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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대 중엽부터 일본에 표착한 어민이나 조선통신사를 통해 고구마의 존재가 조선에 알려지기는 했으나, 이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후반부터인 것 같다.
 1600년대 중엽부터 일본에 표착한 어민이나 조선통신사를 통해 고구마의 존재가 조선에 알려지기는 했으나, 이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후반부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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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고구마의 이름이 '고구마'인 이유가 있다?(http://omn.kr/1v378)에서 이어집니다.

시배지(始培地)란 어떤 작물을 처음 재배한 곳을 기념한 곳이다. 가령, 전남 목포 고하도에 육지면 시배지, 경남 산청에는 문익점의 목화 시배지, 전남 구례 화엄사 장죽전의 차나무 시배지, 산수유 시배지, 부산 영도 고구마 시배지 등이 있다.

시배지 지정에는 잡음이 있다.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하동 차나무와 목화시배지인데, 여기에는 해당 지자체들의 홍보 경쟁에서 비롯한 왜곡된 역사 논쟁이 가끔 번지기도 한다. 

가령,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오기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는 이미 목화를 재배한 흔적이 있고, 문익점은 목화재배 기틀을 마련했을 뿐이라는 것과 차나무를 당나라에서 대렴이 가져와 지리산 인근에 심었는데 그곳이 하동이냐, 구례냐 하는 등의 논쟁. 

이런 점을 들어 시배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과 조사를 바탕으로 학계에서 끊임없는 연구와 논문 발표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구황작물 고구마는 어디에서 왔을까?

조선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섬 주민들이 고구마를 먹는 것을 보고 가져왔다는 해사일기(1763, 영조 39년)의 기록, 현재로서는 그것을 고구마 유래의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663년(현종 4년)에 남해사람 김여휘가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오키나와에 상륙해 그곳에서 고구마를 먹었는데, 마와 같은 단맛이 난다고 했다. "이 작물을 재배하면 백성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겠다"고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 있다. 조엄이 살았던 100년 전의 고구마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다. 1719년(숙종 45년) 신유한이 기록한 해유록에도 일본 동경에서는 고구마를 구워서 판다고 하였다. 이처럼 고구마 유래의 기록 또한 여러 갈래다.

1492년 8월 3일 신대륙 발견을 위해 파로스를 출항한 콜럼버스가 스페인 정복자들과 함께 중앙아메리카에서 고구마와 토마토, 감자 등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왔고, 그로부터 100년 뒤에 중국에서 대량 재배했다. 

따뜻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고구마는 황무지와 같은 거친 땅에서도 기온이 맞으면 번식했다. 구황작물로 적합한 고구마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쟁물자처럼 비밀리에 붙이는 등 관리가 만만치 않았다. 

이웃 나라에서 재배된다면 군량이 될 작물이었기 때문. 대부분 문물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에 반해, 고구마와 토마토는 조선통신사에 의해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왔다. 

통신사는 고려 때나 조선 초기엔 주로 중국으로, 임진왜란 때 잠시 중단됐다가 전쟁 이후, 에도막부는 조선과의 국제 재개를 끊임없이 요청했고,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전쟁 중에 끌려간 포로를 쇄환하려고 1607년(선조 40년) 다시 강화를 맺는다.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는 기간에 12회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 250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보통 4백~5백 명으로 구성된 통신사 행렬에 1400여 척 배가 동원됐고, 일본에서의 생활이 1년 정도 소요됐다고 한다. 이때 조선과 일본은 가장 활발하게 교역이 이뤄졌다고.

조선의 선비들은 고구마 확산에 전념했다

1600년대 중엽부터 일본에 표착한 어민이나 조선통신사를 통해 고구마의 존재가 조선에 알려지기는 했으나, 이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후반부터인 것 같다. 

운석유고에서도 1763년 조엄이 통신사로 일본에 가던 중 대마도에 들러 그 종자를 가져와 절영도(지금의 부산 영도)와 동래 그리고 남해안 도서 지역과 제주도에서 시험 삼아 심게 했다. 그래서 부산 영도에는 조엄을 기념한 조내기 고구마 기념비가 있다. 

