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동무의 땅은 모두 몰수요." 인민위원회 간부의 말을 들은 임용호는 무덤덤했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임용호의 땅은 오늘 부로 모두 최성하 동무의 소유가 되오." "짝짝짝" "..." 땅 열 마지기(2000평)를 빼앗긴 임용호의 입매가 부르르 떨리긴 했지만 끝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내려온 북한군은 각 도·군·읍·면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충북 영동군 상촌면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궁촌리 활골에 사는 임용호도 그 대상이 되었다.

토지개혁에 항의했다고 학살
 
 증언자 임용호(왼쪽)
 증언자 임용호(왼쪽)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며칠 후 상촌면 인민위원회는 이번엔 김호연의 땅 5마지기(1000평)를 몰수했다. 김호연은 상촌면 지주 김영희 집에서 오랫동안 마름을 했다. 김영희가 죽으면서 김호연에게 5마지기를 주었는데, 그는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남에게 소작을 주었다.

김호연은 인민위원회 간부에게 항의했다. "내가 평생 일해서 번 땅을 왜 공짜로 뺏어가는 거요! 나는 땅을 못 내놓겠소." 항의의 대가는 무척이나 컸다. 그는 며칠 후 1950년 8월 닭재에서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게 참변을 당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이가 바로 임용호였다.

"내가 올라가니까. 여기 닭재라는 데가 있어. 닭재 모롱이(모퉁이). 그 모롱이를 돌아가니까. 거기 보가 있어. 물 내려가는 보 또랑을 맹글어 놔서. 물 내려가는 보 또랑이 있는데. 거길 올라가니깐 닭재 모롱이를 돌아가는데 핏내가 확 바쳐 (중략) 그런데 앞에서 보니까 서로, 저쪽 또랑창에서부터 이쪽 신작로로 전부 피가 죽 흘러. 산속으로 갖다 놓고는 말이지. 솔가지 하나를 꺾어가지고 덮어 놨더라고. 보니까 김호연이라. 총살을 당한 겨"(임용호. 1925년생.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

북한은 1946년 토지개혁을 하면서 5정보(15,000평) 이상의 땅을 무상몰수해 무상분배했다. 한국전쟁 후 인민군이 점령한 곳에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 하지만 영동군 상촌면 김호연과 임용호의 토지는 불과 1000~2000평밖에 되지 않았다. 김호연의 경우 오랫동안 지역에서 마름을 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원성을 사 무상몰수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임용호는 왜 그랬을까?

1950년 8월 어느날. 임용호를 포함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 젊은이들이 새끼로 묶여 남치환(가명) 집으로 연행되었다. 사람들 얼굴은 흙빛이었다. 며칠 전 궁촌리 대한청년단(아래 한청) 단장 정도출이 인민재판에서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맨 앞줄에는 임용호(1925년생)가 섰고, 문진구(이장), 이태원(한청), 임태정(한청 훈련단장), 오정원(6.25 전 육군본부 정보계 근무)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 다섯 명은 남치환 집 안방에 구금되었다. "삽하고 실탄 가져 와"라는 간부의 지시에 인민군이 총을 메고 삽을 가져왔다. 인민군은 마당에 구덩이 다섯 개를 파고 간부의 지시를 대기하고 있었다. 방안에 갇혀 있던 이들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인민재판이 벌어지다

"이중에서 제일 이런 사람은 총살이랴"라고 임태정이 소곤거렸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그는 인민재판에서 재판관에 의해 '반동'으로 지목되어 부(不)표가 과반수가 나온 사람은 처형당할 것이라고 했다. 방과 방 사이의 어간마루에 앉아 있던 인민재판장이 임용호를 불렀다. "이름?" "임용호입니다"로 시작된 인적사항 확인 후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임용호는 자신이 재판정에 서게 된 연유를 알지 못했다. 얼마 전 토지개혁에서도 무상몰수된 자신의 땅이 이웃에게 분배되는 걸 보고도 순순히 응했기 때문이다. 

"올해(1950년도) 행적을 자세히 말하시오." "작년(1949년)에 결혼하고, 올해 1월에 딸을 낳았습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2월에 서울에 가 취직을 했습니다." "어디로 취직했소?" "육군본부 정보계입니다." 이렇게 말한 임용호는 금세 후회했다. 동시에 자신이 이곳에 붙잡혀 온 이유를 알았다. 누군가 임용호가 한국전쟁 전에 육군본부 정보계 문관(文官)으로 근무했음을 밀고한 것이다. 그는 순순히 이실직고했다.

그는 1950년 3월부터 인천운송주식회사에 파견돼 북한과의 밀무역을 단속하는 일을 했다. 한 번은 서울 인근 지역으로 가 보도연맹원들의 활동을 정탐하기도 했다. 즉, 전향한 보도연맹원들을 군(軍)에서 일상적으로 감시했다는 말이다. 일부 문관은 북파공작대로 파견되기도 했는데 살아나온 이는 없었다. 그는 4개월 만에 귀향했는데, 얼마 안 있어 6.25가 터졌다.

인민재판에 오른 다섯 사람에 대한 개별 심사 후 가부를 묻는 표결이 이루어졌다. 종이 쪽지에 가부(可否)를 표시했는데 7명 중 4표가 나오면 즉결 처형이었다. 다행히 임용호를 포함한 다섯 명에게 나온 최다표는 3표였다. 아무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집으로 가는 이들의 눈에 남치환 집 마당의 커다란 구덩이가 들어왔다.

