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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가디슈>를 봤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탈레반 반군에 의해 붕괴된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코로나19 4단계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현장감 넘치는 영상은 당시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한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단순한 흥미를 뛰어넘어 국가란 무엇인가, 위기 상황에서 리더는 어떠해야 하나, 그리고 우리에게 이념은 무엇인가까지 간단치 않은 메시지를 던졌다.

영화 줄거리는 남한과 북한 외교관이 힘을 합친 분쟁지역 탈출기다. 한국은 1988년 올림픽 직후 UN가입을 위해 아프리카 대륙에서 북한과 함께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러나 1990년 12월, 반군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하면서 둘 다 고립됐다. 반군은 각국 대사관에 반군과 정부군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했다. 정부군을 선택한 대가는 추방과 죽음이었다. 본국과 통신은 두절되고 대사관은 반군에게 약탈당하는 상황에서 남북한 외교관과 가족 20명은 탈출을 감행했다.

당시 남북은 이념을 놓고 대치중이었다. 그런 남한과 북한이 협력해 사지를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남한과 북한 대사는 이념을 떠나 인도적 관점에서 손을 잡았다. 리더의 판단력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한국 대사관에서 가진 첫 저녁 식사자리에서 깻잎 장아찌를 나누는 장면은 한국인만 이해할 수 있는 코드였다. 김치나 깻잎 장아찌는 상대가 젓가락으로 잡아주면 찢거나 나누기 수월하다. 감독의 상상력일 수 있지만 남북을 이어주는 훌륭한 소재였다.

<모가디슈>에서 아프간을 떠올린 건 최근 상황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카불에 고립된 아프간인들 처지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 됐다. 26일 아프가니스탄인 390명은 한국정부 도움을 받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우리정부 활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탈레반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 반군이 장악한 현지에서 4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빼낸 건 작전명 '미라클(miracle)'처럼 기적이었다. 우리정부가 분쟁지역에 있는 외국인을 대규모로 국내에 이송한 건 처음으로, 국제사회는 한국정부에 찬사를 보냈다.

탈레반 점령 이후 아프간 현지 상황은 극심한 혼돈과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탈레반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고 살해 위협에 직면해 있다. 급기야 27일, 카불 공항 폭탄 테러로 미군을 포함해 150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한국에 도착한 아프간인들은 하루 사이에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아프간인 이송 작전은 30년 전, 남북한 외교관들의 모가디슈 탈출과 오버랩되면서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카불 함락 이후 아프간 사태를 바라보는 국제사회 우려는 깊다. 20년 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허탈함을 지켜보는 동시에 야만사회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는 점에서 황당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여성과 아동에 대한 인권이 우려되고 있다. 특히 한국은 정규군 파병을 통해 아프간 재건에 주력했기에 상실감은 각별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 장교 출신인 셋째 동생도 당시 만났던 현지인들 사진을 꺼내 보이며 그들의 안전을 기원했다. 미국 언론에도 아프간 파병을 다녀온 미군들이 안타까워한다는 보도가 실리는 걸 보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나보다.

우리 정부가 아프간인들을 신속하게 이송한 건 자랑할 만하다. 한국에 도움을 준 현지인을 구출함으로써 인도적 책무에 부응한 것은 물론 국제사회에 긍정적 메시지를 던졌다. 6.25 당시 원조 받았던 나라가 군 수송기를 띄워 분쟁지역 주민을 이송할 정도로 신장된 국력을 알리는 동시에 주권 국가로서 품격도 높아졌다. 무엇보다 이번 이송 작전은 우리사회 저변에 깔린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난민을 바라보는 인식 전환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불과 3년 전 제주도 예멘 난민 당시와 비교해도 우리사회가 얼마나 성숙했는지 알 수 있다. 2018년 예멘인 500명이 난민을 신청하자 우리사회는 거센 논쟁에 휩싸였다. 많은 이들은 '이슬람포비아(이슬람을 두려워하는 심리)'를 앞세워 난민 수용을 강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수용을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삽시간에 75만 명이 찬성할 정도였다. 당시 우리정부는 2명만 받는데 그쳤고, 국제사회는 비인도적 처사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이 같은 결정은 2015년 시리아 사태 당시 유럽사회와 대비돼 더욱 도드라졌다. 당시 유럽국가 대부분은 2만 명 안팎에서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다. 놀라운 건 독일 정부였다. 메르켈 수상은 100만 명을 받겠다고 선언했고, 최종 117만 명을 받아들였다. 중앙대학교 김누리 교수는 "유럽 국가들도 난민 문제 때문에 극우세력이 득세함으로써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독일은 다음해 메르켈을 재선출할 정도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다"며 진전된 인권의식과 성찰을 강조했다.

이런 면에서 충북 진천 군민들이 보여준 시민의식은 놀라운 변화였다. 아프간인들이 머무는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이 소재한 진천군은 코로나19 때도 주목받았다. 당시도 진천 군민들은 확진 환자를 수용함으로써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다. 이번 아프간인들 수용 과정에서도 진천 군민들은 따뜻하게 맞았다. 우리정부도 취업까지 가능한 거주비자를 발급하기로 했다. 반면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비인도적 발언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는 "아프간 난민 가운데 탈레반과 연관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신중해야 한다"며 국민정서와 동 떨어진 발언을 늘어놔 빈축을 샀다.

베트남 패망 직후에도 한국 외교관들은 비슷한 일을 겪었다. 당시도 <모가디슈> 탈출 못지않게 긴박했다. 호치민 함락 직후 현지는 패닉에 빠졌고, 이 과정에서 교민 100여 명과 외교관 3명이 고립됐다. 미국 정부는 잔류자에 대한 구출을 포기했다. 이대용 공사와 안희완 영사, 서병호 총경은 5년 동안 현지 정치범 수용소에 억류됐다 1980년 4월 11일에야 극적으로 풀려났다. 이대용 공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그래도 정부가 나를 데려 가는구나'라고 안도했다"며 당시 심정을 피력했다.

언젠가는 베트남 탈출기도 영화로 제작되리라 생각한다. 모가디슈와 베트남에서 위기에 처했던 우리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조경태 의원보다는 진천 군민들이 보여준 태도가 훨씬 성숙하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임병식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한스경제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모가디슈, #아프가니스단, #아프간 이송 작전, #베트남 패망, #충북 진천 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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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 여행, 한일 근대사, 중남미, 중동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남미를 여러차례 다녀왔고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 중심의 편향된 중동 문제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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