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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1891년 5월 지을 당시의 모습을 오롯하게 간직하고 있는 주한 영국대사관 제1의 집.
▲ 현재 영국 대사관 1891년 5월 지을 당시의 모습을 오롯하게 간직하고 있는 주한 영국대사관 제1의 집.
ⓒ 주한 영국대사관 공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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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이상을 한 곳을 지키며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 있다. 바로 덕수궁 뒷편 주한 영국대사관이다. 옛 미국 공사관도 건재하나 대사관저로 사용 중이다.

전 세계로 식민지를 확장하던 영국은, 끊임없이 남하하는 러시아와 곳곳에서 마찰을 빚는다. 터키에서의 충돌과 인도를 보호하려 침공한 아프가니스탄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다시 동아시아다.

청나라 직접 지배는 무리라는 사실을 서구 열강은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영국도 인도 지배에 만족하며 청을 중심에 놓는 경제적 이권 확보에만 주력한다. 두 차례 아편전쟁 후 여타 열강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통상과 영향력을 극대화시킨다는 '그림자 전략'의 일환이다. 배후조종만으로 청을 지배하려는 식민화 전략이기도 하다.
  
거문도 사건 당시, 서도 주민들과 영국 군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
▲ 거문도 사건 거문도 사건 당시, 서도 주민들과 영국 군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
ⓒ 디지털여수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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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게 조선은 거문도에 군항(軍港)을 설치하기 좋은 나라일 뿐이다. 시장잠재력이 훨씬 큰 일본 개항조차 고려하지 않은 영국이다. 중국이 1순위, 2순위는 일본이다. 영국의 관심은 오로지 영국-인도-중국을 잇는 안정적인 시장 확보와 유지에 있다. 종주권을 쥔 중국을 배후에서 잘 조종하기만 하면, 조선에 대한 경제적 이득도 자기들 수중에 들어온다고 계산한다. 따라서 조선은 관심 밖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의 급부상으로 1870년대부터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다. 특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항 건설과 시베리아·연해주에 대한 식민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은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온다. 또한 중·러 갈등이 전쟁직전까지 내몰린 '이리(伊犁, 신장 위구르)위기'처럼, 러시아가 조선과 만주를 전격적으로 점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조선과 수교
  
숭레문에서 남산 방향 성곽에서 촬영한 1900년 경 한양 모습이다. 사진 좌중앙 숭례문과 인왕산 사이 정동에 각국 공사관, 영사관이 모여 있었다.
▲ 1900년 경 한양 숭레문에서 남산 방향 성곽에서 촬영한 1900년 경 한양 모습이다. 사진 좌중앙 숭례문과 인왕산 사이 정동에 각국 공사관, 영사관이 모여 있었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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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영국의 태도가 바뀐다. 일본과 러시아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린다는 정황이 뚜렷해지자, 중국의 종주권이 더 이상 조선을 보호할 수단이 되지 못 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하지만 러시아를 의식한 영국은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어느 누구라도 조선과 통상하기만을 기다린다. 미국이 나서자, 영국은 뒤로 멀찍이 나앉는다. 조선 내부도 미국 우선파와 영국 우선파로 나뉜다. 1882년 5월 미국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다.

그러자 영국이 즉각 수교협상에 나선다. 아시아 함대 사령관 윌리스(G. O. Willes)가 미국과 똑같은 내용으로 불과 보름만인 6월 6일 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은 체결되었으나 영국은 경제적 이익이 불충분하다고 여겨 잔뜩 불만에 사로잡힌다. 비준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 주청 영국공사 파크스(H. S. Parkes)는 조선을 압박할 구실을 찾는다. 독일과 짜고 비준을 6개월 미룬다. 애스턴(W. G. Aston)을 수차례 조선에 파견, 사전 정지작업을 벌인다. 임오군란 후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빌미가 된다. 장정으로 무역불균형은 물론 청의 본격적인 경제침탈이 이뤄져 조선은 경쟁이 극심한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파크스의 목적은 대영제국의 위상 확보와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대 조선 무역과 조선 내 영국인 지위보장에 커다란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1883년 10월 27일 직접 조선을 찾아 전권대신 민영목과 협상한다. 11월 26일까지 둘 사이 치열한 논의가 진행되나, 결국 국력에 따라 협상은 불평등한 쪽으로 귀결된다.

