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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할머니 즉 나의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시할머니를 결혼 후 자주 뵙지 않아서인지 당장 크게 마음의 동요가 생기진 않았다. 아마도 나는 고인이 되신 시할머니와의 추억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할머니에 대한 작은 기억
 시할머니에 대한 작은 기억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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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가끔 뵈었던 시할머니께서는 말씀이 거의 없으신 분이셨다. 들은 바로는 시할머니께서는 무뚝뚝하신 편이지만, 유일한 손자이자 장손인 나의 남편을 어릴 적부터 유독 아끼며 예뻐하셨다고 하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래 뵙지 않았지만 시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나에게까지 분명하게 전해졌던 것 같다.

결혼 직후 내가 첫아이를 낳고 뵈었던 시할머니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거동을 하셔서 가끔 시어머니댁에 오시기도 하셨다. 세월이 흘러 내가 둘째와 셋째를 낳고 시할머님댁 시골에서 뵈었을 때는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노환으로 침상에만 계셨고 거의 말씀을 못하셨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시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침상에 누워계시던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터져버린 나의 눈물샘은 그칠 줄 몰랐다

장례식에 간 다음날 시할머니의 입관을 앞두고 예배가 있었다. 나는 가족이기에 당연히 참여했고 그 예배에서 내가 눈물이 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그런데 예배를 시작하고 조금씩 나의 눈물샘이 자극되기 시작하였다.

시할머니께서 생전 열심히 다니시던 교회의 목사님이 오셨다. 목사님은 예배 중 시할머니의 손자(남편)에 대한 극진한 사랑, 손자를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하셔서 자주 말씀하셨다고 전해주었다. 그 말씀이 나에게는 마음을 울리는 자극제가 되었다.
 
시할머니의 장례식
 시할머니의 장례식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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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이랬다. 최근 남편은 20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일을 하게되었다. 남편과 나의 걱정과 달리 원하던 일들이 잘 풀리는 것 같았고 우리 부부는 너무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컸다.

어쩌면 그런 모든 일들이 손자를 끔찍히 생각하는 시할머니의 보살핌과 소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싶고, 마치 새로운 일을 하는 손자를 위해서 도와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가슴이 먹먹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조금씩 눈물이 나기 시작했는데 쉽게 멈춰지지 않았던 것 같다. 

예배 직후 시할머니의 입관이 곧바로 이루어졌다. 그곳에서 나의 눈물샘은 완전히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의 울음을 나조차 예견하지 못했기에 휴지조차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그렇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다름 아닌 나의 '친정 엄마'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입관식에서 불현듯 친정엄마가 생각났던 것이다.

지금껏 나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 나의 곁에 없는 날이 올거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본 적도 없지만, 그것이 내 마음 속에 확 와닿은 적도 없었다. 엄마는 늘 당연하게 느낄만큼 나의 곁에 가까이 계시며 나를 도와주셨다. 나는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지금까지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하고싶은 일들을 했고 어려움 없이 살았던 그런 '복받은 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근까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딸이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을 합리화했고 나의 불만에 대하여 엄마에게 화살을 돌렸다. '나와 다른 엄마의 성격은 이해하기 힘들다' 혹은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신다'며 각종 이유를 들어가며 철없이 굴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의 근원을 나 자신보다는 엄마에게 돌렸고 쉽게 화를 내기도 했으며 엄마와 부딪힌 적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엄마와 내가 서로 떨어져서 자주 안 만나야 한다는 말까지 하였고 그것을 오히려 독립한 자녀의 도리이자 현명함으로 포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도 상처인줄 몰랐던 부족했던 처사를 했던 것이다.

'예쁘다'는 그 말 때문에

입관식에서 정돈된 모습으로 평온하게 누워계신 시할머니께 장의사분이 말하였다.

"우리 할머니, 참 예쁘시네요. 마지막으로 가족분들 우리 할머니 한번 보세요..."

그 '예쁘다'는 말에 시어머니께서는 결국 조용히 눈물 지으시다가 큰 울음을 터뜨리시며 목놓아 우셨다.

"우리 어머니... '예쁘다'는 말씀을 참 좋아하셨는데... 우리 어머니..."

나는 그 말에 또다시 눈물이 펑펑 났다. 내가 본 우리 엄마는 평생 자신을 꾸미는 데 애쓰지 않으셨다. 엄마에게 가끔 '왜 이렇게 자신에게 투자하지 않냐'고 말하면 엄마는 '조금 나이가 들어 나중에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내가 본 엄마는 나이가 드신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식에게 자신을 위한 투자를 위해서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신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난 괜히 엄마를 보면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도 좀 꾸며... 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거야?"라며 타박만 했던 것이다. 실제로 해드리는 것도 없이 입으로만 엄마를 위했던 그런 딸이었다.

