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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군 공무직 노조 방문기 ①] '울릉도, 그 섬에 공무직 노조가 있다'에서 이어집니다.
 
늘 씩씩한 김나영 분회장.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늘 씩씩한 김나영 분회장.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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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공무직 노조를 만들고 지키고 있는 김나영 분회장에게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물었다. 어릴 때 특별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전 울릉도가 고향이에요. 남양에서 태어났어요. 아버님이 노가다 출신이에요. 그때는 다 어렵게 살았죠. 저도 울릉도 안에서 이쪽저쪽 전학을 다녀 배 타고, 걸어 다니고, 도동에서 살다가 천부에도 갔다가, 아버지 따라 살았죠. 부모님이 가난하니까 연년생 동생, 네 살 차이 동생들 곤로에 밥해 갖고 먹이고, 빨래도 하고, 멸치에 고추장 밥 멕이고, 도랑에서 빨래도 하고, 다 그렇게 컸어요.

아버님이 48년생. 노가다 재능이 있으니까 아까 오시다가 본 남양터널, 그 터널을 만들었어요. 그런 일 하면서 절 키워 준 거죠. 제가 2019년도에 암 투병하면서 아버지가 도움도 주시고. 고등학교 때는 마음고생 많이 시켰어요. 글쎄요. 이유 없는 반항?"

 
엄마는 병원에서 간호조무사 일을 하셨다. 현재 김나영 분회장이 간호조무사 일을 하게 된 것은 엄마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 우리가 아프다고 하면 엄마가 곤로 불에 남비를 올려 주사기를 뎁혀서 주사 놔 주고 그랬거든요. 그걸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야겠다 생각했고… 제가 병원에 다니니까 제 딸도 간호대를 가더라고요."
 

김나영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간호학원을 다녔다.
 
"간호사 하고 싶었는데 꿈을 못 이루고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고 대구 개인병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남편을 만나 애기 낳고 살다가 이혼하고. 울릉도가 고향이니까 어린애 키우려고 들어왔거든요."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으면 벌떡 일어선다
     
성불사 뒤로 보이는 송곳산. 울릉군은 이렇게 산 모양이 기기묘묘하다.
 성불사 뒤로 보이는 송곳산. 울릉군은 이렇게 산 모양이 기기묘묘하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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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씨는 서른두 살 무렵, 2005년 6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07년 5월에 울릉군청 보건의료원에 간호조무사로 입사했다.
 
하지만 일하면서 받는 차별 대우는 심각했다. 보건의료원 약국에서 일할 때는 단 몇 분도 앉을 시간 없이 점심 식사도 먹지 못하고 일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택배 약품들을 단 두 사람이 정리해야 했다. 담당 공무원은 퇴근을 해도 김나영씨는 그 다음 날 올 환자들을 위해 혼자 약 준비를 하고 약국 정리를 해야 했다. 공무원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대우는 열악했다.

2009년 11월 무기계약직이 됐지만 해가 갈수록 월급 차이가 많이 났다. 공무원은 국가에서 정해 준 초과근무 시간이 40시간인데 공무직은 10시간뿐이었다. 잔업도 한 달 동안 20시간 넘으면 안 되게 정해 놨다. 그래도 공무직 노동자들은 노조 만들 생각은 안 했다.

그런데 2019년 1월 2일 최저시급이 많이 오르면서 울릉군청은 무기계약직들의 상여금을 180퍼센트나 삭감시켰다. 공무직 노동자들이 항의를 했더니 담당 공무원은 '최저시급이 너무 많이 올라서 임금이 급상승하게 되어 삭감을 시켰다'며 '뭐가 문제냐?'고 반문했다.

공무직 노동자들을 가장 열받게 한 것은 몇십 년 동안 한 부서에서 오랫동안 일해 오던 무기계약직들을 군청에서 통보 한번 없이 마음대로 순환전보시키고 이동 배치한 점이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으면 벌떡 일어선다는 고금의 진리를 몰랐을까. 참다못한 공무직 노동자들은 어느 날 김나영씨가 운영하는 술집 젠으로 모였다. 이곳에서 14명이 노조 가입서에 도장을 찍었다.

전효태씨도 그날 젠에 온 노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현재는 장정운씨와 수도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전효태씨 고향도 역시 울릉도였다. 과묵한 사람인데 말을 하면 어찌나 억양이 세고 빠른지 무슨 내용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끔 김나영, 장정운씨 두 분이 통역(?)을 해 준 덕분에 살아온 이력을 간단하게 들을 수 있었다.

