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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의 계절은 가을로 넘어가 겨울, 봄, 다시 여름의 과정을 거치며 변할 것이다.
 눈앞의 계절은 가을로 넘어가 겨울, 봄, 다시 여름의 과정을 거치며 변할 것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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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났다. 눈앞의 계절은 가을로 넘어가 겨울, 봄, 다시 여름의 과정을 거치며 변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여름의 어떤 기억만은 우리 안에 남아 되살아나고 재구성되길 반복할지도 모른다.

백수린의 단편 소설집 <여름의 빌라>에는 어긋나거나 실패한 서사를 복기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나 극적이지 않은 순간에 생기는 기척을 통해 이전까지 포착되지 못했던 조용하고 미세한 균열을 우아하게 그려낸다. 우리는 어째서 그런 기척에 끌리는 걸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잘 모르지만, 나만이 알 수 있는 작은 생채기가 마음 한구석에 생긴 것처럼,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선을 건넌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또렷하게 선 하나가 그어지는 걸 목격했고,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볼 수 없다고 깨달았던 순간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데도 그 일의 이전과 이후 나는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자각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그 마음을 나조차도 알 수 없어 자꾸 되돌아보게 되는데, 거기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이상한 끌림 때문이다. 그 끌림은 경계를 감각하는 일일 것이다. 나와 타인의 경계를 감각하고 무언가를 의심하면서 맴돈다. 하지만 어떤 서성거림은 조금씩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한다.
 
"같은 장소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을 당긴 것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그 이후 함께한 날들 동안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 <여름의 빌라> 56쪽
 
'여름의 빌라'는 관계의 어긋남을 다룬다. 주아는 스물한 살 배낭여행에서 만나 친분을 맺어온 독일 여성 베레나에게 지난여름 시엠레아프에서 함께 보낸 날에 대해 편지를 쓴다.

박사 학위를 따고도 임용에 미끄러지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주아와 지호, 테러로 딸을 잃고 손녀를 데리고 캄보디아에 머물고 있던 베레나와 한스. 서로의 내밀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여름 휴가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미묘한 갈등과 충돌을 겪는다.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미욱함이 이해를 바라고 오해를 부른다. 
  
'여름의 빌라' 앞에 실린 '시간의 궤적'에서도 타국에서의 한 시절을 함께 한 언니에게 이해를 바라던 마음이 상처 입고, 그로 인해 자신 또한 언니에게 상처 주는 말을 던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었던 관계, 또는 더 밀착되길 바랐던 관계가 미세하게 어긋남으로, 어떤 단절로 미끄러지고 만다는 걸 우리는 안다.

'고요한 사건'과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속 나는 무호, 해지, 다미와 같은 친구와 어울리지만, 그들과 결코 맞닿을 수 없는 삶의 뒤틀림을 알고 있다.

'폭설'과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에서 주인공은 엄마나 남편처럼 아주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조차 서로를 영원히 알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균열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는데 되돌릴 수 없게 치명적이라 우리는 좌절하고 씁쓸해한다.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균열의 찰나와 기억 앞에서 문을 열고 나갈까 말까 망설이며,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고민한다. 미지의 세계가 지닌 매혹과 아름다움에 끌렸지만 어긋나 버린 기억을 되짚어보고 재구성한다.

그것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시도이며, 다음에는 늦지 않게 돌아가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다. 멀어진 관계이지만 마침내 반대편 도로에 무사히 닿는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용기를 내어 보내지 못할 것 같은 편지를 쓰고, 언젠가 편지를 부치게 되길 희망할 것이다.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자기 앞에 등장한 피부색이 다른 소년을 보고 자신과 그사이에 그었던 선을 지워 소년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선을 긋는 레오니(여름의 빌라)를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소설 속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조심스럽지만, 자신과 다른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다. 자신과 완전히 다른 성격과 배경을 지닌 인물에게 끌려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가까운 이들의 오해를 무릅쓰며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한다. '폭설'에서 사랑을 쫓아 자신의 삶을 선택한 엄마와 '흑설탕 캔디'의 노년에 연애 감정을 경험하는 할머니가 그렇다.

할머니는 브뤼니에 할아버지와 한낮의 시간을 보내다 어린 시절 맛보았던 흑설탕 캔디의 황홀하도록 달콤한 맛을 떠올린다. 그리고 무너질 걸 알면서도 각설탕으로 탑을 쌓으며 웃음을 터뜨린다. 사랑은 허물어질 걸 알면서 쌓는 각설탕 탑 같은 것일 테다. 끝을 알면서도 또 하나, 또 하나, 각설탕을 올려놓는 그 마음은 삶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또한 발견할 줄 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꼭 움켜쥐고 있겠다는 그들의 마음은 조약돌처럼 작지만 아주 단단하다. 소리 없이 밤새 내려 하얗게 세상을 뒤덮은 눈이 발하는 희붐한 빛처럼 희미하지만 경이롭다.
  
우리와 타인, 우리와 세계 사이의 미세한 뒤틀림이 인생을 불가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불가해함이 우리를 미혹한다. 상처받고 멀어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 세계에 이끌리고, 사랑하고야 마는 것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미세한 각도 때문일 것이다.

그 알 수 없음이 우리를 유혹하고 덧없이 타인의 세계로 한 발 내딛게 한다. 무지(無知) 또는 미지(未知)가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오해를 부르지만 우리는 그것 때문에 사랑을 시작한다. 불가해함이 우리를 움직이고 움직이려는 시도 속에서 나의 굳건했던 경계가 흐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차이와 어긋남을 인식하고, 그 경계에서 실패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슬프다. 하지만 되돌아보는 마음속에는 사소한 찰나에 진실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경계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더라도 찰나의 기척을 감각하고, 숨어 있는 진실을 찾으려는 마음이 미세하게나마 경계선의 위치를 옮기게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우리의 세계는 타인을 향해 조금씩 확장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은이), 문학동네(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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