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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산에 대한 체험과 생각이 다른 친구들이 셋 있다. 한 친구는 시간이 날 때는 물론이고, 바쁠 때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산을 찾는다. 코로나 이전에 크로스핏으로 항상 몸을 단련하던 친구여서 40대 후반에도 체력이 좋아 부러운 친구다. 또 한 친구는 첫 번째 친구만큼의 체력은 아니지만 자신의 체력이 허락하는 한 산에 오르려고 노력한다.

나는? 나이 탓을 하며 산에 오르기를 그만 둔 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산에 오르는친구들이 산에 오를 때마다 보내오는 풍광과 땀에 흠뻑 젖은 얼굴 사진을 볼 때면 함께 산에 오르기라도 한 듯 정상에 오른 희열을 간접 체험한다. 잘 알지만 희미해진 추억의 맛은 더 고소한 법이니까.

이 친구들이 무더위가 한풀 꺾이면 함께 한라산에 오르자고 한다. 한라산이라니. 오르는데만 4~5시간, 왕복 10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등반을 50이 다 된 이 저질 체력으로 가능할까. 평소 숨쉬기 운동이 운동의 전부인 마지막 친구 K가 제일 먼저 경기를 일으켰다. 공은 나에게 돌아왔다. 네 명의 친구들 중 최근에 가장 산에 오르지 않은 이는 K와 나뿐이니, 가능 여부를 알려줘야 했다.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누가 뭔가 하는 것을 관람하는 쪽보다는 내가 직접 해 보는 쪽을 선호하는 부류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운동하는 것을 좋아해서 첫 부임지였던 시골에서도 또래 교사들과 꾸준히 헬스와 수영을 했고 테니스도 배웠다. 게다가 배드민턴 교사 동호회에 (작은 키로도) 배구 교사 동호회까지 따라다녔던 나름 화려한(?) 운동 이력을 가졌다. '과거'에는 말이다.

운동을 좋아한다니 온 몸이 탄탄한 근육질의 건강한 여성이 그려져야 마땅하겠지만, 난 운동을 해도 근육이 잘 안 붙는 체질이다. 매우 억울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40대 이후 급속히 근육 손실이 늘었다. 

몸을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근육 운동 위주로 하라는 남편의 조언에 여성 전용 헬스클럽에 다닌 지 3년이 넘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코로나 이전의 상황. 코로나 이후 사람이 모이는 곳을 피해 운동하던 친구들은 산을 찾았는데, 나는 '운동 올스톱'해 버렸다. 

근육이 많은 사람들은 운동을 조금 쉬어도 유지가 되던데, 근육이 별로 없던 나는 근육 노화가 더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다. 궁여지책으로 하던 걷기는 근손실을 보충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운동 시간은 줄고 앉아 있는 시간은 늘다 보니, 목과 어깨 결림, 무릎 관절 약화, 체력 저하 등 서서히 여기저기 몸의 불편함이 생겨났다.

항상 건강검진을 하면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4살 정도 적게 나왔는데, 작년에는 2살로 줄었다. 올해는 2살 더 많다고 나올까봐 겁난다. 이대로는 안 되었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래서 중단했던 헬스를 다시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짐(gym)은 체온 측정 및 운동 전 손세정제 사용, 운동하는 내내 마스크 필수 착용 등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운영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돌아와 운동을 계속 할 걸. 다시 운동을 시작한 날, 인바디 체크를 해 보니 내 몸 상태는 4~5년 전 처음 이 짐을 찾았던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30대 이후 매년 1%씩 근육량이 감소합니다.'

짐 내부에 부착된 운동 안내문. 몇 프로 유지해 보겠다고 그렇게 다녔었는데. 아, 사라진 내 소중한 근육들을 어찌 보상 받는단 말인가. 체지방은 약간 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악화 상태이지만, 약간만 늘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렇게 운동을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라산 등반이라니. 과거 운동 좀 해 본 입장으로서 못하겠다고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존심이 내 몸을 한라산 꼭대기까지 데려다 줄 리는 없잖은가.

