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3 15:51최종 업데이트 21.12.0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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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편집자말]

   

 
6

나는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사장 유임생의 집무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동생이 색시감을 구해둬서 혼례를 치르러 가겠다고, 밀린 노임을 요구했다.


"서방들러 간다. 로임을 달라? 드려야지."
유임생은 뜸을 들이며 머리를 굴렸다.

"헌데 활판인쇄소에는 시방 돈이 없으시니 어쩐다..."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유임생의 눈을 나는 똑바로 쳐다보았다. 동학, 서학은 물론이고 개화당의 서책까지 밀려들어 인쇄공과 제본공들이 밤샘 작업을 할 지경이었다.

목판인쇄로 서책을 만들려면 쪽수만큼의 목판이 필요했다. 서책 하나를 만들기 위해 목판 하나에 그 많은 글자를 일일이 각인해야 했다. 글자를 각인해나가다 한 글자만 틀려도 목판을 통째 버리고 첫 글자부터 다시 새겨야 하는 것이 목판인쇄였다. 하지만 활판인쇄는 아니었다. 낱개로 된 활자를 자유자재로 갈아 끼워가며 서책을 찍는 활판인쇄는 제작 시간을 다섯 배 이상 줄여주었다.

각공들이 공들여 새긴 목판은 그 서책 하나를 찍고 나면 불쏘시개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활판인쇄에 쓴 낱개로 된 활자는 하나의 서책을 찍은 다음 해체해서 또 다른 서책을 조판하는 데 얼마든지 다시 쓸 수가 있었다. 마모된 활자만 골라내고 다시 각인하거나 주조해서 보충하면 되는 활판인쇄는 목판인쇄보다 단가도 절반 이하였다.

반값에 다섯 배 빠른 속도로 책을 만드니 주문이 밀려들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는 유교 서책을 찍고 오후에는 불교 서책과 족보를 찍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동학을 떠받드는 서책을 찍고 밤이 깊으면 서학을 전도하는 서책을 만들었으며, 새벽녘에는 개화당의 견문록을 제본했다. 더구나 남의 눈을 피해 날이 어두운 다음에 찍는 불온 서책들은 낮에 찍는 유교, 불교 서책이나 족보를 찍는 것보다 이문이 두 배나 되었다. 인쇄공들은 일하느라 밤을 새우고 유씨 형제는 돈을 세느라 밤을 샌다고 고공들이 투덜거렸다. 그런데도 사장은 고공들의 월급을 짧게는 여섯 달, 길게는 일 년 넘게 깔아두고 주지 않았다. 내 월급도 열 달이나 밀려 있었다.

"돈이 있긴 있는데, 이건 동학의 돈이어서 말이야... 동학의 학인이면 여기서 빌려주면 되는데 백공은 동학에 들지 않아서 말이야."

심중에 담긴 백가라는 말을 입안에서 백공으로 주물러내는 놈의 가증스런 면상을 향해 주먹이 나가려는 것을 참았다. 나는 쫓기는 몸이었다. 어쩌다 바깥 사람이 인쇄공장을 방문하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가상투를 풀고 행장을 바꾸었지만 보통사람보다 머리 둘은 더 껑충한 키를 숨길 재주는 없었다. 방문객이 나갈 때까지 나는 조판대에 코를 박고 앉아만 있어야 했다.

눈치 빠른 유임생이 내게 뭔가 숨기는 과거가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름을 말하지 않는 괴수도깝 영감부터 이력을 가늠하기 어려운 고공들이 활판인쇄소에는 나 말고도 아주 여럿이었다. 사장 유임생은 고공들을 동학의 공범으로 얽어매 총령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고, 불온한 서책을 만드는 활판인쇄소를 운영하는데 세상에 떳떳이 나서지 못할 약점을 지닌 고공들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래, 백공도 동학에 들겠는가? 그럼 총대로서 내 당장 로임을 지급하겠네."
유임생은 교활한 눈빛을 감추며 백공을 한 번 더 입에 담았다. 다시는 저 주둥아리를 놀리지 못하게 아가리를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나는 대답했다.

"돌아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백무아를 유린한 놈들을 족치자면 여비가 필요했다. 내가 이렇게 물러섰는데도 유임생이 끝내 노임을 주지 않으면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놈이 금희네에게 한 짓이 새삼 떠올랐다. 금희네가 한사코 말려서 지금까지 참고 입을 다물었다.

