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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대구에 갔다가 소문 듣고 찾은 식당에서 9000원 하는 '영양 홍합밥'을 먹고 왔다. 홍합은 분지 지형의 대구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닐 뿐더러 지금은 제철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구를 대표하는 대구 10미(대구따로국밥, 막창구이, 뭉티기, 동인동찜갈비, 논메기매운탕, 복어불고기, 누른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식당 옆에 소설가 김원일의 문학전시체험관인 '마당깊은 집'이 자리하고, 인근 근대 문화 골목에 볼거리가 워낙 많다 보니, 점심시간이면 대기표 받아 가며 손님들이 찾아드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운 때에 제일 더운 지역으로 일컬어지는 대구에서 토박이들은 무얼 먹으며 한여름을 날까?'

궁금하던 차에 잠시 짬이 나서 대구를 대표하는 전통시장, '서문시장'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대구 3.1운동길 벽면에 전시된 '서문시장'의 옛 사진을 재촬영하여 편집한 것이다.
 대구 3.1운동길 벽면에 전시된 "서문시장"의 옛 사진을 재촬영하여 편집한 것이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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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문시장은 조선 후기 삼남 지방(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세 지방을 이름)에서 가장 컸던 시장으로 강경, 평양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에 꼽힌다. 원래 대구읍성의 북문에 장이 섰으나,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서문으로 이전하게 됐고, 이때부터 '서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대구광역시 중구 큰장로26길 45에 자리한 서문시장 앞 육교에서 바라본 시장 동문 일대 풍광이다. 2015년 4월, 대구지하철 3호선인 모노레일이 개통되면서  서문시장역이 생겼고, 서문시장으로 가는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한다.
 대구광역시 중구 큰장로26길 45에 자리한 서문시장 앞 육교에서 바라본 시장 동문 일대 풍광이다. 2015년 4월, 대구지하철 3호선인 모노레일이 개통되면서 서문시장역이 생겼고, 서문시장으로 가는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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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이며, 당시에는 2일과 7일마다 장이 섰다고 한다. 250만 명이 사는 도시 중심지에 위치한 서문시장은 2만7062㎡의 면적에 9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으며, 약 50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는 대규모 상설시장으로 변모해 있다.

이 더위에 너도나도 찾는 음식
 
서문시장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뉴스에 자주 등장한 대형 화재 사건이다. 아니나 다를까 4지구 화재로 인한 확장 이전을 알리는 점포들의 현수막이 시장 곳곳에 붙어 있다.
 서문시장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뉴스에 자주 등장한 대형 화재 사건이다. 아니나 다를까 4지구 화재로 인한 확장 이전을 알리는 점포들의 현수막이 시장 곳곳에 붙어 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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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매우 덥지만 습하지 않아 국수 생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고, 제분·제면 기기 도입에 있어 선구적인 곳이란다. 자연건조 방식으로 국수를 생산하던 호시절에는 전국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을 정도였고, 여전히 전국에서 국수 소비가 가장 많은 도시이기도 하단다.

이렇다 보니 서문시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은 '국수골목'이었다. 1지구와 4지구를 연결하는 고가 통로 아래에는 잔치국수, 찹쌀수제비, 손칼국수, 밀수제비, 칼제비, 콩국수 등을 파는 노점들이 늘어서 있다.

외지인인 내게는 대구 향토 음식인 '누른국수(잔치국수)'를 손에 든 손님들이 먼저 보였다. '누른국수'란 멸치 육수에 콩가루와 밀가루로 만든 소면을 넣어 끓인 것을 말한다. 

치자물을 들인 것처럼 노란색을 띠는 국수 면발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식사처마다 낯선 장면이 포착됐다. '판매대마다 커다란 대접에 청고추가 수북이 쌓여 있고, 쌈장이 가까이에 왜 놓여 있을까?'

