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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 2일, 이시가와현 가나자와시 연병장에서 훈련 중이던 일본육군 보병 제107연대 3대대에 갑작스러운 동원명령이 떨어졌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해군 수송선에 오른 1000여 명 장병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마주하게 될 기아지옥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 일시적으로 미 해군을 압도했던 일본 해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의 우위를 더욱 공고히 할 요량으로 태평양 각지의 도서 지역들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일본 해군은 이 도서지역의 비행장들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전쟁 수행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는 항공대는 미 해군에게 있어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상황 악화되자 섬은 고립되기 시작

미국으로서는 태평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해군이 거점으로 삼은 도서 지역들을 탈환하거나 무력화시켜야 했다. 미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개시하고 일본 해군의 함대가 위축되자,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은 금세 약점을 드러냈다.

아무리 폭격을 퍼부어도 섬은 함선처럼 격침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섬은 함선처럼 이동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전황이 악화되면 움직일 수 없는 섬은 적 세력권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 해군이 점차 태평양의 바다를 장악하면서 일본군 섬이 고립되는 일도 많아졌다. 고립된 섬을 버릴 것인지 사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때, 대부분의 경우 일본군은 섬을 사수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적의 압도적 전력에 맞서 고립된 섬을 사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집으로 밀어붙인 도서 지역 방어전은 항상 파국으로 끝이 났다. 비행장 하나를 탈환하기 위해 시작한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2만여 명의 병력과 38척 군함, 683기의 항공기를 잃었다.

당시 대본영(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에서는 절대국방권을 설정해 방어선을 촘촘히 하는 것으로 과달카날 전투와 같은 파국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해군 측에서는 절대국방권 밖에 위치한 마셜 제도, 길버트 제도와 같은 거점들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들 도서지역에는 일본 해군이 공들여 구축한 비행장들이 있었다. 절대국방권 밖에 있는 섬들을 방어하는 것은 역량 밖의 일이며 힘을 분산시킬 뿐이라는 육군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군은 완강했다. 남방의 도서지역에서 결전을 벌인다는 해군의 고집에, 결국 육군은 해당 섬들을 방어하기 위한 지상군 병력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대본영에서는 '전쟁수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확보해야하는 권역'으로 '절대국방권'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남방 도서지역에서의 결전'을 고집하며 절대국방권 바깥에 놓인 섬들의 사수를 결의했다.
▲ "절대국방권"에서도 한참 떨어져있던 밀리 환초 대본영에서는 "전쟁수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확보해야하는 권역"으로 "절대국방권"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남방 도서지역에서의 결전"을 고집하며 절대국방권 바깥에 놓인 섬들의 사수를 결의했다.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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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 2일 동원된 107연대 역시 해군이 고집하던 '결전'을 위해 파견된 병력이었다. 107연대 장병들은 같은 해 12월 1일에 마셜 제도에 위치한 밀리 환초에 상륙하였다.

약 2m만 땅을 파도 해수가 솟는 이 척박한 산호섬에는, 이미 3000여 명 해군수비대가 장차 다가올 미군의 상륙에 맞서는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07연대는 이들 해군수비대로부터 지휘뿐만 아니라 식량 배식까지 받게 되었다. 식량과 탄약을 실어 나르기 위해 수평선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해군의 보급선은, 밀리 환초에서 생활하던 육해군 장병들에게 있어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그러나 해군이 마셜 제도에서의 제해권을 상실하고 보급선이 격침되면서, 밀리 환초는 본국으로부터 완전히 보급이 끊기게 된다. 1944년 초의 시점에서 타라와, 마킨, 콰잘린 등 주변 마셜 제도의 섬들은 미군의 발 아래 놓이게 됐다.

밀리 환초는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로 전락했다. 미군은 고립된 밀리 환초의 일본군이 기아로 자멸할 것이라 판단했으므로, 밀리 환초를 내버려두고 다른 작전에 힘을 쏟았다.
 