"돌아와서 결정을 하시겠다?"
나는 놈의 손끝부터 살폈다. 무방비였다. 놈의 숨통을 끊어 놓는 데는 한 방으로 충분했다. 급소를 훑는 내 눈길을 놈은 자신의 처분을 간구하는 것으로 여겼는지 역겨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그럼 학인으로 들어오시는 것으로 여기고 석 달 치 로임을 미리 드리겠네."
유임생은 밀린 십 개월 노임에서 중에서 겨우 세 달 노임을 이제야 주면서 '미리' 준다고 생색을 냈다. 유임생스러운 기막힌 셈법이었다. 가증스러웠지만 참기로 했다. 나는 밤을 달려 백무아에게 가야 했다. 놈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생각하신 거네. 내 백공이 그럴 줄 진작에 알았네."
놈은 여태 동학에 들지 않겠다고 버텨온 내가 마침내 고개를 숙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못 의기양양했다.

"오심즉여심, 내 마음이 네 마음이 아니시던가."
吾心卽汝心, 동학의 교조 최제우의 언행록에 나오는 말을 유임생이 되지도 않게 가져다 붙였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라는 유임생의 말이 내게는 '내 돈이 자기 돈'이라는 소리로 들렸다. 유임생은 탐관오리들과 짜고 나라의 조지소를 제 것으로 꿀꺽하고, 스스로 총대를 참칭하며 탐관오리의 권력을 탐내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아주 제가 하늘이 되겠다는 수작이었다.

최제우의 오심즉여심은 괴수도깝 영감이 너 여(汝) 자와 온순할 여(洳) 자의 차이를 일러주며 가르쳐준 구절이었다.

'여기서 나 오는 하늘이고, 너 여는 인간이야. 하늘의 마음이 곧 인간의 마음이다, 인내천이다, 이 뜻이다.'

그러면서 괴수도깝은 내게 후렴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 무식한 놈아.'
이 무식한 놈아, 나는 하마터면 괴수도깝의 말을 유임생에게 그대로 옮길 뻔했다. 내 것과 네 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무식한 놈아, 목구멍까지 넘어온 그 말을 억지로 삼켰다. 세 달 치 노임을 받아들고 집무소를 빠져나오는 내 뒤통수에 대고 유임생이 말했다.

"닷새의 말미를 줄 테니 잘 다녀오시게."
평양까지 오가는 데만 나흘이었다. 나는 못 들은 것처럼 앞을 보고 걸었다. 닷새 뒤에 어떻게 되던 그건 상관없었다. 언제 한 번 내게 내일이 있었던가.

물위 이유내일(勿謂 而有來日). 옥희와 함께 아비에게 배운 명심보감에서 고쳐 외었던 그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7

4년만에 돌아온 평양, 나는 야소교당으로 직행했다.

백무아가 무너지지 않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말을 빌려 타고 평양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백무아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제는 번듯하게 간판까지 내건 야소교당 앞에서 나는 4년 전처럼 서성거렸다.

몇 번을 야소교당 앞을 오갔을까. 나는 무턱대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청년 하나가 교당에서 나왔다.

"백무아... 있습니까?"
"누구세요?"
청년은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
홍범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백무철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주저하며 머뭇거렸다. 무슨 관계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지...

하지만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내 얼굴을 뚫어지게 살피던 청년이 물었다.

"혹시 홍..."
어딘가 낯이 익은 청년이 누구인지 나는 그제야 알아보았다.

"옥남이?"
옥희 동생 옥남이었다. 11년 만의 만남이었다. 옥남은 주변을 살피며 나를 교당 안으로 안내했다.

"무아씨는 어디에 있어?"
"없습니다."
"없다니?"
"이틀 전에 떠났습니다."
떠났다는 말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디로? 나는 끔찍한 대답을 듣게 될까 두려워 물어볼 수 없었다.

"미국으로 갔습니다."
눈앞이 아득했다. 하지만 곧 한숨을 몰아쉬었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를 듣지 않은 것만으로 됐다. 그녀의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을 해치는 일이었다. 어디로 갔던 살아있으면 됐다. 그런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더는 묻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마셔보세요."
옥남이 내온 건 시커먼 탕약 한 그릇이었다. 쓰고 신 맛이 날카롭게 혀를 자극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가비에요."
"양탕국이구나."
한양 친군영에 있을 때 들어보긴 했지만 마셔본 적은 없었다. 고종 임금이 좋아한다고 고관대작들이 따라 마셨다. 귀하고 비싸 서양탕국을 마시는 것 자체가 부와 위세의 상징이었다.

