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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기자말]
머체왓 2코스 소롱콧길에 조성된 편백나무숲의 쉼터
▲ 편백낭쉼터 머체왓 2코스 소롱콧길에 조성된 편백나무숲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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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차 제주에 온 딸과 함께 머체왓숲길을 찾았다. 아직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날씨를 고려해 너무 힘들지 않고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코스를 물색한 끝에 얻은 결론이 머체왓이었다.

머체왓은 돌더미(머체)로 이루어진 밭(왓)이라는 뜻이다. 돌이 많은 제주 자연의 특성이 이름에 오롯이 담긴 숲길인데, 제주 여행을 좀 해봤다는 사람도 생소한 이름이다.

남원읍 한남리에 소재한 머체왓숲길은 2012년 정부의 친환경 녹색길 조성사업에 응모하면서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만든 숲길이다. 넓은 목장을 따라 펼쳐진 자연환경을 그대로 활용한 게 특징이다. 목장의 한가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숲길을 걷고,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도 바라볼 수 있어 지루하지 않은 길로 조성했다.

이런 머체왓숲길도 자칫하면 골프장이 될 뻔했다. 인근에 리조트가 생기면서 이곳에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사업자 측에서 무척이나 '노력'했다고 한다. 당시 8가구가 이곳 한남리 공동목장에서 소를 키우고 있었다. 4월부터 11월까지는 공동목장에서 소를 방목하다가 겨울에는 집으로 가서 키우는 식이었다.

사업자 측은 관련 행정 부서와 주민을 상대로 설득작업을 벌였으나 주민들이 일치단결해 이를 무산시켰다. 이런 대형 개발사업을 둘러싸고 마을주민들이 찬반 양측으로 갈라져 갈등과 분열의 후유증을 앓는 마을이 제주도에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한남리 주민들은 '똘똘 뭉쳐서' 달콤한 유혹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머체왓에서 만난 한남리 전직 이장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오름이나 휴양림보다 찾는 이 적은 편
 
머체왓숲길은 이 목장 외곽에 조성됐다. 목장 일대는 골프장이 들어설 뻔 했으나 한남리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대신 숲길이 생겼다.
▲ 머체왓 목장 머체왓숲길은 이 목장 외곽에 조성됐다. 목장 일대는 골프장이 들어설 뻔 했으나 한남리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대신 숲길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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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체왓숲길은 머체오름의 남쪽 자락 일대 해발 250~450m에 조성됐다. 탐방로는 총 3곳으로 머체왓숲길(1코스, 6.7㎞), 소롱콧길(2코스, 6.3㎞), 서중천 탐방로가 있다. 1코스와 2코스는 서중천과 접하는 1.3㎞를 공유하고 있으며, 서중천 탐방로는 안내자가 있어야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어 대개는 1, 2코스를 답사하기 마련이다.

이 숲길은 유명한 오름이나 휴양림보다 찾는 사람이 아직은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숲길을 조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한남리 마을 차원에서 관리하는 숲길이어서 널리 홍보가 되지 않았던 탓으로 보인다. 그래도 입소문이 나서 최근 들어 찾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2018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은상)을 받았다니 그 진가를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한 것 같다.

처음 머체왓 숲길을 찾은 것은 2019년 6월, 마을 이웃 4명이 동행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예상보다는 시설이 훌륭했다. 주차장과 방문자센터, 식당, 화장실, 안내판 등이 갖춰져 있었다. 주차장 위로는 야트막한 머체왓 동산이 펼쳐져 정감어린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평일이어서인지 탐방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머체왓 주차장 위로 펼쳐진 동산은 가을이면 메밀꽃밭으로 변신한다.
▲ 메밀꽃이 만발한 머체왓 동산 머체왓 주차장 위로 펼쳐진 동산은 가을이면 메밀꽃밭으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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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체왓 1코스는 공동목장을 중심으로 탐방로를 조성했다. 목장 바깥쪽으로 숲길을 내 탐방객들이 목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초반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되는 입구 표지를 보지 못하고 넓은 풀밭 사이로 난 길을 가다 보니 목장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잘못 들어섰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당 부분 걸어온 터여서 계속 목장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원래 한남리는 마을 면적의 약 70%가 초원지대여서 옛날부터 목축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소들이 임신 중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팻말도 보였다.

목장길을 한참 걷다가 1코스 숲길을 만났다. 중간에 제 코스로 접어든 것이다. 잠시 망설였다. 앞으로 남은 코스를 마저 걸을 것인지, 아니면 숲길이 시작되는 초입으로 되돌아갈 것인지? 안내 지도를 보니 1코스의 남은 구간은 상당 부분이 2코스와 겹치는 길이었다. 미련 없이 숲길 입구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출발지점을 향해 가는 역방향의 숲길이 정겨웠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곱딱한(아름다운) 길이었다. 동백나무 편백나무 조록나무 소나무 등이 울창한 숲길을 이뤘다. 산딸기도 흔해 우리 일행 모두가 실컷 따먹을 수 있었다. 새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숲길, 꽃나무들이 내뿜는 향기에 취했고, 산딸기 따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숲길이 시작되는 입구로 나와서 보니 이 길을 왜 놓쳤나 싶다. 올레길보다는 길 표식이 덜 보이기는 했지만, 길을 잘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목장길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져 숲길을 가리키는 팻말을 미처 보지 못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1코스를 거꾸로 돈 셈이지만 소득도 있었다. 길을 잘못 든 덕에 목장길을 실컷 걸어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넓은 초지와 그 너머로 보이는 오름, 소가 임신 중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안내문. 울창한 숲길과는 또 다른 매력의 목장길이었다.

