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사진이 들어간 예술 관련 책들을 작업해 보긴 했지만 건축 책, 그것도 장장 460여 장의 사진과 도면이 들어간 책을 편집해본 건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책을 많이 내신 노련한 저자분이셔서 문장도 수려하고 내용도 탄탄해 교정보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460여 장이나 되는 방대한 사진을 글과 어떻게 잘 어우러지게 하는가 였다.
큰사진보기
|
| ▲ "뮤지엄, 공간의 탐구" / 이관석 지음 /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 |
| ⓒ 최정미 | 관련사진보기 |
르코르뷔지에, 안도 다다오, 프랭크 게리 등 전 세계 11인의 건축계 거장이 지은 개성적이고 화려한 박물관과 미술관 사진들을 축소하기엔 사진이 너무 아까웠고, 사진을 키우려다 보면 글과 사진이 잘 어우러지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글은 한정되어 있지만 해당 글에 딸린 사진이 7, 8개 이상 넘어가는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고민 끝에 사진을 너무 축소하면 책이 답답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펼침면 페이지에 글 없이 사진만 들어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사진을 가능한 한 시원하게 넣는 걸로 디자이너와 합의를 봤다. 중요하지 않은 사진은 축소하고, 중요하거나 비주얼이 괜찮은 사진은 한 면을 차지하게 키우는 식으로 작업했다.
본문 시안을 확정하고 나서 디자이너가 처음 조판한 교정지는 신국판보다 큰 크라운판으로 편집했음에도 500페이지가 훌쩍 뛰어넘었다. 올컬러인 데다 500페이지가 넘으면 너무 무겁고 가격 부담도 많을 것 같아 다시 사진 크기를 조정해 450페이지로 줄였다. 100여 페이지를 줄여서 2교지가 나오는 대로 저자분께 교정지를 보내드렸다.
교정지를 받아보신 저자분은 40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니 부담스러워서, 사진 크기를 더 축소해 400여 페이지로 줄이면 좋겠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주셨다. 사진을 축소하면 글과 사진이 다 밀려서 디자이너가 재작업해야 하는 고충을 아시고는 많이 미안해 하셨는데, 저자분이 지나가는 말로 하신 한 마디가 촌철살인처럼 내 뇌리에 박혔다.
"이 책은 도판이 강조되어야 하는 미술책이 아니라 건축책입니다."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이 책은 사진이 강조되어야 하는 미술책이 아니었다. 건축가의 건축 철학이 담긴 뮤지엄의 특성과 설계 원리를 담은 건축책이기에 사진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설명글에 사진이 잘 어우러져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히려 저자분께 편집에 대해 한 수 배운 기분이었다. 초심으로 돌아가 어떻게 편집하는 것이 독자가 보기에 가독성이 좋을지 고민하며 사진 크기를 본문 글에 맞춰 축소했다. 그렇게 축소하다 보니 이번에는 100여 페이지가 다시 줄어들어 352페이지가 나왔다. 확정된 페이지에 저자분도 만족하셔서 그다음은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뮤지엄, 공간의 탐구> 작업을 하면서 건축책 편집에 대해 많이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보수적인 뮤지엄 건축에 도전한 건축가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며 나 역시 많은 자극을 받았다.
저자의 스승이기도 한 앙리 시리아니를 비롯한 건축계 거장들이 뮤지엄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애플의 슬로건 "Think different(다르게 생각하라)" 광고판에 현대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얼굴이 등장할 정도로 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애플에 경영 원칙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가 지배하던 시대에 뮤지엄이 "파괴해야 할 공동묘지", "시체보관소"라는 비난까지 받으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는 것은 이 책을 작업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지난 시대의 뮤지엄을 게으르고 시대착오적인 낭비로 여겼던 시대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린 건축가들의 정신은 비단 건축계뿐 아니라 경제경영, 정치계 등 각 분야에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본받아야 하는 자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