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에어컨 설치 나로서는 적과의 동침이라는 결심을 한 것이다.
▲ 에어컨 설치 나로서는 적과의 동침이라는 결심을 한 것이다.
ⓒ 황승희

관련사진보기


입추가 지났다. 나는 비염이라 아침에 함부로 창문을 열었다간 하루를 콧물로 고생한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가을이 여름을 덮쳤다. 고 며칠을 못 참고 얼마 전에 나는 에어컨을 샀다. 우리 집에 그분이 오신 날, 에어컨 냉기 세례의 축복보다는 '살까 말까?' 매년 여름 그 고민에 종지부를 찍은 감격이 더 컸다.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에어컨이 없을 때는 가만히 있어도 덥더니 에어컨을 켰을 때는 가만히 있으면 춥다. 에어컨 없을 때는 더워서 죽을 것 같더니 에어컨을 켰어도 움직이면 더웠다.

"찬공기 알레르기세요. 겨울엔 실내에서 따듯하게 지내시고요, 여름엔 에어컨 안 좋아요."

환절기마다 달고 사는 감기에 동네 내과에서 들어야 했던 의사의 처방이었다. 이미 코로나 한참 전부터 나의 사계절 마스크는 또 하나의 의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더운 여름에 에어컨을 피할 이유까지는 없었다.

퇴사도 에어컨 때문?!

에어컨 냉기가 싫어진 건 대략 40대 중반 정도부터인 듯하다. 혼자 운전할 때도 에어컨을 틀면 반드시 차문 유리를 살짝 내려서 더운 공기를 섞어야 했다. 문제는 마스크로는 감당이 안 되는 빵빵한 에어컨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그해에는 에어컨 피할 데가 없어서 화장실 빈 변기 위에서 잠깐 쉬었던 진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퇴사 이유의 하나는 에어컨 냉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화학 약품 분자들이 나의 몸을 쓸어대는 느낌. 날카로운 미세한 칼가루 같은 것이 내 살로 파고드는 통증이랄까. 시원하다가 춥고 열이 나고 머리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쌍화탕 한 박스쯤은 데워야 할 것 같은 그 몸살기. 남극 빙산 속에 내가 거기 들어있는 느낌이다.

그런 내가 내 집에 에어컨을 들이다니. 나로서는 적과의 동침이라는 결심을 한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선풍기도 남들보다 늦게 꺼냈고 한 일주일 정도 틀면서 '에어컨을 이제라도 살까' 고민하다 보면 아침저녁으로 시원해지곤 했더랬다.

올해는 진짜 덥고 계속 덥다. 혹시 내가 건강해져서 추위를 잘 안 타는 걸까? 0.1초 기쁜 상상을 했다. 열대야가 20여 일 앞당겨졌다는 뉴스를 안 봤다면 계속 착각했을 것이다. 여하간에 그 뉴스를 명분 삼아 지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운전할 때처럼 역시 자연바람과 섞어줘야 했다. 에어컨을 틀고도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열어보니 에어컨 냉기가 무용지물이 되고 조금만 닫으면 신기하게도 춥다. 설정온도 28도와 27도라는 고작 1도 사이에도 나에게는 롤러코스터 같은 체감온도가 있다. 평소 카페에서도 정신 사납게 겉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이유이다. 나는 혹시 엑스맨? 0.1도의 온도차 감지가 가능한 초능력 돌연변이 인간 온도계 슈퍼히어로? 아니, 그냥 젠장할 체질이로다.

전기세를 아끼려고 설정온도 1도를 올리고 선풍기를 돌려보았다. 감자 삶는 솥 열기와 에어컨 냉기가 선풍기 바람에 엉켰다. 적도와 남극이 동시에 섞이지 않는 회오리로 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에어컨의 설정온도, 세기, 방향 그리고 자연 바람과 선풍기라는 다양한 옵션을 며칠을 실험해서 나한테 맞는 상태를 찾아내었다. 학생 때에 진작 이렇게 실험했으면 서울대 가서 과학자가 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어서 오세요. 여기 에어컨 앞 시원한 자리로 앉으세요"
"아니에요, 가장 안 시원한 데가 어디예요?"


내가 식당으로 들어서면 벌어지는 대화다. 추위를 잘 타다 보니 생활습관도 바뀌었다. 에어컨 가장 먼 자리, 대중교통보다는 개인 차량, 긴 옷과 담요를 챙기느라 짐이 많다. 그래도 외롭지는 않다. 내 친구는 퇴근해서 반드시 온수로 샤워를 해줘야 종일 강제 복용한 에어컨 냉기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했다. 에어컨 냉기를 무한대로 섭취가 가능한 아들과 남편에게 거실을 내어주고 작은 방을 서식지 삼는다는 지인의 이야기도 위로가 되었다.

"왜 모두 이렇게 에어컨을 세게 트는 거지? 에어컨이 약한 작은 공간 좀 해놓지. 여긴 사장이 젊어서 그래. 사장이 나이 들었거나 나처럼 아파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온통 차게 할 수 없을 텐데."

그렇다. 이해의 앞에는 언제나 경험이 있다지 않나. 그 반대일 수는 없다. 사실 나도 예전의 내가 보지 못하던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에도 냉수 샤워를 했던 경험이 일천한 지난날의 내가 에어컨을 피해 다니는 나를 상상이나 했겠나.

허리가 아프고부터는 너무 좋아하는 단골 식당에 못 가게 생겼다. 왜냐면 거긴 좌식이라서다. "디스크 환자를 배려해서 테이블이 몇 개 있으면 좋을 텐데." 이것은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함정에 빠진 것인가? 소수자에 대한 공감능력의 확장인가?

지하철에 한두 개라도 비만인을 배려, 대형 좌석 설치를 요구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사회는 소수 소비자의 성향을 어디까지 공감해줄 수 있을까.

노인, 장애인, 외국인, 임산부에게 불편한 좌식 식당이 의자로 교체되는 사회현상처럼 나 같은 에어컨 불편한 사람, 추위 잘 타는 중년 여성을 배려하여 에어컨이 작게 미치는 공간도 마련해주는 카페와 극장이 언젠간 생길까? 비용 측면의 관점보다는 인간애라는 관점이 상식이 되는 시대가 언젠간 올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조기 은퇴 후, 돈 안 되는 텃밭농사꾼. 최소한의 벌이만을 위해 노동하는 백수형 프리랜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