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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시절 연필깎이가 고장 난 적이 있다. 그날 밤 우리는 필통 속 연필을 들고 아빠 앞에 모여 앉았다. 아빠는 소복이 쌓인 연필을 하나씩 칼로 다듬어 주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연필을 필통에 담을 때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풍선 하나가 들어간 듯 마음이 뻐근했다. 아빠를 생각할 때면 그날이 자주 떠올랐지만, 그때마다 나는 늘 어린 아이가 되어 연필 깎는 아빠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가 생기고 부모의 자리에 서면서 그 기억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가 바뀌었다. 어린 나에게서 빠져나와 내 등 뒤에서 그걸 지켜보다 조금씩 아빠를 향해 자리를 옮겼던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아빠의 등 뒤에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본다. 아빠의 몸속으로 들어가 연필을 깎던 그의 손이 되고, 그의 눈이 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상상만 한다. 가지런히 연필을 다듬어 아이들의 손에 쥐어 주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행복했을까.

어린아이들은 어떤 것들을 쉽게 믿어버린다.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며 긴 시간을 산다. 우리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건 순전히 우리 자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었으니까, 보이고 들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으니까. 순수했던 우리 자신이, 그랬으니까.
 
아니 에르노 '다른 딸'
 아니 에르노 "다른 딸"
ⓒ 1984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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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은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죽은 언니'에게 쓴 편지글이다. 에르노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그의 어머니가 어느 젊은 여자에게 죽은 '딸'이 있음을 밝히는 이야기를 엿듣는다. 대화는 "그 아이는 쟤보다 훨씬 착했어요"라는 말로 끝나고, 그 일은 에르노의 내면에 어떤 믿음을 새긴다. "착하지 않은 아이."(p.17)

'당신'(죽은 언니)의 죽음은 부모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어린 에르노는 부모의 고통은 모른 채 그들의 희망과 꿈을 실현하는 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자신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젊은 여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던 건 자신에게 어떤 암시를 주려는 행위였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되돌아간 기억의 자리에서 그녀는 그동안 믿어왔던 것과 조금 다른 조각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죽은 딸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 듯한 느낌과 위로'를 경험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죽음의 순간으로 돌아감으로써 애도했을 것이다. 메멘토 모리. 그 순간 다른 딸(아이 에르노)의 존재는 잊히는 게 자연스러웠다.
 
내가 <남자의 자리>를 쓸 때, 현실에 보다 가깝게 쓰려는 마음을 갖지 않았더라면, 지난 세월 동안 당신을 가둬두었던 내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당신이 다시 올라올 수 있었을까요? - 70p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을 돌아보면서  <남자의 자리>라는 소설을 쓴다. 그 과정에서 '서로 상관없는 개별적인 사건'이라고 여겨졌던 '두 가지 현실 – 당신의 죽음과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필요한 경제력'이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왔고, 나는 당신을 대치했다는 사실"(p.70), '당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이 가능했다는 깨달음은 에르노에게 어떤 그늘을 드리웠을까. 부재하기에 증오할 수도 애정할 수도 없는 존재, '당신'을 향한 감정은 '백지 같은 감정'이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글을 쓰면 쓸수록 마치 꿈을 꾸듯 이끼만 잔뜩 돋은 인적 없는 습지에서 걸음을 내딛는 듯하고, 단어들의 틈새를 헤치고 나아가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을 넘어가야 할 것만 같아요. 내겐 당신을 위한 언어도, 당신에게 말해야 할 언어도 없으며,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인 비존재 상태로 있는 당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정과 정서의 언어 바깥에 있는 당신은 비언어입니다. - 61p

그렇기에 '당신'은 비언어 상태다. 그녀의 삶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기에, 감정으로조차 표현할 수 없는 대상. 하지만 부모의 비밀스러운 고통 속에서, 그들의 삶을 통해 그녀에게로, 겹겹이 드리워진 천처럼 의미의 층을 쌓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 의미를 글로 풀어낸 것이 <다른 딸>이다. 사진 한 장으로 비롯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이쪽저쪽에서 뜯어보다가 잊혔던 것 또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씩 주워 들고 퍼즐처럼 끼워 맞추는 글. 기억하려고 애쓰고, 그 속에 침잠해야지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이 작은 책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당신'을 부르며, 그와 얽힌 과거의 시간으로, 그 기억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녀는 쓰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기억의 편린을 찾아낸다. 글쓰기는 기억의 유실물을 발굴하는 일이다. '다른 딸'을 향해 쓰기 시작했던 편지는 내가 죽을 뻔 했던 기억에 닿고, 어머니에 대해 계속 말해주려는 행위가 되어, 부모님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이 된다.

그 일은 '당신'을 부름으로 되살려내고, '당신'의 죽음 위에 놓인 삶의 부채감을 덜어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가 '존재의 부재'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되었음을, '다른 딸'은 '당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부재하는 '당신'의 주변을 맴돌며, 드리워진 천을 하나씩 들춰가며, 아니 에르노는 '텅 빈 형체'를 언어로 바꾸어낸다.

기억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일 수 있다. 어떤 문을 여느냐에 따라 기억으로 향하는 풍경이 달라진다. 에르노는 수차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글을 썼지만, 매번 다른 문을 통해 들어갔다. 아버지, 어머니, 자기 자신, 그리고 죽은 언니. '당신'이라는 문을 열었기에 볼 수 있었던 장면, 그 회로로만 통하는 의미가 <다른 딸>에 쓰였다. 기억이라는 지도 없는 목적지를 향해갈 때,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를 향해 불을 밝히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명암은 바뀔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기억의 빈 구멍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몇 장 안 되는 기억의 사진을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바짝 움켜쥐고 부재하는 그의 주변을 맴돈다. '당신'을 부름으로 온전한 '내'가 되었던 에르노처럼, 그 일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일 테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의 이브토, 카페 겸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문학을 공부한 후, 정식 교원, 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1974년 <빈 옷장>으로 등단해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수상했으며, 자전적인 글쓰기와 역사, 사회를 향한 작가만의 시선을 가공이나 은유 없이 정확하게 담아내는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다. 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한 여자>, <부끄러움>, <세월>이 있다. - 저자 소개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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