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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고구마 농사를 짓는 시골 마을, 한 농부가 수확한 고구마를 볏짚과 수숫단을 둘러쳐 쌓아 겨울에 대비해 저장하고 있다. (옛 자료, 필름 스캔)
 1980년대 고구마 농사를 짓는 시골 마을, 한 농부가 수확한 고구마를 볏짚과 수숫단을 둘러쳐 쌓아 겨울에 대비해 저장하고 있다. (옛 자료, 필름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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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만 국민의 영양간식이 된 고구마가 제철을 맞았다. 구황작물이던 고구마의 화려한 변신. 한때는 못생긴 것에 빗대어 고구마 비하 발언도 있었지만, 요즘 고구마의 모양새가 참 예쁘다.

밤 맛이 나는 밤고구마 율미를 비롯해 단맛을 배가시킨 신율미, 쪄서 먹을 때 맛이 좋은 증미, 튀김이나 고추장, 물엿, 증류주 등 가공식품을 만드는 연미, 여름철 수확에 적당한 다호미와 풍원미, 따뜻한 남쪽뿐 아니라 전국 재배가 가능한 품종 진흥미, 신천미, 신건미 등 맛과 효능, 사용되는 기능성도 다양하다.

종자 이름 뒤에 아름다울 미(美)를 써넣는 것은 고구마의 화려한 변신을 뜻한다. 

조선 수군은 고구마 맛을 봤을까?

고구마는 어디에서 왔을까? 지리적표시제 등록한 전남 해남 땅일까? 종자 연구센터가 있는 전남 무안 땅일까? 아니다. 고구마는 전남 완도 고금도에서 먼저 재배했다는 말이 전한다. '고금도에서 생산하는 마(麻)'라고 해서 고구마라 불렀다나? 그 말을 들어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고구마와 관련한 설화가 있다. 몇백 년 전 고금도에 성처사와 득암리에는 김처사라 부르는 도인이 살았다. 장흥 천관산에는 위처사라는 도인이 있었는데, 고금도의 두 처사를 자주 찾아와 학문을 논했다.

어느 날 일본 사람이 탄 배가 파선해 고금도에 밀려왔다. 세 처사가 구조해 보살피어 돌려보내려니 고마움의 뜻으로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덩이뿌리 몇 개를 건네주었단다.

이것을 심어서 수확 후 먹어보았는데 너무도 맛이 좋아 세 처사는 고을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었다. 작물이 번성한 이후 육지와 다른 섬으로까지 소문이 나서 그때부터 사람들 입에서 고금에서 나오는 특산 마, '고금마'로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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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구황작물인 고구마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조선 영조 때인데, 고구마의 유래에는 두 가지 주장이 팽배하다.

고구마가 처음 들어왔을 때 전라도 고금도 땅에서 많이 재배한 데서 생겨났다는 설과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에서 왔다는 설이다. 일본에서는 고구마로 부모를 봉양한 효자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해 그 작물을 '고코이모(古貴爲麻)'라고 불렀다. 코코이모라고도 불리는데 뜻이 '효행 감자'란다. 그 고귀위마가 한반도에 들어와 고구마로 불렸다고도 전한다.

조선 수군들도 맛있는 고구마를 먹고 힘을 냈을 것이라는 신박한(?) 생각. 오호라, 정말로 이순신의 군사들이 고구마를 즐겨 먹었을까?

어느 해 고금 약산에 이순신 장군님표 고구마 농사를 짓는다는 분이 계셔서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그분 말씀이 "임진왜란 당시에도 고금도에서 고구마를 재배하지 않았겠냐"는 것. 조선 수군들도 맛있는 고구마를 먹고 힘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호라, 정말로 이순신의 군사들이 고구마를 즐겨 먹었을까? 문헌에도 없는 신박한(?) 그의 생각이 어쩌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대승리로 이끌고 나서 목포와 군산을 거쳐 고하도 진영에서 다시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고금도는 조선 수군에게 여러 가지 군영 조건을 갖출 수 있는 요새(要塞)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금도는 군량을 확보할 수 있는 옥토가 많았다. 이순신이 식량을 많이 얻었다고 해서 이름 붙은 보성의 득량만도 지척이다. 이순신은 군졸들의 가족이 고금도에서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이곳에서 염전을 개발해 육지에 내다 팔아 군자금을 확보할 계획도 세웠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삶이 궁핍한 터라 연안을 떠돌던 백성이 전부 고금도로 몰리면서 고금도는 하나의 군수 기지창이 됐다고 한다.

조정의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여서 이순신은 자력으로 조선 수군을 이끌어야 했기에 백성들에게 농토를 제공했던 것. 그래서 고금도에 온 군사의 수가 점점 불어나 한산도에서의 10배나 됐다고 한다.

명나라 장수 진린도 군사를 데리고 고금도에 합류했다. 그때 진린의 군사들은 따로 진을 쳤다. 진린의 군사들은 군량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했을까?

그들은 본국에서 고구마를 가져왔을까? 그래서 고금도 백성들에게 작물로 심게 했을까? 조선시대 강진현에 속한 고금도가 고구마 생산기지였다던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근거일까?

- 2편 '제발 키우시오...' 조선 선비들은 왜 고구마에 집착했나(http://omn.kr/1v377)로 이어집니다.

정지승/다큐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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