"차차 더 좋아질 것"
 
강릉에서 오는 배가 도착하는 저동항. 세 분은 이곳에서 오랜만에 한가롭게 산책했다.
 강릉에서 오는 배가 도착하는 저동항. 세 분은 이곳에서 오랜만에 한가롭게 산책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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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직장을 1997년도에 들어왔어요. 고졸 하고 육지로 나가서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에서 1년 6개월 일하다가, 군대 갔다가, 제대하고, 울릉도 들어와 살다가 할 일이 없어서 다시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에) 전화하니까 오래요. 갔어요. 가서 한 달을 했어요. 못하겠더라고. 군대 가기 전하고 또 틀리더라고. 적응이 안 되더라고. 다시 (울릉도) 들어와갖고 아버지 따라 재미 삼아 오징어 배를 얼마 탔죠. 군수 선거 때 돼가 군수님이 내가 논다고 하니까 취직을 시켜 줬죠. 97년도에는 그런 시대였어요."
 
김나영 분회장이 "그때는 잡부처럼 일하셨더라고" 하고 보충 설명을 해 준다.
 
"관광객들 매표소에서 일했어요. 죽도에서 근무하다가 구암캠핑장으로 팔려가(전보돼). 죽도 매표를 안 하니까. 캠핑장에서 5년 6개월 있다가 2015년도인가 순환전보(라 쓰고 강제전보라 읽는다)가 되면서… 그때 스물몇 명이 전보됐어요."
 

장정운씨도 고향이 울릉도다. 성격이 차분해 보이는데, 말도 조용히 했다.
 
"전 스물여섯 살 때부터 이 일을 했어요. 그전에는 노가다도 좀 하고, 군대 가기 전엔 주차장에서 일 좀 하다가… 오히려 노가다 할 때 돈을 더 번 거 같아요. 인건비가 그때 6만 원인가? 어떻게 보면 지금 임금이 많이 오른 것 같지 않아요."
 
"노조 처음 가입할 때 망설이지 않았어요?" 장정운씨는 조금 늦게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를 제가 만들고 싶었던 심정도 있었거든요. 능력만 된다면. 일용직, 낮은 입장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많이 힘들더라고. 그때 개인적으로 노조도 알아보고. 자신이 없어 가지고 그냥 버틴 거죠. 지역사회다 보니까 형이나 형수나 동생이나 인사에 불이익을 받으면…."
 
지역사회는 서로 인맥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노조라는 조직을 만들거나 가입하기가 쉽지 않다. "가입한 뒤에 어땠어요? 인사에 불이익이 있었나요?"
 
"저 혼자 괜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결과는 어차피 똑같은 거더라고요. 분회장이 노조를 만들고 활동하면서부터 사람들이 바른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했지.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바른말을 하는 게 뿌듯하고 좋더라고. 울릉군에 빛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고… 차차 더 좋아질 것 같애요. 군수 하면 옛날엔 대단한 사람인데 잘못하면 비판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 인식한 거죠."

노조가 설립되고 치열한 투쟁 끝에 단체협상
 
성인봉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 어디가 바다인지 하늘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성인봉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 어디가 바다인지 하늘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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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효태 부분회장이 다시 처음 노조 만들 때 이야기로 돌아간다.
 
"'노조 만들자! 위에 대가리는 누가 하노?' 하면서 서류를 내미는데 노조 가입서더라고. 대충 쓰면 되겠지 하고 썼는데 나머지는 '나중에 쓸게요' 했고. 그때 쓴 사람이 열네 명이죠."
 
노조가 만들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다시 되돌아보자. 부당한 순환전보였다. 그런데 정작 김나영 분회장은 순환전보 대상자가 아니었다.
 
"왜냐면 저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의료원 안에서만 돌아요. 순환전보 대상자를 보면서 잘못됐구나 느낀 거는 근로기준법을 보니까 전보를 시킬 때는 근로자한테 동의가 필요하더라고요. 협의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그것조차 없었고, 즈그 마음대로 순환전보를 시켰다는 거예요. 게다가 사무직에 있던 사람들을 현장직으로 보낸 거예요.

