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03 07:05최종 업데이트 21.09.14 09:54
  • 본문듣기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편집자말]

   

 
11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 해가 광 바닥에 몇 개의 선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 나는 까무러치듯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떴을 땐 다시 어둠이었다. 하루가 지난 것인지 이틀이 지난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관절 마디마디를 칼끝으로 후벼 파듯이 온몸이 아팠다. 너무나 예리하면서도 무딘, 아주 이상한 통증이었다. 뼈를 깎아내듯 예리하면서도 관절을 살과 분리해서 뽑아내버리고 싶도록 둔탁한, 미칠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일어나 보라."
다급하게 내 뺨을 때리는 옥희의 손길에 겨우 눈을 떴다. 그러나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옥희의 얼굴이 어느새 갑산댁의 얼굴로 바뀌었다.

"며칠 지났어요?"
"사흘 지났지. 어휴, 애가 기진했네. 아주 기진을 했어."
그러나 기진을 한 것은 갑산댁도 다르지 않아보였다.

"너희들, 둘 다 어쩌자고 이러니..."
갑산댁의 목소리는 쉰데다 착 가라앉았고,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손에도 아무 힘이 없었다.

"이렇게 스스로 매를 버는 네놈만 독한 줄 알았더니, 그보다 더한 계집애가 있을 줄이야. 겁도 없이, 어디로 가 어떻게 됐는지..."
갑산댁의 말에 퍼뜩 정신이 났다.

"옥희가 어떻게 됐다고요?"
"없어졌어."

이틀을 갈 만한 데는 다 찾아봤다고 했다. 박서방과 갑산댁이 옥희를 찾아 뛰어다닌 이틀 동안 나는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아비가 도라지라고 먹인 산삼 덕이었을까. 얼어 죽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12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장진사의 사랑채 마당으로 끌려 나갔다. 잠시 후 팔뜩이와 약초꾼들이 꿰짝을 지게에 지고 들어섰다.

"열어보아라."
장진사는 나를 차갑게 노려보고는 팔뜩이에게 명했다. 팔뜩이가 뚜껑을 연 궤짝에는 가는 삼이 들어 있었다.

"열아홉 수입니다."
팔뜩이의 목소리에 자랑이 묻어났다. 그래봐야 엄지만한 굵기의 삼 하나도 없었다. 새끼손가락보다 가는 삼까지 보였다. 아주 씨를 말리고 온 모양이었다.

"바로 찾았느냐?"
"예. 산돌이를 앞세워 단걸음에 찾았습니다."
장진사는 나를 노려보았다.

"이놈, 이래도 할 말이 있느냐?"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년이면 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수고들이 많았소."
장진사는 사람 좋은 얼굴로 약초꾼들에게 엽전을 후하게 나눠준 다음 박서방을 불렀다.

"이 사람들, 한 상 잘 차려 먹여서 보내게."
눈이 쑥 들어가고 어깨가 축 처진 박서방이 약초꾼들을 데리고 나갔다. 팔뜩이는 자기에게도 엽전 몇 닙 던져주길 기대하는 눈빛으로 장진사를 바라보았다. 팔뜩이와 눈이 마주친 장진사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개는?"
"밖에 묶어뒀습니다."
"데려다가 기름기가 도는 걸 먹여라."
실망한 팔뜩이 내 눈치를 살피며 비실비실 걸어 나갔다. 장진사는 무릎을 꿇린 내 주변을 빙빙 돌며 경멸스럽다는 눈길로 내려다봤다.

"그동안 훔친 삼으로 바꾼 돈은 어쨌느냐?"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려 장진사를 외면했다. 고개를 돌리던 내 눈과 산돌이의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꼬리를 흔들어 보이면서 자못 거만한 걸음새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사슴까지는 아니어도 노루 한 마리 정도는 사냥을 한 걸음걸이였다. 팔뜩이와 약초꾼들이 나눠먹은 것이 분명했다.

"대답을 않겠다?"
장진사는 나를 얼렀고, 산돌이는 내 가슴에 머리를 디밀며 비벼댔다. 나를 배신하고도 칭찬을 기대하는 녀석이 얄미워 거칠게 밀쳐냈다. 당황한 녀석은 내 눈치를 살피며 중머슴이 내온 개밥그릇에 입을 박았다. 강냉이 죽이었지만 돼지비계라도 넣었는지 기름기가 떠돌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네놈이 그동안 한 짓을 다 알고 있는데도 잡아 떼!"
장진사의 발길에 나는 허수아비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그것 가지고 와!"
중머슴이 가지고 온 것은 내가 토끼가죽에 싸서 묻어두었던 엽전이었다. 눈앞이 흐릿해져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건 내가 지난 삼 년 동안 총을 사려고 모은 돈주머니가 분명했다.