"이런 걸 내가 마셔도 되나?"
"미국에서 온 거예요."
미국, 백무아가 간다는 그 나라에서 온 것이었다. 그녀가 살게 될 땅이 이 탕국처럼 쓰디쓴 곳은 아닐까. 나는 내 생각이 씨앗이 될까 두려웠다. 나는 불길한 생각을 마셔버리듯 양탕국을 벌컥벌컥 마셨다.

"갈게."
백무아가 없는 여기에 내가 앉아 있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어서는 나를 바라보는 옥남의 눈빛은 섭섭함을 숨기지 못했다. 내게 젖을 나누어준 갑산댁의 안부조차 묻지 않는 내가 야속했을 것이다. 나와 젖을 나누어 먹고 자란, 내가 장진사에게 매질을 당할 때 부엌 문 뒤에 숨어서 가장 많이 운 누나의 소식을 묻지 않는 내가 미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나는 아직도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냈던 아비와, 장진사의 몽둥이에 다리가 부러진 산돌이와 달아나던 열세 살 겨울의 기억을 다시 불러낼 자신이 없는 것을.

"혹시 백무철을 알아요?"
문을 나서는 내게 옥남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돌아보며 되묻는 나를 옥남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혹시... 그게 형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학비를 댄 것도 형이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제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저와 우리 식구들은 형의 소식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그건 네 오마니한테 물어봐야지. 아주마니가 내게 젖을 먹여주지 않았으면 난 지금 이 세상에 없겠지... 그런데 네 오마니가 날 살렸다고 말하는 걸 난 아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녀석의 눈이 젖었는지, 내 눈이 젖었는지, 눈앞이 흐려져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잠깐, 기다려 보세요."
옥남이 가지고 온 것은 봉인된 편지와 보자기였다.
 
이제 내게 상처만 안겨준 조선을 떠납니다.
내가 닿게 될 곳이 지옥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여자에게, 양반이 아닌 여자에게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있다면, 그 지옥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내가 만난 짐승들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잘 때도 육혈포를 품에 지니고 있으라는 당신의 말을 지키지 않은 것은 내 잘못입니다. 자다 끌려가, 옥에 갇혔기 때문에 단도 하나로는 조선 짐승과 더러운 왜놈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정절 따위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놈들에게서 풀려났을 때 사람들이 하나같이 궁금해하고 걱정한 것은 짓밟힌 내 자존심이 아니라 정절이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눈이 파란 전도사 월리엄만이 무너진 내 자존심을 위해 울어주었습니다. 나는 그를 믿고, 그를 따라 망망대해를 건너가기로 했습니다.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조선에서 믿었던 유일한 남자는 당신이었습니다.
나는 떠나지만, 그래도 부탁합니다. 당신만은 조선의 여자 누구에게도 조선의 남자가 되지 마십시오. 당신과 나는 조선의 양반으로 태어나지 않은, 하느님의 은총을 누렸습니다. 그랬기에 나와 내 오빠, 당신은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괴물이 되지 않고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신도 조선의 남자로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남자 고공들이 쉬는 시간에 총령의 여자 고공들이 물을 가져다 바치고, 설거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애 셋 가진 금희네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더러운 눈길과 조지소의 최고 기술자 장진댁이 받는 부당한 대우는 절대 당연하지 않습니다. 조선에서 양반보다 더 더러운 계급이 남자입니다. 남자들은 양반이나 아니나 다 그 더러운 계급의 혜택을 누립니다.

강자의 종이 아닌 약자의 벗으로 사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심장이 멈추는 순간까지 당신은 내 심장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부디, 당신이 양반과 침략자, 남자의 편에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빠가 당신을 내게 남겨주고 가서 행복하고 고마웠습니다.
-BFR, BFJ 백무아

* 이제 떠나야 할 시각입니다. 조선에서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당신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에 육혈포는 당신에게 남기고 떠납니다.

 
 
보자기 안에는 육혈포가 명주에 싸여 있었다. 내가 준 바로 그 육혈포 그대로였다. 총열은 내가 줄 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윤기가 났고, 손잡이에도 먼지 한 점 없었다. 그녀의 손길이 깃든 명주천을 주머니에 접어 넣고 육혈포를 집어 들던 내 눈길이 육혈포의 손잡이에 박혔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글자가 손잡이 왼쪽에 새겨져 있었다.

