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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에서

한여름인데도 교실엔 가을철에나 입을 법한 긴 팔 티셔츠 차림의 아이들이 있다. 드물게는 모자가 달린 후드 티나 무릎 담요를 덮고 앉아있는 이들도 있다. 기온이 사람의 체온에 육박하는 폭염이 연일 계속되고 있는 교실 밖에선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교실에선 종일 에어컨이 가동된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 쉬는 시간엔 잠시 끄고 창문을 열었다가 수업 시작종이 울리면 다시 작동시켜야 하지만, 아이들에게 코로나는 멀고 더위는 가깝다. 방역을 위해 에어컨을 끄려는 아이와 끄지 말라는 아이의 실랑이도 흔히 볼 수 있다. 

교실이 춥다는 아이와 덥다는 아이. 방역지침을 충실히 따르려는 아이와 융통성이 필요하다는 아이. 둘 중 어떤 아이의 주장이 받아들여질까. 이든 저든 반 아이들끼리 대화와 타협, 토론 등을 통해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렇게 해결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긴다.' 모든 반의 한결같은 결정 방식이다. 교실 내에서, 시쳇말로 '껌 좀 씹고, 침 좀 뱉는' 아이가 춥다면 에어컨을 끄고 덥다면 켜게 된다. 추상 같은 방역지침을 지키는 것조차 '목소리 큰'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다. 

물론, 그들은 대개 몸집이 커서 에어컨 바로 아래에서도 선풍기를 자기 쪽으로 고정하기 일쑤다. 여름철 에어컨이나 선풍기처럼 함께 나눠 써야 할 물건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독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실 내에서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못한다. 

그들의 전횡에 맞서기보다 그냥 자구책을 마련하는 쪽을 택한다. 아이들이 긴 팔 티셔츠나 무릎 담요를 따로 챙겨오는 것도 그래서다. 그렇다고 담임교사에게 달려가 고통을 호소할 수도 없다. 그랬다간 자칫 친구들로부터 지질하다며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러한 '교실 생태계'를 모르는 담임교사는 없다. 매일 조회나 종례 때마다 훈화를 늘어놓지만, 아이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조악한 비유일지언정, 군대에서 후임병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사단장도 연대장도 아닌,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는 선임병인 것과 같다. 

담임교사로서 학급 운영의 열쇠는 '목소리 큰' 소수를 '작은 목소리'의 다수가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있다. 권리든 의무든 각자의 몫만큼만 누리고 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목소리 큰' 소수의 전횡을 묵인하는 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도록 돕는 일이 될 것이다.

# 교차로에서
 
배달직원이 도시락을 배달하고 있다.
 배달직원이 도시락을 배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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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에 신호를 기다리며 많은 차량이 늘어서 있다. 퇴근 시간이라선지 왕복 6차선 간선도로의 갓길까지 꽉 찼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사이로 배달 음식을 실은 알록달록 스쿠터들의 행렬이 눈에 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그나마 신호 앞에 멈춰서는 스쿠터는 열에 한둘이다. 대부분은 좌우를 살피고 요리조리 차선을 넘나들며 쏜살같이 교차로를 빠져나간다. 그들은 '도로 위의 무법자'로 불린다. 운전자들은 곡예 운전을 일삼는 그들을 안전 운전에 가장 큰 위협 요소라고 이구동성 말한다. 

그들은 교차로든 건널목이든 신호를 무시하고 굉음을 내며 내달린다. 그들이 무시로 내는 굉음은 이른바 '폭주족'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주목해달라는 것.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겨를이 없으니, 다른 차량이 알아서 피해 가라는 무언의 협박이다. 

내 차 앞에 특정 배달업체의 상호가 큼지막하게 적힌 스쿠터 한 대가 서 있다. 방금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었으니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스팔트 위 동동 구르는 발과 연신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노라니 다급하고 초조해하는 라이더의 마음이 읽힌다. 

