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건축이 삶의 자세와 태도를 바꿔내는 물적 대상'이라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특히 종교 건축은 인간과 절대자 사이의 관계를 규정짓는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는 물적 대상물이다. 또한 새로운 모습의 건축물을 짓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생각과 삶을 열어가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덕수궁 돌담을 끼고 도는 고즈넉한 길에 들어선다. 이곳은 한때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던 낭만의 길이었다. 길은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이들로 늘 활기차다. 이들에게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무게를 지닌, 전혀 다른 생각과 삶을 요구하는 새로운 사상이 폭풍처럼 밀려들고 있을까?
 
옛 미국 공사관 주변 정동길. 그 한 켠에 자리한 정동제일교회와 그 뒷쪽으로 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가 보인다.
▲ 정동길, 조그만 교회당 옛 미국 공사관 주변 정동길. 그 한 켠에 자리한 정동제일교회와 그 뒷쪽으로 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가 보인다.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정동 길, 조그만 교회당

낭만과 젊음으로 활기찬 정동 길에, 조선 개신교가 첫 뿌리를 내린다. 미국 공사관의 존재 때문이다. 어느 가수가 "은은한 종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은 뜨거워진다"고 노래한 바로 그 길이다.

여기 등장하는 교회당이 정동제일교회다. 교회는 옛 미국공사관에서 덕수궁을 끼고 남측으로 내려 온 곳에 있다. 북측 언덕엔 이화학당이, 남측 언덕엔 배재학당이 자리한다. 아담하고 정갈해 보이는 교회당은 붉은 벽돌에 암녹색 지붕을 이고 있다.
 
주변에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좁은 골목길 사이로 초창기 정동제일교회 모습이 우뚝하다. 라틴십자가형 평면이 드러나 보인다.
▲ 초창기 정동제일교회 주변에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좁은 골목길 사이로 초창기 정동제일교회 모습이 우뚝하다. 라틴십자가형 평면이 드러나 보인다.
ⓒ 정동제일교회.org

관련사진보기

 
124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여러 건물이 덧붙어 다소 복잡해지긴 했지만, 1897년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겸손한 모습이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개신교 교회건축은 세 방향에서 한반도로 유입된다. 하나는 중국 동해에서 서해를 횡단하는 통로, 둘은 만주에서 남진하는 압록강 통로, 셋은 대한해협을 건너 제물포와 원산을 향해 북진하는 대한해협 통로다. 이 중 대한해협 통로를 통해 유입된 감리회, 장로회가 조선 개신교 교회건축 주류를 형성한다.
 
네모난 종탑과 암녹색 지붕, 붉은 벽돌이 돋보인다. 아담한 교회건축의 전형을 이룬 모습이 소박하다.
▲ 정동제일교회 전면 네모난 종탑과 암녹색 지붕, 붉은 벽돌이 돋보인다. 아담한 교회건축의 전형을 이룬 모습이 소박하다.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미국을 통해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정동제일교회는 미국 교회건축 양식을 당연하게 따라간다. 18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유행하던 '로마네스크 복고풍'으로 지어진다.

여기에 '반(反)형식주의'라니, 규정된 건축 양식만으로도 무척 난해하다. 한마디로 '장식적이고 고압적인 육중함을 배제하고, 신성불가침한 절대자의 권위를 함축적으로 품고 있는 아담한 건축물'로 보여진다.

중세 이후 교회건축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첨탑과 육중한 부벽(扶壁), 여러 현란한 부조와 문양,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표현되는 고딕 양식이 주류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딕 이전에 유행하던 건축 사조다. 따라서 정동교회는 최소한의 단조로운 상징성만 강조할 뿐이다. 고딕건축을 어설프게 흉내 낸 요즘의 그것들과는, 분명 커다란 차별성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개신교, 근대식 의료와 교육을 앞세워

개신교 선교 방식은 가톨릭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이들의 선교 활동은 무척 유화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교육과 의료를 앞세우고 심지어 최고 권력자를 설득해 나가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 또한 점진적으로 확보된 합법적인 공간을 통해 기독교 교리에 맞는 사회개혁과 계몽을 주창하기도 한다.

처음 개신교는 종교보다는 병을 치료해 주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통상조약 체결로 미국에 간 '보빙사절단'이 선교사 가우처를 만나면서 조선 개신교가 시작된다. 가우처 부탁으로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는 5000달러와 함께 일본에 있던 맥클레이에게 선교를 맡긴다.
 
정동에 모여 사진을 찍은 외국인들이다. 주로 외교관과 선교사들로 추정한다. 조선 군인의 모습도 보인다.
▲ 정동의 외국인들 정동에 모여 사진을 찍은 외국인들이다. 주로 외교관과 선교사들로 추정한다. 조선 군인의 모습도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관련사진보기

 
그가 고종에게 '병원과 학교사업 위주의 선교허락 요청서한'을 전달하자 1884년 7월 3일 이를 승인한다. 조선이 기독교에 문을 연 날이다. 맥클레이는 5000달러를 미 공사관에 맡기며, 이후 선교사 처소와 활동 공간 마련을 부탁한다. 개신교가 정동에 뿌리 내리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다.

'미 공사관 전속의(醫)' 자격으로 한양에 온 알렌이 갑신정변 과정에서 의술로 왕과 왕비를 사로잡는다. 이 일로 재동 홍영식 집에서 최초 근대식 병원이 탄생한다. 그가 설립한 왕립병원, 광혜원(廣惠院)이자 곧 제중원(濟衆院)이다.