BFR.
나는 육혈포를 뒤집어 손잡이 오른쪽을 확인했다.
BFJ.
편지의 마지막에 쓰여 있던 서양글자였다.

"너 공부 제대로 했는지 시험 한 번 보자."
나는 손잡이가 보이게 육혈포를 옥남이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삐에푸아르, 무슨 약자 같은데요. 삐는 보이, 브라더. 소년, 형제 그런거고. 에푸는 포, 포에버, 위한, 영원한 그런 건데요. 아르는 로즈, 레드. 장미, 붉은 그런 뜻이고요. 영원한 장미 소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육혈포를 뒤집어 반대편을 보여주었다.
"삐에푸제. 삐에푸는 같고, 제는 지저스, 조이. 예수님, 기쁨인데. 영원한 예수 형제...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옥남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 공부 더 해야겠다."
나는 녀석에게 웃어보이며 육혈포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우리 어머니, 옥희누나 소식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옥희누나는 좋은 사람 만나서 연해주에 살아요. 아버지는 장진사에게 매질을 당하고 삼 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작년에 연해주의 옥희누나에게 갔어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확인해두여야 할 것은 알았다.

"장진사는 살아 있냐?"
"네, 아주 잘요."
"계산할 게 늘었구나."
"..."
"언젠가, 반드시, 나와 네 아비의 목숨값은 내가 계산하러 갈 거야. 넌 공부해서 잘 살아."
나는 여비만 남기고 가진 돈을 전부 옥남이에게 주었다.

"저, 이제 제 학비는 제가 벌 수 있어요."
녀석은 손을 내저으며 내가 내민 돈을 사양했다. 나는 허리춤의 육혈포를 다시 꺼내 들었다. 당황하는 녀석에게 나는 총열을 쥐고 서양글자 세 개씩이 양쪽으로 새겨진 손잡이를 내보였다.

"공부해서, 이거 무슨 뜻인지 내게 꼭 알려줘."
총열을 쥐고 있던 육혈포를 공중에 던져 손잡이를 잡은 나는 두 손을 함께 내밀었다.

"어느 쪽을 받을 거야? 이거야, 이거야?"
오른쪽 손에 들린 육혈포의 총구는 녀석을 향해 있었고, 왼쪽 손바닥에는 돈이 들려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는 녀석의 오른쪽 저고리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고 돌아섰다.

"난 돈 필요 없는 사람이야."
야소교당을 등지고 걸음을 옮기는 내 뒤통수에 대고 옥남이 물었다.

"형, 진남포로 가려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돌려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럼, 이것도 가져가세요."
옥남이 품에서 꺼낸 초상화 한 장을 내밀었다. 실물처럼 연필로 그려놓은 왜놈의 얼굴이었다.

"뭐냐?"
"누나가 그린 스겟찌에요."
"누구 누나?"
"무아 누나가 그림 그리는 거 몰랐어요? 엄청 잘 그리는데."
옥남은 그림을 가르친 선교사가 자기보다 백무아가 훨씬 더 뛰어나다고 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그러나 이미 내 귀에는 다른 얘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놈이 그 왜놈이냐?"
"네."
나는 그녀가 그린 스겟찌란 걸 받아들었다.

"어떻게 하려고요?"
옥남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무아를 지켜주지 못한 하느님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미는 분이라니 그놈들을 용서하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나는 절대 그놈들을 용서하지 못한다.

나는 백무아와 걸었던 길을 따라 다시 평양을 떠났다. 겨울 보통강의 바람이 매섭게 뺨을 핥았다. 하지만 속절없이 그녀를 떠나보낸 내 텅 빈 가슴에 불어대는 바람보다 차고 쓰라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믿고, 따라간 월리암이란 남자는 대체 어떤 자일까.

내가 아닌 그를 따라간 그녀가 야속했다. 그에게 다른 대륙의 나라가 있다면 나에게도 그녀 하나는 지켜낼 수 있는 태백준령이 있었다. 나는 이제 누구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나. 남겨진 내가 할 일은 그녀를 떠나게 만든 자들과 계산을 끝내는 것이었다. 보통강의 바람이 내 등을 떠밀었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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