딸과 함께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머체왓, 오늘은 2코스를 걷기로 했다. 2014년에 추가로 길을 낸 2코스는 서중천 계곡을 따라 조성했다. 계곡의 지형이 작은 용(小龍)을 닮았다고 해서 제주어로 소롱콧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길 역시 대부분이 자연 그대로의 숲길이다. 다양한 나무들로 덮여 울창한 숲 터널을 이루고 있다. 1코스와 마찬가지로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한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서중천 계곡을 이루며 한남리 마을 사이를 지난다.
▲ 서중천 계곡 한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서중천 계곡을 이루며 한남리 마을 사이를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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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코스 소롱콧길은 1코스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출발해 서중천 일대에 형성된 울창한 숲길을 걷는다. 초입부터 경사가 나지막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걷기에 힘들지는 않을 정도여서 상쾌하게 숲을 즐기면서 걸었다. 이 숲에는 구실잣밤나무 동백나무 조롱나무 산딸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나무 이름을 알아가며 걷다 보면 심심치 않다.

이번에는 참꽃나무 군락지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육지에서는 진달래꽃을 먹는다지만 제주 사람들은 참꽃나무꽃을 먹는다고 하는 그 나무였다. 참꽃나무는 진달래과에 속하는데 개화기가 5월이다. 붉은꽃이 진달래를 닮았지만 키가 훨씬 크다. 내년 봄에 다시 오면 이곳 군락지의 풍경이 얼마나 화려할까.

계속해서 숲속에 난 길로 걷다가 잠깐 1코스 걸을 때 못 봤던 머체왓 옛집터에 들렀다. '머체골 집터 이야기'라는 안내판을 보니 내력이 적혀 있다. 예전에 목축업을 하던 문씨 김씨 송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4·3 당시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끝내 복귀하지 못하고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주4·3 때 불타 없어진 마을의 흔적을 보여주는 게 대나무밭이라고 한다. 그런데 머체골 집터에는 대나무와 함께 양하가 많이 보였다. 봄이면 양하 줄기를 먹고, 여름에는 잎으로 쌈을 싸 먹고, 가을에는 꽃대를 나물로 먹을 수 있어 초가집 둘레에 많이 심었다는 것이다.

돌무더기만 남은 집의 구조를 설명해주는 팻말들이 보이기에 자세히 살펴봤다. 안거리(안채) 밖거리(바깥채), 우영팟(텃밭), 올레 등이 보였다. 이 옛 집터에서 가장 흥미를 끈 건 다름 아닌 돗통(돼지우리) 혹은 통시(변소), 돗통시라고도 하는 '돼지우리 겸 변소'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아마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돗통시를 볼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사람이 방출하는 변을 밑에서 돼지들이 먹었다는, 전설적인 제주도 변소의 구조를 이 숲길에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나지막한 오르막길로 이어지는 소롱콧길은 자연림 숲을 지나 1960년대 제주도 산림녹화사업으로 조림한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소롱콧길의 반환점에 해당하는 편백숲에 이르니 치유의 숲으로 명명하고 벤치와 평상을 설치해 놓았다. 잠시 평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니 절로 심신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멋진 힐링 공간

편백숲을 돌아 내려오다 보면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중천을 지구 밖 풍경을 옮겨 놓은 듯하다고 묘사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용암이 흘러내리다 굳어져 생긴 기묘한 모양의 바위덩어리가 도처에 산재한 계곡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을 듯하다. 한라산 흙붉은오름에서 시작해 바다를 향해 흘러내리는 서중천은 100㎜ 이상의 비가 내려야 물이 흐르는 시원한 계곡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1코스와 겹치는 구간이다. 서중천에 바짝 붙어 내려가는 길이다.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쳐 놓은 줄도 보인다. 그만큼 계곡이 제법 깊다. 이 서중천 계곡의 물은 저 아래 한남리의 마을 사이로 지나간다고 한다. 올라올 때와는 달리 완만한 내리막길인 데다가 계곡 풍경을 내려다보며 걸으니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

계곡 길 중간에 '올리튼물'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오리가 뜬 물, 즉 커다란 물웅덩이에 오리가 둥둥 떠 있다는 뜻인데, 아무리 살펴봐도 오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엔 특히 겨울 철새인 원앙이 큰 웅덩이에서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내리막길이라 그런지 어느새 머체왓 주차장이 보인다. 오늘도 1코스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굳이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면 걸을 때 바닥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땅속에 흙보다 돌이 많아 나무뿌리들이 땅바닥으로 나와 어지럽게 뻗어 있어서 걸려 넘어질 수가 있다.
 
머체왓 입구의 족욕카페는 통유리를 통해 머체왓목장 일대와 멀리 머체왓오름과 한라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 족욕카페 전망 머체왓 입구의 족욕카페는 통유리를 통해 머체왓목장 일대와 멀리 머체왓오름과 한라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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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소롱콧길을 무사히, 유쾌하게 다녀왔다. 동행한 딸에게 소감을 물으니 그동안 걸어본 제주의 어떤 곳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길이었다고 한다. 숲길도 인공적으로 넓고 평탄하게 만든 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겨난 길이라 좋았고, 편백숲 쉼터도 멋진 힐링 공간이었다고 했다. 서중천 계곡을 감상하며 내려오는 길도 인상적이었다고.

주차장 앞에 있는 족욕 카페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고 차를 마셨다. 머체왓 답사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통유리를 통해 목장지대와 숲과 오름이, 그 뒤로는 한라산의 의연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였다. (2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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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의 언론계 생활과 7년의 대학 초빙교수 생활을 끝내고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애월읍의 한 생태마을에 거주하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과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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