파크스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서신에 밝힐 정도로 만족스러워 한다. 1884년 4월 28일 다시 내한하여 김병시와 비준서를 교환하여 조선과 수교한다. 이로써 영국은 러시아의 조선 진출 저지와 경제적 이익을 취할 모든 명분을 얻는다. 수교 직후 영국은 한양에 총영사를 주재시키고, 주청 영국공사관의 지휘를 받도록 조치한다. 총영사로 애스턴이 부임한다.

영사관 건립

애스턴은 1883년 3월부터 공관 터를 물색하며 자신이 묵고 있던 집이 곧 팔릴 것이라는 정보를 얻는다. 그는 김옥균과 조선 외부(外府)로부터, 영국이 그 집 매입을 결정할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처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집은 관료 신석희(申奭熙) 소유다. 주변 위생 상태가 불량하고 식수는 우물뿐이라는 단점도 있지만, 여러 동 한옥에 넓은 정원과 세 방면으로 언덕이 있어 전망도 좋다. 애스턴은 북경에 이를 보고한다. 본국 외교부는 가격이나 모든 조건이 좋다고 판단하나, 재무부가 제동을 걸고 나선다. 조선을 '몹시 불쾌한 곳'으로 간주한 재무부에 의해 예산 집행이 거절된다.

부지는 파크스가 조약 비준을 위해 한양을 방문한 때 해결된다. 파크스도 애스턴이 묵던 집에 머문다. 그도 가격이 싸다고 생각하여 서두른다. 1200멕시코 달러에 부지가격이 결정되지만 여러 곡절을 겪고서야 겨우 매매 계약이 체결된다. 파크스가 출국하기 하루 전, 1884년 5월 10일이다.

한옥 6개동에 넓이 10,393㎡인 정동 4번지에서 주조선 영국 영사업무가 시작된다. 한옥은 당장 쓸 수는 있으나, 그들 문화와 생활양식엔 부적합하다. 또한 낡아서 수시로 수리해야 하는 처지다. 건축적으론 사망선고다. 결국 파크스가 외무부에 공관신축을 건의한다. 하지만 본국 외무부와 재무부 시각이 다르다. 외무부는 지속 수리는 '공금 낭비'라는 진단을, 재무부는 조선에 공관건립은 회의적이어서 '개조'를 주장한다.

1880년대 말이 다가오자 외무부가 각국에 공관건립 추진을 결정한다. 동아시아의 모든 영국 소유 부지 관리주체는 상해 공무부다. 건축가들도 모두 이곳 소속이다. 공무부는 건축가들에게 설계 작업을 지시한다.

예비설계는 건축가 마셜(F. J. Marshall)에 의해 이뤄진다. 1889년 10월 설계가 완료되고, 1890년 초까지 자재를 준비하여 7월 19일에 힐리어 부인에 의해 정초석이 세워진다. 영사관 건립 대부분은 월터 힐리어(Walter C. Hillier) 총영사가 주도한다.

영국에서 제작해야 하는 강재(鋼材)를 제외한 나머지 자재는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철거한 한옥에서 나온 상당량의 화강암과 목재를 재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30만장 품질 좋은 붉은 벽돌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한양에서 납품 받기로 계약한다. 마셜은 본국에 여러 세세한 마감재를 요청한다.
  
주한 영국대사관과 그 주변을 높은 곳에서 바라 본 광경. 대사관 주위는 숲이 우거지고, 주변으론 덕수궁 여러 건물과 서울교구 성공회 성당 등이 보인다. 빨간색 표시된 부분이 주한 영국대사관이다.
▲ 주한 영국대사관과 그 주변 주한 영국대사관과 그 주변을 높은 곳에서 바라 본 광경. 대사관 주위는 숲이 우거지고, 주변으론 덕수궁 여러 건물과 서울교구 성공회 성당 등이 보인다. 빨간색 표시된 부분이 주한 영국대사관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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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에 가장 큰 어려움은 조선·중국·일본인이 뒤섞인 노동자다. 다행히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영사관 직원의 감독 지원으로 이를 해결한다. 제1의 집이 1891년 5월 지붕과 바닥공사를 마무리하고 준공된다. 제2의 집은 1892년 5월에 완료된다. 공관 건축 총공사비는 당초 예상보다 다소 증가하여 토지 225파운드, 건물 5,988파운드다.

