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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제주의 리사무소는 육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번듯하다. 자택에서 이장업무를 보기도 하는 육지와는 달리 상근인력까지 두고 있다.
▲ 소길리 사무소 제주의 리사무소는 육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번듯하다. 자택에서 이장업무를 보기도 하는 육지와는 달리 상근인력까지 두고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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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가깝게 지내는 후배가 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고향인 제주로 귀향해 농사를 짓고 산다. 처음 제주로 이주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때 이 후배를 만나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같은 애월읍에 살고 있어 심심찮게 만나 회포를 풀기도 하는 사이다.

이 친구가 얼마 전 이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대인관계도 좋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마을 일에도 열성적으로 나서는 스타일이었다. 거기다가 육지에서 직장생활을 한 경력도 있고 해서 농촌에서 이장 일을 하기에는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당연히 당선되리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만났더니 이장 선거에서 낙선했다는 것이다. 평소 마을 사람들과도 폭넓게 교류했고 자신이 노력해온 걸 생각하면 무난히 당선될 줄 알았는데 결과는 의외로 낙선이었다는 것이다. 2파전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자신보다 젊은 후보에게 고배를 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대의 '궨당' 파워에 밀린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장의 힘

궨당(괸당)이란 친인척을 뜻하는 제주어로, 넓은 의미로 이웃도 포함된다. 제주도는 자연재해가 심하고 농사짓기에도 척박한 섬이라는 특성상 상부상조하는 문화가 발달했다. 고씨 부씨 양씨로 상징되는 씨족집단이나 집성촌 사람들의 응집력은 아마도 전국에서 단연 최고일 듯하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손님 접대를 며칠씩이나 계속하는 풍습도 이런 궨당 문화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제주 사회에서 이런 궨당 문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게 바로 선거다. 궨당들의 지원 없이는 국회의원이고 도의원이고 힘들다는 건 제주에서는 상식이다. 제주에는 여당도 없고 야당도 없고 오직 궨당만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 배경이다.

오늘 만난 후배에게 도대체 이장이 뭐길래 궨당 파워까지 동원할 정도로 선거전이 치열하냐고 물었다. 사실 리(里)는 기초행정 단위라 할 읍면동(邑面洞)의 하부에 속한다. 자연마을을 중심으로 생겨난 주민자치조직의 성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장은 권력이나 권한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마을을 위해 봉사하는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제주에 정착한 이후 지역 언론을 통해 보고 들은 사건이나 이장 선거를 경험한 후배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장에 대한 상식적인 생각은 적어도 제주도에서는 맞지 않는 듯하다.

읍장과 동장이 같은 위상이므로 읍장 아래 이장은 도시로 치면 동장 지휘를 받는 통장에 해당한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이장이 통장은 물론, 동장보다도 실제 위상이 훨씬 높아 보인다. 대도시의 구청장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동장보다도 실질적인 파워가 더 세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우선 외형적으로 리(里)사무소부터가 다르다. 내가 본 제주의 리사무소는 모두 2층 건물이다. 지금 사는 소길리 리사무소를 찾아간 적이 있는데, 번듯한 2층 건물이었다. 이장실이 따로 있고 사무실에는 상근 직원이 근무한다. 상근 직원은 준공무원 급으로 보통 사무장 직함을 갖고 있다. 리사무소 주차장도 널찍하다. 직원도 많고 민원인도 많아 항상 북적거리는 대도시의 주민센터(동사무소)에 비하면 한적한 리사무소이지만 외형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느낌이다.

소길리 리사무소에 찾아간 것은, 당시 마을 부근에 채석장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에 대한 우려와 반대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이장이 부재중이어서(정확히는 집에서 농사일하고 있던 때여서) 개발위원장인가 하는 분을 만났었다.

그날 리사무소를 둘러보니 부서들이 많았다. 힘 있는 부서로 알려진 개발위원회를 비롯해 환경위원회도 있고, 청년회·부녀회·목장조합 등도 보였다. 충청북도의 한 시골 이장인 사촌 동생이 사무소는커녕 자택에 팩스기 하나 들여놓고 혼자 업무를 보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리사무소 건물만 낯선 게 아니다. 리마다 자체 운동장이 있어 마을 체육대회 같은 행사를 치른다. 인조 잔디가 깔리고 관중석을 갖춘 번듯한 운동장을 리마다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리에 운동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사는 소길리나 이웃의 유수암리 고성리 광령리 용흥리 등 주변 다른 리에도 빠짐없이 준수한 마을 운동장이 있다.
 