대학 수학여행 코스 중 하나가 한라산 등반이었다. 한창이던 20대 초반에도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게 이어지던 완만한 경사길을 5시간 가까이 걸어야 비로소 허락되는 백록담과의 상봉. 그때 나이를 2배 하고도 몇 살 더 먹은 지금,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백운대 가는 길 이정표. 저는 어렵지 않지만 오래 가는 길이 더 맞는 사람입니다.
 백운대 가는 길 이정표. 저는 어렵지 않지만 오래 가는 길이 더 맞는 사람입니다.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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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주말에 시험 삼아 북한산에 올라봤다. 평소 걸리던 운동 시간 40여분 정도가 되니 몸이 알아서 반응을 해 왔다. 오늘 할 만큼 했다, 그만하면 됐다, 오늘만 날이냐... 백운대까지 오르겠다던 당초 목표는 내 마음의 소리에 희석된 지 오래였다.

그때 내 앞에 아빠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가 보였다. 이제 갓 4살이나 되었을까. 도대체 저 아이의 아빠는 아이를 어떻게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걸일까. 설마 아이 스스로 40여 분을 걸어왔을 리는 만무하고. 그 후로 30여 분 더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아이 덕분이었다.

20대 때 한라산 등반길에서도 숨이 턱까지 차올라 한 걸음도 더 나아가기 어렵겠다 싶었을 때, 하산하던 분들이 정상까지 20분 남았다던 말 덕분에 더 힘을 낼 수 있었다(실제로 그 후로도 2시간 정도 더 걸렸지만 ㅠㅠ). 한 발 더 앞으로 내디딜 용기를 얻는 것은 자주, 모르는 이들의 의도치 않은 도움일 때가 많았다.
 
사진을 당기면 버들치가 보여요. 바위 색이랑 동색이라 잘 안 보일라나요.ㅠ
 사진을 당기면 버들치가 보여요. 바위 색이랑 동색이라 잘 안 보일라나요.ㅠ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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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목표했던 백운대는 성공하지 못했다. 같이 오자던 내 말을 못 들은 척 하더니 눈치가 보였던지 몸보신 시켜주겠다며 남편은 오리탕을 끓이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 얼른 내려오라는 남편의 성화 전화 때문이었다(이것 때문이라고 난 자꾸 우긴다). 목표 달성은 못했지만 오랜만에 맡은 산 공기는 신선했고, 계곡 물은 맑디 맑았다. 1급수에만 산다는 버들치를 본 게 몇 만 년 만인지.
 
"물이 얼겠어" 사진. 물이 얼음장처럼 시원해서 30분이나 머물렀어요
 "물이 얼겠어" 사진. 물이 얼음장처럼 시원해서 30분이나 머물렀어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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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계곡 물에 양말을 벗고 두 발을 담갔더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 맛에 산에 오르는 거지. 산에 오르는 친구들이 자꾸 사진을 찍어 보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계곡 물에 담근 내 발을 사진 찍어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송하며 "발이 얼겠어" 하고 문자로 놀렸더니, 남편은 소파에 누워 에어컨 바람 앞에 올린 발을 찍어 "난 편해" 하는 문자와 함께 보내왔다. 그래, 당신과 나, 이렇게 취향이 달라도 여태 잘 버텨왔으니 앞으로도 큰 탈없이 살아갈 것이다. 어쩌나 보게 백년해로해 보자.

만만치 않았던 하산길은 계곡의 천국 맛을 싹 잊게 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첫 술에 배부르랴. 오늘 이만큼 올랐으니, 다음엔 더 오를 수 있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간 한라산 백록담과도 다시 만나지겠지. 친구가 보내 준 시 한 편을 다시 되뇌며 다짐해본다. 나이는 나무처럼  내 안에 새겨야겠다고. 내년엔 나무처럼 더욱 울창해지겠다고.
 
 나무 학교         
- 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중략)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재될 글입니다.


태그:#북한산, #등산, #나무처럼 나이 먹기, #운동,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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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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