하물며 지금껏 엄마에게 '예쁘다'는 그 말을 우리 가족 누구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실 때 단 한번 그 말을 들으시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이제라도 쑥쓰럽지만 기회가 되면 엄마에게 그 말을 꼭 해드려야겠다. 그리고 엄마가 원하시지 않더라도 자주 해드려야할 것 같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나를 '우리 공주'라고 불렀다. 나는 지금껏 나의 아이들에게 '예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왜 엄마에게는 그 말을 한번도 못했나 싶다.
 
눈물이 펑펑 났다. 그리고 하늘도 우는지 비가 내렸다.
 눈물이 펑펑 났다. 그리고 하늘도 우는지 비가 내렸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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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관식이 끝난 후에도 내내 울고 또 울다가 눈이 충혈되어 벌개졌다. 복도 의자 한켠에 앉아 비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울고 또 울었다. 하늘도 나처럼 슬픈지 계속 비가 내렸다. 남편은 너무 오래 울고있는 나에게 다가와서 왜 이렇게 많이 우냐고 물었다.

"할머니가 누워 계신 것을 보니까 자꾸 엄마 생각이 나더라고... 나는 정말 나쁜 딸이다 여보... 그래서 계속 눈물이 나는 것 같아... 원래 불효자일수록 더 눈물이 나는 것 같아... 참회의 눈물이랄까... 어느 선생님이 어머니 돌아가신 후 나한테 그랬거든... 틈틈이 돈 생기면 엄마한테 작은 돈이라도 드려야 나중에 후회도 안되고 그렇게라도 효도할 수 있는 거라고...

그랬는데... 나 욕심 사납게 그걸 못한 거 있지... 진짜 그게 좀 마음이 아프네... 그래서 방금 엄마한테 돈 보냈어... 그게 내가 그래도 할 수 있는 효도인 것 같아... 이해해줘... 그리고 나 이제 진짜 엄마한테 잘할 거야... 정말로... 나 여기서 반성하라고 할머니께서 날 여기로 부르셨나봐..."


남편은 당연히 이해한다며 잘했다고 말했다. 우는 나를 달래주려는 생각인지 그는 '지금 하는 말을 녹음해야겠다'는 농담도 하였다. 난 엄마에게 그동안 마음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지 않았던 일을 즉시 실행하였다.

그리고 엄마에게 송금을 하면서 평소와 달리 '받는분 메모'에 내 이름을 지우고 '엄마사랑해'라고 입력했다. 이 모든 게 당장 내 마음이 편하고자 했던 행동이지만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했어야 할 깨달음과 뉘우침

그렇게 입관식 이후, 나는 달라졌다. 내가 가졌던 엄마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들, 연민, 속상함, 분노 등 나를 괴롭혀왔던 그 마음들이 어떤 애씀도 없이 눈 녹듯이 한 번에 사라지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생각해보면 사소한 일상에서 나의 기준에서만 엄마를 바라보았고 엄마를 이해하기 어렵다며 화를 내거나 함부로 했던 일들이 많았다. 그런 나의 부적절했던 행동들을 처절하게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그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유일하게 말할 수 있었던 남편에게 '도대체 왜 그러시냐'며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다' 혹은 '나는 너무 속상하다'는 식의 자기중심적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결과의 원인은 대부분 엄마에게 돌리고 엄마 탓만을 해왔던 것 같다. 나는 이런 나의 행동들을 스스로 반성하게 되었고 결국 '나의 잘못과 부족함'이었다는 것을 확연하게 뉘우치게 되었다.
 
엄마를 향한 나의 마음이 달라졌다
 엄마를 향한 나의 마음이 달라졌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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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할머니의 입관 이후, 엄마는 자책하지 말라며 내가 그간 엄마를 위해줬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다. 그 문자에 또다시 눈물이 났다. 결국 이것은 '자책'이 아니라, 언젠가는 했어야 할 자식으로서의 '깨달음이자 뉘우침'인 것이다. 참 다행인 것은 지금도 다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 새삼 감사할 따름이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나의 삶의 철학이 왜 엄마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그것을 미처 몰랐을까. 나는 참 철이 늦게 드는 타입이라고 스스로 남편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기고백을 했다. 하지만 남편은 '늦은 나이에도 철이 안 드는 사람이 있다'며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말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오늘도 손자가 먹고 싶다는 '시장표 치킨'을 사러 가시며 힘든 내색도 없이 자전거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시장에 다녀오신 나의 엄마! 난 엄마처럼 그렇게 헌신적이고 대단한 사람도 아니면서 늘 똑똑한 척, 잘난 척만 했다. 이런 딸을 늘상 너그러이 품어준 우리 엄마,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이 참회와 고백의 글은 엄마를 향한 내 마음의 '서약서'이자 '다짐'이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엄마를 향한 나의 최선이 될 것이다. 나는 나에게 말한다. '엄마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딸이 될게. 엄마'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블로그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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