일본 해군은 태평양 각지의 도서지역들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하며 사수를 고집했다. 밀리 환초 역시 이러한 집착에 따라 대규모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 미군의 공습을 받는 밀리 환초의 일본 해군 비행장(1943년 11월) 일본 해군은 태평양 각지의 도서지역들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하며 사수를 고집했다. 밀리 환초 역시 이러한 집착에 따라 대규모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 미 해군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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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의 패배, 보급물자도 끊기고... 점차 흉흉해진 군심

미군의 예상은 적중했다. 밀리 환초의 일본군 병력들은 극심한 기아 상태에 빠지게 됐다. 1944년 1월 정량보다 20% 줄어들었던 배식량은, 반 년 뒤엔 정량보다 70%나 줄어든 수준이 됐다.

이마저도 서류상 보급 계획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 상황은 더욱 참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군은 잠수함을 이용해 밀리 환초로 보급을 실시하겠노라 쇼와 천황에게 보고했지만, 보급 물자를 실은 잠수함이 밀리 환초에 닿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944년 7월, 절대국방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던 사이판 섬까지 미군에게 함락되면서, 절대국방권 밖에 있던 밀리 환초는 본국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버려진 일본군 병력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도마뱀, 쥐, 벌레, 풀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잡아먹었다. 섬이라는 특성상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 가장 쉬울 듯 했지만, 어로 작업에는 큰 위험이 동반됐다. 폭약을 터뜨려 물고기를 잡다가 폭발 사고나 미군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는 장병들이 속출했던 탓이다. 미군은 밀리 환초에 공습을 퍼붓거나 심리전을 실시하며 식량난으로 고통받던 일본군 장병들 숨통을 더욱 조여들어왔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으면서 군심도 흉흉해졌다. 해군수비대가 방공호에 식량을 숨겨두고 있다고 생각한 107연대 병사들이 해군의 밭이나 창고를 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해군수비대는 이 '도둑'들에게 발포로 응수했다. 같은 '일본인'이라는 정체성마저 식량난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됐던 것이다.
 
종전 후 한달이 지난 시점에서도 영양 상태가 회복되지 못한 모습이 눈에 띈다. 밀리 환초를 비롯하여 마셜제도에 배치되었던 병력들은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기면서 극단적인 기아 상태에 놓였다.
▲ 기아 상태에 놓인 일본 해군 장병들(마셜 제도, 1945년 9월 15일) 종전 후 한달이 지난 시점에서도 영양 상태가 회복되지 못한 모습이 눈에 띈다. 밀리 환초를 비롯하여 마셜제도에 배치되었던 병력들은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기면서 극단적인 기아 상태에 놓였다.
ⓒ 미 해군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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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 환초의 지휘부는 환초 내 여러 작은 섬으로 병력을 분산 배치해 기아 상태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 했지만 그조차도 언 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했다. 굶주린 병력들은 군기로도 통제되지 않았다.

식량배급에 불만을 가진 병사가 백주대낮에 소대장을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질 정도로, 밀리 환초 내 일본군의 기강은 심각한 수준에 놓였다. 사정이 비슷했던 이웃의 윗제 환초에서는 아예 '인간사냥꾼'들이 나타나 아군 병사들을 잡아먹는 지옥도가 펼쳐지기도 했다. 일본군은 인간사냥꾼들을 붙잡아 처형했지만, 무너진 인간사회의 질서는 손쉽게 회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통제 벗어나기 시작한 군인들... 인육 먹은 정황 포착

재앙은 더 큰 재앙으로 이어졌다. 1945년 3월 1일에는 밀리 환초 치루본 섬에서 조선인 군속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다수 희생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제주대 사회학과 조성윤 명예교수가 사건의 전말에 대해 <남양군도의 조선인>에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이 치루본 섬에서의 조선인 군속 반란 역시 그 발단은 인육 문제였다.