"이런 도둑놈!"
쓰러진 나에게 다시 발길질을 하는 장진사를 가로막고 나선 것은 산돌이었다. 죽을 먹느라 정신이 팔렸던 녀석이 내 신음소리에 번개같이 달려왔다. 나를 지키고 선 채 으르렁거리던 산돌이는 내게 발길질하려 드는 장진사의 바지를 물었다.

"이런 개새끼가. 주인도 몰라보고 지랄이야!"
당황한 장진사가 들고 있던 장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네놈이 왜 산돌이 주인이야, 입속으로 삼킨 내 말을 들었을까. 산돌이가 물었던 바짓단을 놓고 뛰어오르며 장진사의 어깨를 문 건 순식간이었다. 장진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머슴들도 산돌이의 기세에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며 나만 쳐다봤다.

"산돌이 좀 붙들어!"
박서방이 나를 재촉했다. 장진사를 문 채 나를 바라보는 산돌이에게 나는 팔을 뻗어 손짓을 했다.

괜한 짓이었다. 내 품으로 돌아온 산돌이에게 팔뜩이가 목줄을 채워 묶었다. 의원이 오기를 기다리며 방에 누웠던 장진사가 잠시 후 달려 나와 산돌이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한 쪽 발을 딛지 못하고 낑낑거리는 녀석의 머리를 향해 장진사가 몽둥이를 내리치는 순간 나는 몸을 날려 산돌이를 감싸 안고 쓰러졌다. 깨진 내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르르 내 눈두덩을 타고 내렸고, 나는 까무러쳤다.

그날 밤 나는 깨진 머리를 삼베로 동여맨 채 한 발을 쓰지 못하는 산돌이를 데리고 장진사의 광에서 도망쳤다. 내가 집에서 챙긴 것은 아비가 직접 붓으로 옮겨 적어 나와 옥희를 가르친 명심보감 한 권, 아비가 불었던 낡은 퉁소 하나, 어미가 남긴 동 가락지 하나가 전부였다. 동쪽 하늘에 뜬 그믐달을 등지고 서문을 나선 우리는 절뚝이며 걷고 또 걸었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내 열네 살의 등을 떠밀었다.

 
13

포수막 앞에 신포수가 나와 있었다.

"철도 없이 왜 왔냐?"
신포수는 나와 산돌이의 몰골을 훑어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신포수는 총을 철이라고 불렀다. 나는 대답을 않고 되물었다.

"우리가 오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사정거리 안에 뭐가 들어오는지도 모르면 포수가 아니지."
신포수는 오른 쪽 앞다리를 짚지 못하는 산돌이를 유심히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 발로 걷는 짐승이 어떤 놈인가 했더니, 네 놈이었구나."
"갈 곳이 없어요."
"몰이꾼은 절대 하지 않겠다며?"

아비가 죽은 다음해 겨울 나는 포수막 앞,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도 왜 찾아왔느냐고 묻는 신포수에게 내가 되물었다.

"아저씨, 총 좀 쏴요?"
신포수는 피식 웃기만 했다.

"범도 잡았다면서요. 진짜예요?"
"아직까지 범의 밥이 되진 않았지."
"나도 좀 쏴요."
나는 포구나무 씨를 총알로 쓰는 포구총을 꺼내 보이며 덧붙였다.
"우리 동네에서 내가 제일 잘 쏴요."
"이 산에는 나 혼자여서 누가 철질을 더 잘하는지 모르겠네."

신포수는 자신의 포수막을 돌아보고 나서 천천히 낭림산맥 준령을 둘러보았다. 중천에 뜬 해는 산의 자락자락을 파고들었고, 안개는 능선에 진을 치고 계곡을 지켜내며 대치하고 있었다. 신포수의 시선은 사정거리 너머, 안개 피어오르는 능선과 능선 사이를 향했다. 나는 그와, 그가 굽어보는 산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신포수의 길고 짙은 눈썹, 깊이 파인 눈우물, 거친 콧수염이 낭림산맥의 풍광과 어딘지 닮아보였다.

그 겨울, 나는 신포수의 포수막에서 나흘을 보냈다. 실탄을 쏘아보고 싶어 하는 나에게 그는 조건을 달았다.