제주의 웬만한 리마다 잔디구장과 관람석이 구비된 자체 운동장을 보유하고 있다.
▲ 고성1리 운동장 제주의 웬만한 리마다 잔디구장과 관람석이 구비된 자체 운동장을 보유하고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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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이장이 육지와는 다른 위상을 과시하는 것과 관련해 목장조합이 요즘 주목받고 있다. 제주의 중산간에는 각 마을의 공동목장이 있다. 말 그대로 말이나 소를 키우는 농가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목장이다. 집에서 가까운 노꼬메오름 주변에서도 유수암리와 소길리, 장전리의 공동목장을 볼 수 있다.

요즘 제주 중산간 숲 속에는 리조트나 골프장이 숱하게 들어섰다. 개발업자들이 이 지역 땅을 사들여 조성한 것이다. 과거 공동목장이었던 땅도 이렇게 개발된 곳이 많다.

애월읍의 한 리에서는 공동목장을 30억 원에 팔아 리 재정에 큰 보탬이 됐다고 한다. 목축에 종사하는 사람도 줄어들어 얼마 안 되는 사정을 고려해 처분했다는 것이다. 한때 헐값이었던 중산간의 넓은 목장지대가 개발 바람을 타고 금싸라기 땅이 된 셈이다.

개발업자가 땅을 사들여 사업을 하려고 할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이장의 협조다. 대규모 개발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인근 주민들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이때 사업자 측은 주민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하고, 마을 발전기금을 내겠다는 약속도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장의 역할이 지대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제주 중산간지대에는 각 마을의 공동목장이 있는데, 최근 들어 개발붐을 타고 관광레저시설로 개발되는 사례가 많다.
▲ 유수암 공동목장 제주 중산간지대에는 각 마을의 공동목장이 있는데, 최근 들어 개발붐을 타고 관광레저시설로 개발되는 사례가 많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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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제주의 리사무소는 육지의 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전기금 같은 재산도 많고, 그 대표인 이장의 역할은 막강하다. 그래서인지 이장선거를 둘러싼 갈등 사례가 지역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이장 자리 놓고 법적 다툼까지

조천읍 선흘2리에서는 17만 평 규모의 동물테마파크 사업을 둘러싼 갈등으로 주민들이 두 쪽으로 갈라져 법적 다툼을 벌였다. 마을주민들이 임시총회를 열어 동물테마파크 사업에 협조적이었던 이장 해임안을 압도적으로 통과시키면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이장은 7억 원의 발전기금을 조건으로 사업자 측과 상호협약서를 체결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장 선거 무효 판결이 난 구좌읍 동복리의 경우도 비슷한 케이스다. 이장 선거에서 위장전입자가 투표권을 행사했다고 해서 법적 다툼 끝에 무효 판결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마을 공동목장에 30만 평 규모의 사파리월드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사업자 제안을 둘러싸고 말이 많았던 터였다.

이외에도 조천읍 함덕리와 교래리, 한림읍 협재리, 구좌읍 김녕리 등 곳곳에서 개발사업을 둘러싼 주민들 간의 갈등으로 이장 해임과 선거 관련 소송 사태가 벌어져 지역 언론에 보도됐다.

한 전직 이장은 이장을 둘러싼 분쟁은 주로 수익 사업을 운영하면서 이장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명관광지나, 개발사업이 진행되거나 마을회 자산이 많은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곳일수록 이장선거가 치열하다는 것이다.
 
대규모 수익사업이나 개발사업이 진행중인 지역일수록 이장 선거전이 치열하다.
▲ 한경면 신창 해안도로의 풍력발전단지 대규모 수익사업이나 개발사업이 진행중인 지역일수록 이장 선거전이 치열하다.
ⓒ 임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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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인구가 적고 사업부지도 없는 지역은 이장의 권한도 크지 않기 때문에 이장 선거가 그리 치열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이장에게 지급되는 활동비만 해도 지역 특성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난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의 경험담을 통해 제주의 궨당과 이장직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과장된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궨당'이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았던 시절의 생존법이었다면, '이장 선거'는 이제는 부자(?)가 된 제주 시골 마을의 21세기형 생존법인지도 모르겠다. (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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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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