높은 농업의 특성상 살림을 통합하는 수준의 책임을 나누기가 쉽지 않다. 책임과 기여가 정확하게 계산되지 않을 뿐더러 나눈 몫을 두고 그것이 많든 적든 만족하기 어렵다. 농사의 협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기술도 중요하다. 기술 축적을 목표로 하는 협동 역시 매우 큰 가치가 있다.

'미농사'의 실험은 이런 의미에서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미농사의 실험을 토대로 영농법인의 밭작물 관리 체계가 정비되었다. 밭작물 재배의 노하우도 축적되어 재배 규모와 수확량이 관행 농사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협동의 다음 단계는 뭐가 될 것인지가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다."

"우리 동네만이라도..."
 
 유재흠 부안군 우리밀 영농조합법인 대표(왼쪽)와 인터뷰 하는 필자
 유재흠 부안군 우리밀 영농조합법인 대표(왼쪽)와 인터뷰 하는 필자
ⓒ 지역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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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꾸며 땅 한 평 없이 몸뚱이 하나 믿고 고향도 아닌 낯선 객지에 내려와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내 집도 없이 16년간 남의 집에서 살았다. 억척같이 농사짓고 치열할게 투쟁했다. 어떻게 그 힘든 세월을 견뎠을까 의아하다. 참으로 곰 같은 사람이다. 다만 머리가 좋고 꾀가 많은 곰.

세월이 바뀌어 혁명의 시대가 갔다는 것을 알았다. 좌절하기에는 지난 세월이 아깝다. 투쟁의 성과를 지역농업의 조직화로 발전시켰다. 죽음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시련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안정되었다. 두 개의 영농조합법인은 지역농업의 버팀목으로 성장했다. 이제 내 집을 짓고, 적지 않은 내 땅과 소득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협동을 통해 지역농업을 이끌도록 청년 농부들을 돕고 있다. 평생의 동지인 아내 임 덕규는 부안여성농업인센터 대표를 맡아 여성농민의 인권 신장과 아동교육에 힘쓰고 있다. 임덕규 대표는 2018년도 지역재단 지역리더상을 받았다.

그러나 지역에 머물 수 없다. 원래 혁명을 꿈꾸던 청년들이 아닌가. 유재흠이 꿈꾸는 한국농업과 농촌의 미래에 대해 물어보았다.

"협동을 통해 만들어진 생산조직은 지역을 돌아가게 하는 엔진이다. 이런 엔진이 많아져야 사람도 모이고 문화도 생긴다. 나의 고민은 이런 엔진을 어떻게 만들고, 누가 돌리며, 무엇을 싣고, 누구와 함께 어디로 갈 것인가이다. 거창하게 한국 농업이 아니라 우리 동네만이라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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