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7 12:54최종 업데이트 21.12.1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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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해왔습니다. 4개월 동안 총 37화의 연재를 통해 홍범도 장군의 어린시절부터 성장기까지 다루었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2022년 상반기 소설책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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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댁을 찾아간 것은 무지공장의 작업이 끝난 다음이었다.
고공들이 퇴근하고 장진댁이 혼자 장부를 정리할 시각이었다. 무지 공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이러고도 어떻게 살아요..."
울먹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금희네였다.

"목숨이 모진 거임메."
타이르는 것은 장진댁이었다.

"하루도 살고 싶지가 않아요."
"갈라들은? 금희 은희 말희, 그 어린 것들은 어드렇게 되지비?"
아이들 이름이 나오자 금희네는 울음을 터뜨렸다. 복받치는 울음소리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나서 들린 건 장진대의 목소리였다.

"살면, 또 다 살아지는 거임메. 얼굴에 주름 가고, 젖통 늘어지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지비."
"자고 나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좋겠지비? 그러면 끝나는 거이 우리네 인생 아이겠슴."
장진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쿠라, 박복한 년. 얼굴은 왜 반반해가지고... 네 몸이 더럽혀졌다고 해서리 네 영혼이 더럽혀진 거이 아임메. 아버지 하나님은 이 모든 거이르 굽어보고 알고 계시지비. 언젠가 심판의 날에 반드시 죄인으 벌하고 선한 영혼으 구원하실 거임메..."

금희네는 다시 훌쩍거렸다.

"갈라들이 기다리지 않간... 기도하고 일어나라이."
장진댁이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레위기 19장 13절에서, 네 이웃으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그날 삯으 다음 날 아침이 되도록 네게 두지 말라 하셨습메다. 그리고 저희가 저희의 땅에서 곡식으 거둘 때,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고 가난한 자르 위해 남기라 하셨습메다... 다른 사람의 피르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으 지으셨음이라 하셨습메다... 우리들 어린 양이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으 믿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으 따라 오늘 하루르 살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천국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언제나 인도하시옵소서. 아멘."

"아멘."

금희네가 복창하는 '아멘'은 울음이었다. 장진댁의 기도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금희네의 눈물에 잠긴 '아멘'은 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이거 가져다가 달여먹으라. 보름이면 나을 거임메."
금희네도 어딘가 아픈 모양이었다. 금희네가 일어서는 소리에 나는 얼른 공장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약초가 담겼을 보자기를 들고 공장에서 멀어지는 금희네의 발걸음은 나만큼이나 살고 싶지가 않아 보였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공장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무지공장에는 장진댁만 남아 있었다.

"금희네, 어디 아파요?"
걱정스러워 던진 물음에 장진댁은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이봅세. 아프긴 뉘기 아프다고 그럼메."
"오다가 지나가는 거 봤는데, 하도 힘이 없어 보이길래..."
"종일 일으 했는데 기럼 힘이 들지, 아이 듦?"
목소리가 날씨처럼 쌀쌀했다. 워낙 무뚝뚝한 장진댁이었지만 나한테는 그래도 덜한 편이었는데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무시기 일로 온 거임?"
"청미래덩굴 좀 있으면 얻으려..."
나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청미래덩굴이란 말에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는 나를 그녀가 훑어보았다. 경멸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없으면 윤여리나무라도 좀..."
"기딴 거 읎슴메."
장진댁이 벌컥 화를 냈다. 그녀가 화를 내야 할 정도의 부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없으면 그만이지, 소리를 지를 것까진 없잖아요."
"무아, 그 에미나이가 그 꼴이 되었는데 네놈은 피양에 가서 하고 온 짓이 기껏 그것임메?"
백무아의 이름까지 꺼내는 장진댁에게 나는 발끈했다.

"무아누나 얘기는 왜 꺼내요."
"누나는 무시기 놈의 누나? 둘 사이르 모르는 인간이 있는 줄 알간. 니들 둘만 모르지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돌아서서 공장을 나오는 내 등을 향해 장진댁이 쏘아붙였다.

"네놈은 좀 다를 줄 알았지비. 더러운 서나 놈. 무아, 그 에미나이만 불쌍하지비."

그날 밤, 나는 심하게 앓았다. 열은 펄펄 끓었고, 어깨는 떼어내서 던져버리고 싶게 아팠다. 처음으로 내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어깨뿐만 아니라 뼈의 모든 마디마디를 다 뽑아내고 싶게 지독하게 우리고 쑤셨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내 곁에는 찬물 한 그릇 떠다 주는 사람이, 따뜻한 말 한마디 붙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희미하게 내 귀에 들린 목소리는 괴수도깝과 장진댁의 것이었다.

"이런 매정한 사람 같으니. 정말 죽게 되는 줄도 모르는 미련한 놈을 보냈으면 약을 달여 먹이고, 죽이라도 한 사발 끓여 먹일 일이지. 서쪽 하나님의 자식들은 인심이 원래 그렇게 고약한가."