밀리 환초 치루본 섬에는 일본군 11명(또는 20명)과 조선인 군속 120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식량난의 악화 속에서 양 집단의 갈등이 고조되던 가운데 조선인 군속들은 동료 조선인이 일본군 중위에 의해 인육으로 먹힌 정황을 포착했다.

이들은 평소 일본군에 불만을 갖고 있던 원주민들과 공모하여 야음을 틈타 치루본 섬에 있던 일본군들을 살해했다. 당초 계획은 일본군을 모두 살해한 뒤 미군 함정에 투항하는 것이었지만, 반란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본군 토벌대가 치루본 섬으로 들이닥쳤다. 토벌대에 의해 조선인 60여 명과 원주민 15명이 목숨을 잃었고, 38명만이 목숨을 건져 미군 함정으로 도망쳤다.

인육을 먹는다는 것은 당시의 관점에서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나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밀리 환초에 고립된 채 굶주리던 일본군 장병들에게 있어 인육은 전설이나 소설이 아닌 현실, 즉 눈 앞에 당면하게 된 존재였다.

그들은 먼저 죽은 전우의 시신에서 살점을 도려내 씹어 삼키며 절망적인 하루하루를 넘겼다고 한다. 굶어죽은 전우를 잡아먹었다는 것을 대놓고 발설할 수 없었기에, 사망자들 사인은 미군의 공습 등으로 기록되었다. 전우와 유족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생존자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인육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까지 겹쳐지면서, 밀리 환초의 실상은 오랫동안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
 
밀리 환초의 기아 상황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8월 22일 밀리 환초를 접수한 미군은 굶주린 일본군 병력들에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했다.
▲ 미군에 항복하는 밀리 환초의 일본군 지휘부 밀리 환초의 기아 상황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8월 22일 밀리 환초를 접수한 미군은 굶주린 일본군 병력들에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했다.
ⓒ 미 해군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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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 환초에 배치된 병력 5700여 명 중 26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피해가 컸던 육군 107연대의 경우, 1000명의 장병들 중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는 3할(30%)에 불과했다. 밀리 환초에 미군이 상륙하지 않았음에도 이같은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은, 제국 일본 지도부의 무책임이라고밖에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전쟁 기간에 발생한 일본군 전체 전몰자의 6할의 사인은 아사와 병사였다. 즉, 연합군과의 전투로 사망한 장병들보다 보급 문제로 사망한 이들이 더 많다는 뜻이다.

개전 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전선을 팽창시켰던 제국 일본의 지도부는, 전황의 악화로 정상적인 보급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현지의 병력들에게 '스스로 살아남으라'(自活)는 방침만을 내던져주고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렇게 버려진 일본군 장병들은 살아남기 위해 밭을 개간하기도 하고, 현지 주민을 약탈하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인육까지 난무했던 밀리 환초의 비극은 그 절정이었다.
 
"역시 용서 못해. 전사한 사람을 생각하면 용서 못하지. 왜 그런 곳에 가지 않으면 안되었나. 집에 있었다면 지금도 살아있었을텐데. 좋은 일이 된다고, 나라를 위해 복무할 수 있다고 밀리 환초에 갔던 게 정말 나라를 위한 것이었나. 그런 건 전쟁이라고도 할 수 없어. 기아지옥이지."
▲ 밀리 환초의 참상을 증언하는 나카쿠라 씨(2009년) "역시 용서 못해. 전사한 사람을 생각하면 용서 못하지. 왜 그런 곳에 가지 않으면 안되었나. 집에 있었다면 지금도 살아있었을텐데. 좋은 일이 된다고, 나라를 위해 복무할 수 있다고 밀리 환초에 갔던 게 정말 나라를 위한 것이었나. 그런 건 전쟁이라고도 할 수 없어. 기아지옥이지."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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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싸움, 이들의 희생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전몰자들이 부조리하게 강요받은 전쟁과 죽음이 '나라를 위한 것'으로 미화되는 현실 위에서 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발전적인 역사논의, 그것은 화려한 미사여구를 넘어 국가의 무책임을 날 것 그대로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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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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