1764년 동래부사로 재직한 충남 당진사람 강필리가 통신사에게 고구마를 건네받고 고구마 재배법과 가공법을 저술한 감저보를 편찬해 널리 알렸다. 이때 고구마 막걸리가 처음 만들어지기도. 

고구마 재배 노력은 이보다 먼저 서울에 살던 이광려(李匡呂)라는 사람이 시도했다. 그는 명나라 문헌인 농정전서를 통해 고구마의 존재를 알았고, 구민(救民)의 작물이라 믿게 되어 조선에 보급하고자 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이나 역관에게 여러 차례 고구마를 가져오라고 부탁했으나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강필리는 이광려에게 자극받아 동래에서 재배시험을 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그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마 전문서이다. 그 밖에도 1755년 김장순이 고구마 보급을 위해 감저신보를, 1834년 조선의 실학자 풍석 서유구가 그의 저서 임원경제지에 종저보를 집필해 고구마 보급에 힘썼다. 

비슷한 시기에 유중림, 박제가, 서호수, 선종한, 서경창 등 조선의 학자들이 고구마 전국 재배를 주장했고, 이에 관한 저서도 남겼다. 유중림은 문헌적 연구를, 박제가는 전국 재배 권장을 주도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고구마 재배를 장려했다. 김장순은 남쪽 해안지방에서 고구마를 먹어보고 구황작물로 적합함을 깨닫게 돼 전국적으로 보급할 방도를 찾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의 학자들이 백성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작물 연구에 매진했던 것은 국가적으로 심한 기근과 그리고 혹독한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고구마는 대량 재배하지 못했다. 알맞은 기온과 습도, 종자 개량이 필수였던 고구마 재배에 경험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고구마는 이제 전국에 재배 범위를 확대, 아직도 종자 개량에 끊임없는 연구가 이뤄지면서 전 국민의 영양간식으로 당당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구마는 이제 전국에 재배 범위를 확대, 아직도 종자 개량에 끊임없는 연구가 이뤄지면서 전 국민의 영양간식으로 당당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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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작물 재배 특화, 고금도에 이도재가 있었다

전남 완도 고금도에는 이도재라는 인물이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에 연좌돼 고금도에 유배 온 이도재는 9년 동안 섬에서 살았다. 그는 지역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푼 인물로 잘 알려졌다. 유배지에서 그는 섬사람들을 교화하는 교육사업에 힘썼고 해남, 강진, 장흥, 영암으로 흩어진 각 지역의 섬들을 한곳에 모아 세금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려고 완도를 설군하는 등 그가 이룬 업적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성이 굶주림을 면하게 한 것이 그의 업적 중 특이사항이다. 

고금도에서 그는 구민정책으로 밭작물 재배와 김과 조개 등 해조류 양식을 전파하는 일에도 힘썼다. 그 덕분일까? 기록에 의하면 조정에서 고구마를 구황작물로 팔도에 퍼트리고자 했는데 지역마다 재배에 거의 실패하고, 강진현과 보성군에서만 고구마의 성공적인 재배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도재는 고금도에서 보리, 쌀, 콩 같은 곡물뿐만 아니라 고구마의 재배 확산에도 대단한 열정을 쏟았다. 고금도가 강진현에 속했을 때 이야기다. 

그가 학문연구와 교육사업 외에도 수산물 양식과 식량 확보에 힘쓴 것은 섬사람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고픈 깊은 애민정신에서 비롯한 의무감 때문이었다. 고금도의 고구마 재배 유래설은 바로 이도재 공의 구민정책의 중점사업에서 찾아보면 이해될 것 같다. 

조선의 장수 이순신도, 조선통신사 조엄도, 유배자 신분이었던 이도재 공 역시 누구보다 백성을 위한 마음이 컸기에 큰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역사의 희비가 엇갈리고 문헌에 전하는 시배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더라도, 한때나마 고금도에서 대량 재배에 성공을 거둔 고구마는 이제 전국으로 재배 범위를 확대했다. 아직도 종자 개량에 끊임없는 연구가 이뤄지면서 전 국민의 영양간식으로 당당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지승/다큐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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