"이봅세. 고름으 한 사발이나 뽑아내고 기냥 내쫓은 거이 누굽메. 그거이 나가 죽으라는 심보가 애이면 무시기겠슴. 사람이 하늘이란 님자는 기래 동쪽 하늘으 기 따위로 모신단 말임메?"

내가 슬그머니 눈을 뜨자 두 사람은 하던 말을 멈췄다.

"한겨울에 초상치는 줄 알았더니, 미련한 놈이 목숨 하나는 질기네."
괴수도깝이 입을 삐죽거리며 내 눈을 들여다보고 나서 어깨에 코를 가져다 대고 큼큼 댔다.

"이거이 미친놈이 아임메, 임질이 아이라고 말으 처 했으면 내가 약초르 가마솥에라도 달여주지 않았겠슴둥."
장진댁이 왜 갑자기 임질을 들먹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청미래가 원래 지독한 독균에 쓰는 약재야. 임질, 매독 걸린 놈들이 찾으니까 이 서쪽 하나님 아버지의 자식이 네놈도 거기에 걸려서 온 줄 안 거지."

나는 입가에 웃음을 그리다가 멈췄다. 금희네가 들고 간 약제가 뭐였을까. 금희네의 울음과 장진댁의 분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사흘 뒤, 어깨에서 뽑아낸 종이 심지에 누렇고 진한 고름이 빨려 나왔다. 닷새가 지나지 않아 부기가 가라앉고,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괴수도깝은 '짐승 같은 회복력'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금희네가 죽은 것은 내가 다시 일을 나가기 전날이었다. 아직 캄캄한 새벽녘에 들려온 비명을 듣고 달려나간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장 앞마당 가운데 서 있는 느릎나무에 금희네가 매달려 있었다. 밤새 내린 폭설로 무릎까지 눈이 쌓인 마당을 가로질러 나는 달려갔다. 허공에 떠있는 그녀의 무릎을 잡고 추켜올리며 나는 소리쳤다.

"낫 가지고 와, 낫!"

낫을 찾아 들고 달려온 남자 고공들이 줄을 끊고 금희네를 받아 내렸지만 이미 때는 늦은 다음이었다. 금희네의 심장은 멈춘 지 오래였고, 몸은 싸늘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던 장진댁이 눈밭에 풀썩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괴수도깝 영감은 금희네를 외면하고 어둠에 잠긴 먼 산만 바라보았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총령의 북쪽 하늘엔 슬픈 별이 빛나고 있었다.

금희네의 시체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밖에서 죽은 귀신은 마을에 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몹쓸 병에 걸려 죽은 여자를 집안에 들일 수 없다는 그 잘난 집안사람들이 가증스러웠다. 혼자 몸으로 세 아이를 거두기 위해 뼈가 빠지게 일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그 잘난 집성촌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했을까. 무지공장 고공의 지게에 실려 그녀는 산으로 향했다. 집이 있는 마을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삽과 곡괭이를 든 고공들 몇이 뒤를 따랐다.

"유임생입니까? 유해생입니까?"
나는 장진댁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왜 그럽메?"
"내 잘못입니다."

사실이었다. 나는 금희네를 데려다주러 갔던, 바로 그날 늑대바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임생을 없애버려야 했다. 내가 그놈을 없애고 총령을 떠났더라면 금희네는 죽지 않았을 것이고, 세 아이는 고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장 유임생이 금희네를 부른 건 금희네가 내게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도움을 청했던 날 낮이었다. 편히 살게 해주겠다는 회유와 강요를 그녀는 거절했다. 유씨 형제가 이미 얼마나 많은 고공을 농락했는지 잘 아는 금희네였다. 거절하면 어떻게 하는지도 알았기에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를 말린 것은 금희네였다.

여기서 일하지 않으면 세 아이를 먹여 살릴 길이 없다며 견뎌보겠다고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얘기하겠노라고 했던 금희네였다. 그녀는 내게 다시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나는 무아의 일로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둘 다겠지비... 더러운 놈들."
장진댁은 나를 외면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몰아쉬고 돌아섰다.

금희네를 지고 갔던 무지공장의 고공들은 아무도 어디에 묻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깡깡 얼어붙은 겨울 산을 제대로 파고 묻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금희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공장은 여전히 돌아갔다. 조지소의 고공들의 손길을 백 번 거친 백지는 창고에 입고되기 바쁘게 출고되었다. 활판인쇄소의 고공들은, 낮으로는 사서삼경과 족보를 찍고 밤으로는 서학과 동학, 개화당의 서책을 찍어냈다.

나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내가 쓰러지기 전에 쏟아버린 조판을 다시 짰다. 슬그머니 내 옆에 다가온 괴수도깝이 내가 심고 있는 활자를 내려다보았다.

天知 地知(천지 지지)

"이래도 저 인간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할 건가요?"
나는 손을 멈추고 괴수도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그렇지, 무식한 네놈도 아는 것이니 나도 알겠지."

괴수도깝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내가 심어야 할 다음 활자를 그가 대신 심었다. 汝知 我知(여지 아지). 네가 알고 내가 안다. 그는 자신이 마무리한 조판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돌아섰다. 괴수도깝은 내가 무얼 하려는지 알았고, 그렇게 동의했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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