차에서 내려 그에게 얼음물이라도 한 컵 건네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족히 열 대가 넘는 스쿠터가 내 옆을 지나갔지만, 빨간 신호등 앞에서 멈춘 라이더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내 앞 라이더도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촉박한 배달 시간에 쫓겨 신호를 무시한 채 내달리는 다른 동료 라이더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배달 건수가 수입과 직결되는 일인데, 신호를 지키는 자신만 손해라고 여기진 않을까. 그의 투철한 '준법정신'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그때 조수석에 앉아있던 지인은 그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자일 거라고 말했다. 아직 요령이 없어서 그런 것일 뿐, 동료들과 수입을 비교하다 보면 차츰 익숙해질 거라 단언했다. 그가 말한 요령과 익숙함이란 '안전하게 신호를 무시하는 법'을 말하는 것일 테다. 

라이더들이 신호를 지킬 수 없게 만든 주범이 촉박한 배달 시간과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수당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배달 건수와 수입이 연동되는 상황에서 '도로 위의 무법자'가 줄어들 것 같진 않다. 신호를 어길수록 수입이 늘어나는 환경에선 백년하청이다. 

신호가 바뀌고 내 앞 스쿠터가 서둘러 출발했다. 열에 여덟아홉인 도로 위의 무법자들을 단속해 처벌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차라리 내 앞 라이더의 '준법정신'을 상찬하고 북돋울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전에 말이다. 

# 당혹스러운 그들의 사과와 위로 

한 달 전 광주의 한 카페 사장에게 보낸 공개 편지의 여진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한 지인이 내 주장에 공감한다는 글과 함께 해당 기사를 SNS에 게시했다가 느닷없는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직후 카페 사장이 인신공격성 답장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거다. 

정작 그가 놀란 건, 카페 사장이 보낸 답장의 제목에 '단톡방 성희롱을 당한 심정으로'라는 표현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황당한 내용은 차라리 부차적이라고 했다. 제목에 성희롱이라는 단어가 버젓이 들어가 자칫 그가 성희롱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오해받게 될까 우선 걱정했다. 

당장 그의 이름과 성희롱이 연관 검색어로 떴다. 충격을 받은 그는 서둘러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변호사는 법적인 대응이 마땅찮다며 차라리 관련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해당 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했다. 자칫 진흙탕 개싸움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천신만고 끝에 그의 이름과 글은 삭제됐지만 찜찜함은 그대로 남았다. 그는 SNS에 글을 게시하는 것조차 상대방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이 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더욱 서글펐던 건, 진흙탕 개싸움에선 늘 순한 사람이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었다. 

그 카페 사장을 찾는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조국 전 장관의 '좌표 찍기'와 일부 여권 지지층의 전화 폭탄에 대해 사과하고 위로하기 위해 현역 국회의원과 여당의 대권 후보까지 직접 카페를 방문했다. 그들은 쓴소리를 귀담아듣겠다며 카페 사장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난 그들의 사과와 위로가 당혹스럽다. 그들은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카페 사장을 직접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지만, 나를 향한 숱한 욕설 전화에 대해선 일언반구조차 없다. 정치인들에게 카페 사장의 주장이 쓴소리로 칭송된다면, 그의 주장을 반박한 내 글은 뭐가 되나. 

얼마 전 카페 사장과 꽤 긴 시간 통화를 했다. 말이 통화지, 일방적으로 그는 말했고 나는 들었다. 말할 기회도 없었지만, 그의 억지 주장에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그와 정치인들이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을 보며, 내 주장이 통째로 부정당한 것 같아 속상할 따름이다. 

SNS에 글을 게시했다가 느닷없이 봉변을 당한 지인도, 며칠간 쉴 새 없이 전화 폭탄에 시달린 나도 푸념하듯 말했다. "대권 후보조차 찾아가 사과하는 마당이니 애초 그의 주장에 토를 단 게 잘못"이라고. 수많은 이들이 내 글에 공감과 지지를 보냈지만, 학교든 사회든 '순한 다수'는 '거친 소수'를 당해내지 못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 관련기사 
 - 그땐 노무현 탓이라더니, 이젠 모든 게 문재인 탓? http://omn.kr/1tz8o
 - 광주 카페 사장님 비판 후... 학교로 쏟아진 전화 폭탄  http://omn.kr/1u2u0
 - [반론] 그땐 노무현 탓이라더니, 이젠 모든 게 문재인 탓? http://omn.kr/1ua7g 
 

태그:#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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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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