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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인물화 그리는 재미에 빠져있다. 다르게 생긴 얼굴의 눈, 코, 입을 관찰하고 그리는 재미가 아주 크다. 몰입해서 그리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불안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연필을 쥐고 소묘를 한다.

현대물리학은 자연 만물이 원자들 모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원자 배열상태에 따라 인간도 되고 고양이도 되며 개도 되고 나무도 된다고 한다. 

살아있는 얼굴은 단 한 순간도 똑같은 모습이 아니다.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다. 그림의 묘미는 실체와 비슷하면서 실체와 똑같지 않은 그 차이에 있을 것이다.      
 
한 순간도 같지 않은 얼굴들
▲ 얼굴들 한 순간도 같지 않은 얼굴들
ⓒ 홍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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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모델은 개와 고양이를 제외하곤 언뜻 보면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 그리고 머리카락을 가진, 원자 배열 상태가 동일한 얼굴들이지만 실제로는 각자 다른 고민거리와 즐거움을 담은 다른 얼굴들이다. 

각자 얼굴에 그들만의 기쁨과 슬픔이 스며있듯, 내가 그린 그림에도 내 생각의 결이 그림자처럼 스며든 게 보였다. 심드렁한 표정이며 한눈을 팔며 무심해 보이는 듯한 눈빛이 강아지와 고양이 얼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양 철학사 최초 질문은 만물의 근원, 즉 물리에 관한 것이었다. 이 질문에 데모크리토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한 답을 찾았다. '관습에 의해 (맛이) 달고 관습에 의해 쓰며, 관습에 의해 뜨겁고 관습에 의해 차갑다. 색깔 역시 관습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원자와 진공뿐이다.' 세상은 텅 빈 진공과 그 속을 떠도는 원자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관습, 즉 인간 주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 ​<떨림과 울림> 김상욱 지음, 47쪽

가시적인 물체나 색깔이 우리 뇌의 주관적 산물이라면, 그림은 그리는 이의 주관을 오롯이 담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초상화에 음영과 그림자를 그릴 때 아무 생각없이 그렸다간 낭패를 본다. 가능하면 공을 들여 주의깊게 선을 그어야 한다. 먼저 선 하나를 가늘게 긋고 그 옆에 나란히 그은 다음 또 계속해서 나란히 긋는다. 리드미컬한 속도로 가늘고 길게, 짧고 굵게, 다시 역방향으로 선 긋기를 반복해야 한다. 
 
"눈이 같으면 코가 다르고, 코가 같으면 입이 다르고, 입이 같으면 얼굴빛이 다르고, 모두 같으면 키와 체구가 다르고, 키와 체구가 같으면 자세가 다르다. 나한들은 혹은 서고 혹은 앉고, 혹은 숙이고 혹은 옆의 것에 붙고, 혹은 왼쪽을 돌아보고 혹은 오른쪽을 돌아보고, 혹은 남과 이야기하고, 혹은 글을 보고 혹은 글을 쓰고, 혹은 귀를 귀울이고, 혹은 칼을 지고, 혹은 어깨를 기대고, 혹은 머리를 떨어뜨리어 근심하는 듯하고, 혹은 생각하는 듯하고, 혹은 기쁜 듯 코를 쳐들고 있다. 혹은 선비 같고, 혹은 관리 같고, 혹은 아녀자 같고, 혹은 무사 같고, 혹은 병자 같고, 혹은 어린애 같고, 혹은 늙은이 같다. 천 명이 모인 모임이요, 일만 명이 모인 시장 같다." -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107쪽, 설흔 지음

조선 정조시대의 문장가 이옥의 글을 전해 읽은 친구 김려는 이렇게 화답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이나 실상은 하나하나가 다른, 각자에겐 각자가 전부인 사람들"이라고. 

다 그린 초상화를 나열해보니 내가 살아온 시간들, 경험들이 그림속에 그대로 스며있는 듯하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학위가 필요할까. 그림을 그리는 데에 지식이 필요할까.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건 그저 삶의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태그:#차이와 반복, #얼굴들 , #초상화 , #선 긋기 ,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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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애호가, 아마추어화가입니다. 미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씁니다. 책을 읽고 단상글을 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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