대구 토박이분께 연유를 물으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손님이 따로 청하지 않아도 대구에서는 으레 청고추와 쌈장이 밑반찬용으로 제공된단다. 대구에서는 이 더운 여름에 뜨거운 국물 요리로도 모자라서 매운 고추까지 곁들여 먹고 있었다. 땡초와 달라서 그다지 맵지 않다는데... 그래도 고추는 고추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점심으로 먹은 홍합밥에도 잘게 썬 청고추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 홍합밥만으로도 간이 맞고 충분히 매콤했는데, "고추를 잘게 다진 양념장을 넣고 비벼야 맛있습니다"라고 먹는 팁을 알려 주던 식당 사장님 말씀이 떠올랐다. 배추된장국을 먹고 나서 혀끝에 남는 알싸함 또한 고추가 숨은 맛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문시장 식당골목에 들어서니 칼국수를 직접 밀고 있었다.
 서문시장 식당골목에 들어서니 칼국수를 직접 밀고 있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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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 식당골목에 들어서니 30년 영업 중이라는 식당 사장님은 손으로 민 밀가루 반데기를 칼로 썰어 칼국수를 만들 준비 중이었다.
 서문시장 식당골목에 들어서니 30년 영업 중이라는 식당 사장님은 손으로 민 밀가루 반데기를 칼로 썰어 칼국수를 만들 준비 중이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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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을 찾은 건 오후 2시 반을 넘긴 때였다. 점심을 먹고 찾았지만, 곳곳에 넘쳐 나는 먹거리의 유혹이 만만치 않았다. 지나가는 손이 아니고 머물다 가는 객(客)이었다면, 온종일 이 집 저 집 다니며 맛집 탐방순회로 발에 불이 났을 게 틀림없다.

한 그릇도 배달... 서문시장 상인들을 응원합니다

국수 골목에서 시장 상인분께 길을 물어 좁다란 '서문시장 식당 골목'에도 들어서 봤다. 국숫집이 얼추 반은 돼 보였다. 기계로 뽑은 시판용 칼국수가 종류별로 많을 텐데, 이곳에서는 직접 손으로 반죽하고 밀어서 칼로 썰어 끓여내는 방식을 고수하는 가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고집스런 수고를 하는 까닭을 칼국수 좀 먹을 줄 안다는 사람들은 다 안다. 사람 손 닿은 칼국수는 면발마다 요철이 있어 입안에서 씹는 맛과 재미가 배가 된다는 것을. 맛으로만 승부하는 이 골목에서 몇 십 년씩 영업해오는 가게가 많다는 것은 몸속 회로가 작동할 때마다 이 골목을 찾고 또 찾는 손님이 많다는 방증이리라.

가격도 화끈했다. 이런 정성과 수고로 만들어진 손칼국수가 4000원이다. 잔치국수는 3500원, 비싼 축에 드는 찹쌀수제비가 5000원, 100% 국내산 팥을 쓴다는 팥칼국수가 7000원으로 가장 비쌌다.
 
수제비 한 그릇을 쟁반에 얹어 배달을 나가는 시장 상인의 모습은 생생한 삻의 현장을 느끼게 한다.
 수제비 한 그릇을 쟁반에 얹어 배달을 나가는 시장 상인의 모습은 생생한 삻의 현장을 느끼게 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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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흥미진진한 서문시장의 일부만 둘러보고 급히 귀가를 서둘러야 했다.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느리적 느리적 거북이걸음으로 귀갓길에 오르는데, 네모난 쟁반을 들고 바삐 배달을 가는 상인 한 분이 옆을 스쳐 간다.

밀수제비가 청고추, 쌈장과 함께 쟁반 위에 올라 있다. 그런데 달랑 한 그릇뿐이다. 장마철 무더위에 4000원 하는 수제비 한 그릇을 배달하기 위해 잰걸음으로 사람들 틈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비수기인데다 코로나19로 생업에 타격이 만만찮을 텐데.

덤으로 얻은 마지막 코스에서 대구 근대문화유산만큼이나 소중한 이 지역민의 자랑거리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수차례에 걸쳐(검색을 해보니 자그마치 네 번이다, 1967년, 2005년, 2014년, 2016년) 발생한 화마 속에서도 불꽃처럼 다시 일어나 삶의 터전을 지켜온 서문시장 상인들이다. 그 저력으로 무더위도, 비수기도, 코로나19도 물리치며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태그:#서문시장, #잔치국수, #불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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