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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 산행을 나섰다.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빨리 돌고 오리라 마음먹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매미소리, 새소리는 한낮이나 똑같았고 오가는 사람은 드물어 한적했다. 해 질 녘 붉은 노을이 든 흰 구름은 하늘 높이 퍼져 있었지만 산길 주위로 시나브로 어둠이 쌓여갔다. 금세 짙어진 어둠 속에서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주시하며 걸었다. 늘 다니던 산길이 이렇게 낯설어 질 수가!
 
   시나브로 어둠이 쌓이는 저녁 산길
  시나브로 어둠이 쌓이는 저녁 산길
ⓒ 이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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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어둠이 내리자, 유유자적 걷던 여유는 사라지고 지체 없이 되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도 모르게 속도를 내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산행 시간만 조금 늦췄을 뿐인데 어둠에 압도되어 예상치 않게 엄습한 긴장과 불안이 생소했다. 

다음날은 우연찮게 더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역시 어둑한 가운데 살짝 긴장하며 길을 걷고 있자니, 산길을 따라 줄지은 가로등불이 어느덧 하나둘 들어왔다. 산길이 환해지자 여태까지의 긴장은 사라지고, 빛으로 발개진 산길에 반가워하다가 문득 예닐곱 살 때 고모를 따라 걷던 어두운 골목길이 퍼뜩 떠올랐다. 깜깜한 골목길도 무서운데 새침했던 고모가 나를 떼어놓고 혼자 가버릴까 봐 불안하기까지 했는지 조마조마하며 발걸음을 옮겼던 장면이 기억난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밝은 가로등이 저만치 앞에 나타났고 그 뒤로 환한 큰 길이 이어진 게 보이자 서서히 안도했던 것 같다. 왜 고모를 따라 한밤에 나섰는지, 어디로 향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밤에 느꼈던 감정 변화가 아마도 야간 산행에서 느낀 감정 변화와 비슷했나 보다. 산길 가로등 불빛이 오래된 어린 시절 찰나의 감정 변화를 끄집어낼 줄이야! 기분이 묘했다. 판에 박은 듯한 단조로운 일상에 뜻밖의 신선한 정취와 감정이었다.

거리두기가 또 길어지며 단조로운 일상에 점차 지쳐간다. 늘 제 자리를 돌고 도는 기분이다. 어쩌면 코로나가 사람들에게 가장 타격을 준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마음의 생기를, 삶의 활력을 잃게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익숙한 일상은 언제나 심리적 안정감을 주지만, 너무 익숙함에만 머물면 자칫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음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익숙한 일상 중에서도 생기와 활력을 잃지 않으려는 작은 변화를 시도하는 노력들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다.

생기와 활력은 주로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빠져들 때 느끼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활동에 관한 기사들과 블로그들이 자주 눈에 띈다. 가구 배치 바꾸기와 집안 물건 정리는 물론, 식물 가꾸기나 반려동물 키우기, 홈베이킹, 그림 그리기, 브이로그 제작, 비즈 등으로 액세서리 만들기 등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취미들이 참 많기도 하다. 새로운 취미활동으로 실력도 쌓고 보람도 느끼며 일상을 충실히 사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꼭 새로운 취미를 시도해야만 새로운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우연히 시작한 야간 산행처럼, 일상의 루틴을 시간대만 살짝 바꾼 것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감정과 정취를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밤이라 더 시원해진 산바람으로 땀을 식히며 옛 기억에 머물다 보면 가로등 불빛 아래 고즈넉한 산길이 하염없이 정겹다. 이 정겨움을 하루종일 고대하며 기다리게 되니 근래에 이런 낙이 또 없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도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들 수 있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도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들 수 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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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도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를 2년여 만에 다시 읽었는데, 읽을 때의 마음가짐에 따라 책에 대한 느낌이 전혀 다를 수 있음에 신기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비평이랍시고 흠집 낼 부분을 찾기에 바빠 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쓰고 있는 글이 안 풀려 고통스러웠는지, 작가의 섬세한 감수성이 인도하는 사유의 깊이에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고 져버린 벚꽃들을, 초여름이면 향내 진동하며 떨어진 아카시아 꽃들을 작가는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다. 뒤이어 피어날 잎들과 열매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한 겸손의 덕목으로 읽어낸다. 섬세한 감수성과 단련된 깊은 사유로, 보고 느끼는 세상을 하나 더 가진 작가를 자연스레 동경하게 된다. 분명 나도 수도 없이 밟았던 꽃들인데 나는 왜 이런 감성과 사유로 나아가지 못할까? 

게다가 고통과 인내 속에서 어렵게 한 편, 한 편 글을 써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기필코 완결시키는 일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싶다. 글 쓰는 과정의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짐작하게 되니 다른 이들의 글에 함부로 날 선 비평을 가하는 오만한 실수를 더이상 저지르지 않고 싶다. 다만, 감수성도, 사유의 깊이도 미천한 내가 글을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며 얻은 새로운 질문이다. 

새로운 취미를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경험을 해야만 삶의 생기가 돌고 활력이 솟는 줄 알았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운 즐거움 찾기는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일상을 읽어내는 마음이 게으름을 피웠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항상 같은 루틴의 익숙한 일상이라도 작은 변화를 주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언제든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할 기회는 놓여있으니 말이다. 바쁠 때는 미처 눈길 주지 못했던, 음미하지 못했던 일상의 작은 일과들과 그 속에서 솟아나는 감정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면밀히, 섬세히 느끼며 스스로를 읽어내기에 좋은 때이다. 익숙한 날들에게서 발굴해 낸 많은 새로움들이 생기와 활력의 돌파구가 되길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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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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