스크랜턴 부부와 아펜젤러 부부, 언더우드가 함께 조선에 온다. 스크랜턴이 맥클레이가 맡겨 둔 돈으로 미 공사관 주변 한옥을 매입하고, 미국에서 의료기기를 들어 와 1886년 6월 施(시)병원을 연다. 그해 여름 창궐한 콜레라로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시대는 젊은이들의 생각과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 세운다. 종파와 무관하게 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라는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며 교육을 앞세우자, 영어와 서양의술을 익혀 출세하려는 젊은이들이 정동으로 몰려든다. 새로운 길에 대한 갈망이다. 스크랜턴은 그 중 두 학생을 선발한다. 조선 최초 근대식 교육의 출발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지어진 배재학당 동관. 지금은 배재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배재학당 동관 일제강점기인 1916년 지어진 배재학당 동관. 지금은 배재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이에 고무된 아펜젤러가 학교 설립 허가를 얻어 한옥을 매입, 1886년 6월 7명 학생으로 학교를 연다. 하지만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 한 학기를 버텨내지 못한다. 이에 박해 위협을 제거할 이벤트로, 덕수궁 연못에서 왕과 왕비가 참관하는 스케이트 대회를 개최한다.

이에 왕이 1887년 2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조선 최초 고등교육아카데미의 탄생이다. 이 학교 출신 4명이 전신국에 벼슬(종6품)을 얻자 소문이 퍼져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몰려든다.

스크랜턴 부인이 문을 연 이화학당(梨花學堂)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후 정동 일대는 '협성회'를 통해 사상과 계몽을 선도하는 중심공간으로 변모한다. 학생운동의 시작이자,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민단체의 발돋움이다. 젊음이 만들어낸 힘이다.

교회를 짓고

아펜젤러는 한발 더 나아가, 기독교를 선도하고 사회개혁을 도모할 인재 양성에 착수한다. 기독교 교리가 바탕인 사회개혁과 계몽을 위한 조치다.

개교 첫해 조선인 2명이 세례를 받아 이들 중심으로 종교집회가 시작된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1887년 9월 상동에 초가집을 구입, 조선인 신자만의 공간을 마련한다. '벧엘 예배처소(Bethel Chapel)'의 탄생이다. 10월 들어 이곳에서 조선인 4명이 참석한 최초 예배가 거행되고, 여신도에게 첫 세례가 이뤄진다.
 
100주년 기념탑과 1897년 지어진 교회가 같이 보인다. 교회 경역은 많은 건축물들로 빼곡하다.
▲ 정동교회 100주년 기념탑과 1897년 지어진 교회가 같이 보인다. 교회 경역은 많은 건축물들로 빼곡하다.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추수감사절엔 신자가 더 늘어 여신도를 비롯한 몇몇이 세례를 받는다. 성탄예배 때는 한글로 쓴 설교문을 아펜젤러가 읽기도 한다. 벧엘 감리교회가 공식적으로 성립되는 순간이다. 이 신앙공동체는 1888년 포교금지령으로 이화학당과 아펜젤러 사택으로 옮겨, 남녀를 구분해 예배를 한다. '정동제일교회'의 탄생이다.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겪으며 백성들은 서양 교회가 안전한 피신처라 여기기 시작한다. 청일전쟁이 끝날 무렵 정동교회 신자가 200명을 넘어서, 큰 예배당이 필요해진다. 그해 12월 28일 조선 감리교 지도자들이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고, 헌금을 약정한다.
 
벽돌쌓기 한 벽 사방에 단순화된 커다란 고딕식 아치창을 내었다. 네모난 종탑과 삼각 박공지붕을 만들고, 붉은 벽돌로 마감하여 상징성을 강조하였다.
▲ 교회 외관 전면 벽돌쌓기 한 벽 사방에 단순화된 커다란 고딕식 아치창을 내었다. 네모난 종탑과 삼각 박공지붕을 만들고, 붉은 벽돌로 마감하여 상징성을 강조하였다.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1895년 8월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10월 입당식을 거행하고, 마침내 1897년 12월 26일 봉헌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회건축이 마무리된다.

교회는 삼각형 박공지붕과 종탑으로 수직성을 강조하고 평면은 삼랑식(三廊式) 라틴십자가형, 내부는 주랑(柱廊) 쪽에 설교단을 둔 구조다. 벽돌쌓기 한 벽 사방에 단순화된 큰 고딕식 아치창을 내, 자연채광이 교회 안을 환하게 비추도록 하였다.
 
정동제일교회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계단이 2021년 8월엔 공사 중이다.
▲ 교회당 옆 계단 정동제일교회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계단이 2021년 8월엔 공사 중이다.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붉은 벽돌로 마감한 예배당 밖은 상징성을 강조하였고, 내부를 둘러싼 흰 회벽은 순결과 거룩함을 상징한다. 지붕은 함석이고, 위화감 없는 15.15m 높이 네모난 종탑은 유럽 전원풍 복고 양식이다.

신자가 500여 명으로 불어나자 1926년 교회를 증축한다. 이때 십자가형 양 날개 부분으로 공간을 넓혀 지어 교회는 네모난 모양으로 변한다. 다만, 십자가형 당초 평면은 살려 두었다.

정갈하게 남은 교회는 이제 정동길 명소가 되었다. 조선에 처음 뿌리내린 개신교의 이상과 정신을 고이 간직한 곳이다. 이 교회의 존재는 이미 124년 전 이곳에서, 전혀 다른 생각과 삶을 열어가겠다는 선언이 이뤄졌음을 뜻한다.

그러나 예쁜 교회를 보면서, 다시 질문을 던져 본다. 지금 우리에게 기독교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투영되어 있는가? 절대적 존재에 순응하듯 그에 부합하는 합일의 생활 자세와 태도를, 기독교는 진정 구현하고 있는가? 교회의 존재처럼, 복음으로 문명과 사회를 개혁해 내려했던 그 정신만은 부디 올곧게 간직하고 지켜나가길 빌어본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