1950년 8월 염라대왕 앞까지 갔다 온 임용호가 안심하기는 일렀다. 그해 9월 9일 다시 인민군에게 붙잡혀 영동내무서(경찰서)로 연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누군가의 밀고 때문이었다. 6.25가 일어나고 영동경찰들이 후퇴하기 직전인 1950년 7월 중순 상촌면에서 오간 몇 마디의 말이 임용호를 다시 한번 사지로 끌고 갔다. 당시 조백주 상촌지서장이 6.25가 났다며 "북한은 자식들이 부모를 고발하는 세상"이니 주민들에게 "모두 피난 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임용호는 "그래 할 판이면 자살해 가지고 죽는게 낫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발언이 인공(인민군 점령) 시절 문제가 되었다. 토지개혁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고 인민재판에서도 살아남은 그가 이 발언으로 영동내무서로 끌려갔다. 임용호가 4대 독자였기 때문에 그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임용호의 아내가 7개월도 안 된 딸을 들쳐업고 분주소와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뛰어다녔다. 남편의 구명을 위해서다. 그러자 인민위원회 간부가 "남편을 살리려면 여맹(여성동맹) (궁촌리)분회장을 하라"고 했다. 그녀는 그날로 분회장이 되어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가르쳤다. 노력 동원에도 적극 참여했다.

만약 트럭이 출발했다면

한편 영동으로 끌려간 임용호는 영동내무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사흘 후 그는 성득환 집으로 이송되어 본격적인 취조를 받았다. 성득환은 영동군 영동읍에서 남해사(南海社)를 경영했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였다. 하지만 성득환 집에서의 심문은 고문에 가까웠다. "이 새끼 똑바로 말 안해!"라는 외침과 동시에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사실대로 말한 임용호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무조건 여죄를 밝히겠다며 매타작이 이어졌다.

인민군은 임용호를 무릎 꿇게 하고, 오금에 각목을 끼워 허벅지를 군홧발로 밟았다. 이어서 커다란 고무 몽둥이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임용호가 쓰러지자 그의 머리에 고무 몽둥이가 날아왔다. 그러고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이 돌아온 후에도 다리가 마비돼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는 간수들의 부축을 받고 반죽음 상태로 유치장에 되돌아갔다. 그의 몸은 구렁이가 지나간 듯 붉고 푸른 줄이 가로세로로 그어졌다. "아이고 어쩌다 이렇게 됐댜!" 장옥(長玉)이 혀를 찼는데 그는 전쟁 전에 양강면장을 했었다.

임용호는 초주검이 되었지만 편히 누울 수 없었다. 조그만 유치장에 40명이나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동경찰서는 2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유치장이 5개였다. 그런데 영동을 점령한 북한군은 각 읍면의 우익인사들을 체포해 5개의 유치장에 약 150명을 가두어 놓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똑바로 누워서 잘 수도 없었다. 소위 '칼잠'을 자야 했고, 밤에 소변을 볼라치면 모든 사람들을 깨워야 했다.

영동내무서에서 충북 청주로 1차 이송된 우익인사들은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2차로 사람들이 이송되기로 한 날은 1950년 9월 24일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 이송에 차질이 생겼다. 서울에서 피난 온 한 신문기자가 인민군의 계획을 접하고, 트럭 운전수들에게 "당신들이 지금 청주로 가면 영동사람 다 죽어요"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운전수들은 차가 고장 났다고 핑계를 대 아리랑고개에 차를 분해해 놓았다. 인민군들이 닦달했지만 다음 날까지 트럭은 멈춰 있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1950년 9월 26일 미군 선발대가 영동에 들어왔다. 미군 선발대가 영동내무서 유치장 자물통을 깨뜨린 후 처음 건넨 말은 "how do you do(하우 두 유 두, 처음 뵙겠습니다)?"였다. 영동내무서 유치장에는 150명의 영동군 우익인사와 더불어 미군 포로 5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용호가 17일 만에 집으로 돌아간 날은 추석(음력 8월 15일) 날이었다.
 
 청주시 당산에서 북한군과 지방좌익에게 학살된 우익인사
 청주시 당산에서 북한군과 지방좌익에게 학살된 우익인사
ⓒ 진실화해위원회

관련사진보기

 
"전부 일어낫!" 야심한 밤에 잠에서 깬 최창호(영동군 황간면 난곡리, 1928년 생)는 '드디어 오늘이 제삿날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의 옆에는 아버지 최영수가 있었다. 최영수 부자는 다른 이들과 함께 형무소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당산으로 끌려갔다. 잠시 후 당산에서는 총성이 울렸다. 총성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인민군은 총알도 아까운지 쇠몽둥이로 끌려온 이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사방에서 '퍽 퍽'하는 소리가 울렸다. 1950년 9월 25일 새벽의 일이었다.

약 200명이 학살된 이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당산으로 미처 이송되지 않은 우익인사들이 살아남았다. 인민군들이 형무소에 불을 질렀는데도 탈출한 이들이다. 또 최영수·최창호 부자도 당산에서 살아남았다. 확인 사살 되지 않은 이들이다. 만약 1950년 9월 24일 우익인사 150명을 실은 트럭이 영동에서 출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 최창호가 죽을 뻔했던 사실을 증언한 김상임
 남편 최창호가 죽을 뻔했던 사실을 증언한 김상임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댓글1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