"세 마리를 잡을 수 있게 몰이에 성공하면. 한 마리에 한 발씩, 세 발."
나는 산돌이와 함께 몰이에 나섰다. 신포수의 사냥개 낭림이도 내게 붙여 주었다.

첫날은 허탕을 쳤고, 둘째 날은 노루와 멧돼지를 차례로 잡았다. 셋째 날은 사슴 네 마리를 발견했다.

큰 사슴 두 마리와 새끼 사슴 두 마리였다. 나와 산돌이, 낭림이는 신포수가 일러준 방법대로 사슴을 계곡으로 몰고 내려갔다. 나는 토끼길을 따라 몰고 내려갔고, 산돌이와 낭림이는 내 좌우에서 길이 없는 능선을 옆으로 오가며 사슴이 몰이 망을 빠져나가 산 위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짧은 짐승은 아래에서 위로 산을 올라갈 때는 잘 뛰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신포수는 능선과 능선 사이의 계곡에 목을 잡고 있었다. 짐승들은 신기하게도 신포수가 예견한 위치에서 계곡을 건너갔다. 사슴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신이 났다. 네 마리를 한꺼번에 잡으면 단숨에 목표한 세 마리의 두 배인 여섯 마리가 되었다. 사슴이 계곡에 내려서는 것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신포수의 저격은 정확했다. 노루는 단 한 방에 쓰러뜨렸고, 멧돼지에게는 두 발을 먹였다. 곧 총소리가 들릴 차례였다. 네 발의 총성과 함께 사슴들은 계곡을 건너기 전에 차례로 쓰러질 것이었다.

그런데 네 마리의 사슴 가족이 계곡을 가로질러 건너편 능선으로 들어갈 때까지 총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총이 고장났을까.

"왜 쏘지 않았어요?"
사슴 가족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다음에야 계곡으로 달려 내려간 내가 물었다.

"동지가 지나면 사슴은 잡지 않아."
신포수는 한가한 얼굴이었다.

"왜요?"
"시월이 지난 녹각은 굳어서 못 써. 사슴은 고기가 오 푼이고 녹각이 구 할 오 푼이야."

봄철에 가지가 돋아는 사슴의 뿔은 구월을 정점으로 향과 약효가 떨어져 동지가 지나면 쇠뿔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게 신포수의 얘기였다.

"고기라도 먹으면 되잖아요."
"오 푼을 얻자고 멀쩡한 놈들을 잡아?"
"어쨌거나 지금 몰고 온 것까지 하면 모두 여섯 마리니까, 총 쏘게 해주세요. 여섯 발."
"두 발. 두 마리 잡았으니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섯 발."
신포수는 나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발."
표적은 15보 떨어진 바위에 그려진 원이었다.

"어깨와 팔에 힘을 빼고, 손가락은 부드럽게."

신포수는 딱 한 번 장전과 격발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장탄한 총을 내게 쥐어주었다.
첫발을 발사했다. 방아쇠를 제대로 당겼는데 격발과 함께 개머리판이 오른쪽 어깨를 치면서 총구가 흔들렸다. 탄환은 원을 벗어났다. 표적에서 한 뼘이나 벗어난 오른쪽 상단에서 불꽃과 함께 돌조각이 튀었다. 탄환이 치고 나가면서 총이 뒤로 밀리는 반동이 그렇게 센 것인지 몰랐다.

"일발일격."
신포수는 흔들렸던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한 발로 하나를 쓰러뜨려야 한다.

두 번째 탄환은 원 안에 들어갔지만 왼쪽 아래로 치우쳤다.

"일격필살."
신포수가 이번에는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내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한 방으로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

세 번째 탄환은 표적의 중앙에 정확히 들어갔다.

"좀 쏘는구나."
그러나 그게 다였다. 다시는 총을 내주지 않았다.

"저도 포수가 되겠어요."
"철이 있어야지."
나는 신포수의 손에 들려 있는 총을 가리켰다. 신포수는 고개를 저었다.

"포수는 절대 철을 나눠 쓰지 않아. 몰이꾼을 하려면 남아라."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저었다.

"몰이꾼은 하지 않아요. 포수가 될 거라구요."
"그럼 철을 가지고 와."
"얼마예요?"
나는 신포수의 총을 쳐다보며 물었다.

"벼 열 섬."
아비는 평생토록 벼 한 섬도 모으지 못했다.

"알았어요."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나에게는 아비가 알려주고 간 산삼밭이 있었다. 나는 4년 동안 산삼을 김의원에게 가져다주고 총 값을 모았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