영국식 건축으로
  
1910년 간행된 '한국풍경풍속사진첩'에 수록된 당시 영국 영사관 모습이다. 지금 모습과 똑 같다.
▲ 영국 영사관 옛 모습 1910년 간행된 "한국풍경풍속사진첩"에 수록된 당시 영국 영사관 모습이다. 지금 모습과 똑 같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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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의 집은 영국식 컨트리하우스에 청나라 양식과 르네상스 빌라의 구성을 가미한 특징을 보인다. 붉은 벽돌과 전돌을 사용하고, 전면 지붕은 박공이다. 1층과 2층 위아래에 크기가 다른 쌍 아치 4개를 배열시켜 대비효과를 노렸다.

아치 안으로 베란다를 두어 열주로 잇고, 측면은 크기가 다른 창을 내었다. 회색과 붉은 벽돌을 섞어 색채효과를 높이고, 부분적으로 활용한 장식 쌓기 조적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기법이다.

형상은 런던 스펜서 하우스(Spencer House, 1752∼54년에 건립. 18세기 팔라디오 양식의 저택)와 비슷하다. 박공은 그리 높지 않고 중앙에 원통형 환기구를 두었다. 각 없는 건물 모서리 처리가 특이하며, 지붕을 낮은 평면형으로 처리한 것도 특색이다.
  
1층과 2층의 아치 모양이 확연히 구분되고, 그리 높지 않은 지붕박공이 조화롭다. 색이 다른 벽돌로 색채효과를 높이려 했으며, 앞쪽 돌계단은 나중에 가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제1의 집 1층과 2층의 아치 모양이 확연히 구분되고, 그리 높지 않은 지붕박공이 조화롭다. 색이 다른 벽돌로 색채효과를 높이려 했으며, 앞쪽 돌계단은 나중에 가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 주한 영국대사관 공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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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는 베란다가 있고, 1층 내부에 큰 입구와 리셉션 홀이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 왼쪽이 총영사실이고 오른쪽엔 접는 문으로 연결된 응접실과 식당이 있다. 그 문이 마주 보이는 곳에 간단한 음식을 차릴 수 있는 방이 있고, 문 왼쪽에 부엌과 보일러실이 있다. 2층에 각각 네 개의 침실과 목욕탕을 배치했다. 바깥 뒤쪽은 하인들 숙소다.

2층의 네모난 건물인 제2의 집은 제1의 집과 모양과 용도가 조금 다르다. 1층은 사무 공간, 2층은 주거공간이다. 이 집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1902년 러시아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영일동맹이 맺어진다. 아울러 1903년 공사관 수비를 명분으로 군대주둔이 가능한 병영막사를 짓는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영국은 조선에서 모든 외교 기능을 철수시킨다. 1906년 영사관이 비워져 일본 관리로 전환된다. 이때도 영국은 원아이드 잭이었다.

덧붙이는 글 | - 사진 자료를 보내주신 주한 영국대사관 공보실 관계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영사관 건립과 관련하여서는 아래 문헌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개항기의 재한 외국공관 연구. 하원호·나혜심 외 4인. 동북아역사재단. 2009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발언. 2004.
근대 한불외교자료(1895∼1906). 이지순. 선인. 2018.
김정동교수의 근대건축기행. 김정동. 푸른역사. 1999.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김정동. 대원사. 2000.
대한제국의 해외공관. 홍인근. 나남. 2012.
서양인이 본 코레아. 박영숙 편저. 남보사연. 1998.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 1. 임석재. 인물과 사상사. 2010.
일본 속의 한국근대사 현장. 김정동. 하늘재. 2001.
정동과 각국 공사관. 이순우. 하늘재. 2012.
한국양식건축80년사. 윤일주. 야정문화사. 1966.
한영수교 100년사. 한국사역사연구회. 1984.

이 중 공관 겁립 관련은 주로, <개항기의 재한 외국공관 연구>(하원호·나혜심 외 4인. 동북아역사재단. 2009),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김정동. 대원사. 2000), <정동과 각국 공사관>(이순우. 하늘재. 2012)를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태그:#영국_영사관, #거문도_사건, #파크스, #애스턴, #스펜서_하우스_SPENCER_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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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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