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죽음이 삶에 스며들 때>는 독일의 한 이비인후과 의사가 쓴 에세이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찰하면서 간발의 차이로, 때로는 어이없는 이유로 생의 울타리를 훌쩍 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메디컬 에세이라고 해서 나는 병원 내의 긴박하고 급박한 상황, 치열하면서도 인간미 느끼는 좀 더 걸쭉한 농축액 같은 글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생각만큼 감동 드라마도, 울고 웃기는 자극적인 글도 아니다.

맛으로 치면 원재료 맛을 듬뿍 살리고 조미료는 최대한 배제한 요리를 먹는 기분이랄까. 무덤덤하고 담담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그 담담함 속에서 이것이 인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담담하게 자신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던 경험을 해본 적 있는지. 정작 이야기하는 자신은 무덤덤한데 말이다.
 
<죽음이 삶에 스며들 때>
 <죽음이 삶에 스며들 때>
ⓒ 위즈덤하우스

관련사진보기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나라나 독일이나 병원 내 풍경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의료진이 아니어서 우리나라의 실제 병원의 현실을 정확히 안다고 볼 수 없지만, 인력에 허덕이는 긴박하고 급박한 응급실 풍경이랄지, 의료진에게 진상을 피우는 손님들, 상명하복 식의 의료계 조직문화나 궂고 싫은 일은 서로 떠맡기려는 얄미운 동료들에 대한 불편함은 독일에만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 따위는, 자칫 사람의 목숨을 날릴 뻔 했던 아찔한 경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안다며 눈 감고도 수술해도 될 만큼 자신감에 차서 메스를 휘두른 순간, 그때 그 메스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실제 이 책의 작가도 그런 경험을 하고 식은땀을 흘려야했던 경험을 적기도 했다.
 
"...모두 숨을 죽였다. 오직 한 마음으로.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앞에 누운 한 인간의 위력과 대체불가능성과 유일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생의 신비는 연약하다. 1밀리미터 두께의 코 혈관 하나가 남은 생을 결정한다. 한 아이가 학교에 가고 방학을 맞고 해변에 놀라가고 공부를 하고 밤에 혼자 다락에 올라가 울고 실연의 아픔을 겪고 부모가 될 수 있을지를 결정한다. 그 순간 우리는 운명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p. 214)
 
어디 그런 경험을 작가만 겪었으리. 나 역시 내가 잘 안다고 자부하며 얼마나 숱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살아있는 목숨을 다루는 의사로서, 메스를 쥐고 있는 의사로서 좀 더 겸허하고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저자를 좀 더 나은 의사로 성장시키는 힘이 된다.

의사에게 '연민'은 무엇일까

아무리 갖은 애를 다 썼지만, 그저 맥없이 삶의 끈을 놓아버린 환자 앞에서 의사가 겪어야 할 감정에 대한 혼란과 고민도 솔직하게 담겨있다. 흉부압박을 해도 되살아나지 않는 심장 박동. 그리고 더 이상 흉부압박을 한다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손을 멈췄을 때의 의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연민일까, 체념일까. 아니면 해볼 만큼 해봤다는 자기 위안일까.

작가는 의사 초년생 시절, 죽음 앞에서 겪어야 했던 연민과 동정, 무덤덤함의 혼란에 대해서도 썼는데, 환자가 죽었을 때 '이 상황에서 연민의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표현해 놓았다. 인간적인 연민이야 왜 없었을까. 그런 연민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그의 삶이 너무 휘청거릴 것이다. 그런 감정에 무뎌지고, 둔감해지는 자신에 대해서도 씁쓸하게 자조어린 표현을 한다.

의료진의 '바른 마음'이란 무엇일까. 어디까지 연민해야 하고, 어디까지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할까. 아마 저자 자신은 그런 현실에 무뎌지지 않기 위해, 이런 글을 써왔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한끝 차이. 문을 사이에 둔 안과 밖에 있고, 들고 나는 호흡에 있다. 이런 사실은 머리로는 잘 아는데 살면서 자꾸 잊어버린다.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한다. 아니, 머리로 잘 안다는 것도 변명 아닐까. 머리로 제대로 잘 아는 것은 가슴으로도 절실하게 느끼는 법이니까. 인간이라는 동물은 머리 따로, 마음 따로는 아닐 테니.

이 책은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다. 독일인들이 그만큼 좋아한다는 얘기다. 국민성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 있지만, 냉정하고 이성적인 독일인들이 좋아할만한 책인 것 같다. 죽음을 몹쓸 것이나 부정적인 것으로 단정하지도 않고, 삶을 무조건 신비롭고 환희스러운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누구나 언제든지,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이유로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삶을 좀 더 겸허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죽음이 삶에 스며들 때>라는 이 책의 제목은 얼핏 보면 으스스하다.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것 같지만, 죽음은 내 눈앞에 보이는 타자화된 객체가 아니라, 그냥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을 더 사랑하고, 지금 여기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죽음이 삶에 스며들 때 - 젊은 의사가 수술실에서 만난 기적의 순간들

라이너 융트 (지은이), 이지윤 (옮긴이), 위즈덤하우스(2021)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