제가 교섭할 때 군에다 그랬죠. 왜 순환전보 시켰나. 공무원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우리 공무원도 어제 일하다가 인사 시키는데 느그도 우리가 가라면 가야지' 하는 거예요. '느그는 공무원이고, 원래 인사 기준에 그렇게 있고, 우리는 근로기준법에 따라야 하는데 그게 잘못된 거다. 앞으로는 순환전보 시킬 때 제대로 절차를 밟아라' 했더니 앞으로 순환전보 계속하겠대요. 노조가 생긴 뒤로 한 번도 못 했어요. 노조 생기고 나서 못 한 거예요. 결국 스물몇 명만 희생된 거잖아요."

 
김나영 분회장이 설명하는 걸 보면 말로 당할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조가 설립되고 치열한 투쟁 끝에 단체협상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고생한 이야기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태풍과 공무원들의 철거로 천막, 플래카드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단체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단체협약은 비조합원들에게도 적용됐다. 김나영 분회장은 그것이 옳은 건 알지만 고생한 조합원들을 생각하면 서운할 수밖에 없다.
 
"호봉제, 취업규칙, 월급도 올랐고. 수당 계산. 관리자들이 재정이 어렵다면서 비조합원들에게 다 적용시켜 준 거예요. 차별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차별은 우리 조합원들이 당하고 있거든요. 왜냐면 우리는 조합비 내면서 고생하면서 만들어 냈는데 이 사람들은 돈 10원도 안 들여가지고 우리가 따낸 걸 받고 있는데… 열매만 따 가는 거죠. 저희 노조 조합원이 서른 명이 안 됐었어요. 제가 항암하고 머리 벗겨져가 비니 덮어쓰고 댕기면서 그렇게 했던 거거든요. 교섭하면서 울었어요. 아, 씨발, 눈물이 날라카네."
 

김나영 분회장이 울컥하더니 잠깐 말을 멈춘다.

"우리가 달라져야 돼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저녁에 막걸리 한잔.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저녁에 막걸리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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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단련된 사람이 아니잖아요. 전문적인 노동운동가도 아닌데, 활동가도 아니고, 내가 그 사람들을 되게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도 아니고 내 살기 바쁜데, 나는 내 목숨 걸고 지금 이걸 하고 있는데… 머릿수도 안 채워 주는 저 인간들을 내가 왜 해 줘야 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효태 부분회장이 김나영 분회장을 응원한다.
 
"잘됐으면 좋겠어요. 조합원들이 단합 잘되고 분회장 가게 손님 많이 오고… 하하하."
 
"가게가 번창했으면 좋겠어요?" 김나영 분회장이 살짝 웃으면서 묻는다. 우리는 모두 웃었다. 어떻게 보면 둘이 남매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하고 부부 같기도 하다. 그 많은 명사를 대신할 수 있는 말이 '동지'라는 말이겠지.
 
김나영 분회장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누군가와 자주 통화를 했다. 전화를 받고 오더니 말했다.
 
"경산에 택시 투쟁 소식이 올라왔더라고요. 투쟁 기금 한 5만 원 보냈어요. 많은 돈은 아니지만 그라면서 연대해야죠. 어떡하겠습니까. 내가 (육지로) 나가서 팔뚝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이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울릉도는 그렇게 말고는 마음을 전할 길이 없어요. 제 몸이 못 가니까.

그래서 저는 ('십시일반 밥묵차') 유희 동지 같은 분이 존경스럽고 마음의 멘토, 정신의 멘토예요. 통화는 안 해 봤는데, 아 저런 분들이 정말 '만 원의 행복이다'. 투쟁하는 동지들 밥해 드리고 하는 게 그거 진짜 대단한 거거든요. 그런 분들 때문에 제가 버틴 것도 있고, 우리만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게 아니고 이런 분들이 다 힘을 모아서 하는구나, 배우고 그러고 있습니다."
 

"분회장님, 마지막 말 정리하고 저녁 먹으러 가요. 제가 한턱내겠습니다."

"무슨! 우리가 사야죠. 저는 공무직 노동자들이 조직화가 더 잘돼서 울릉군에 잘못된 여러 가지 불법적이고 부당한 행정이 빨리 개선될 수 있도록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하종강 교수 같은 분들도 한번 모시고 싶은데 워낙 여기가 고립된 곳이라… 조합원들한테 노조 교육도 하고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노조를 선택하고 싶어요. 알고 보면 노동조합이 직장 동료끼리 함께 목소리 내는 거거든요. 우리 공무직들이 그런 정신을 가지는 게 필요해요. 우리가 달라져야 돼요." 

[뒷이야기] 꼭 한 번 더 들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는 모습 보고 싶다
 
운이 좋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독도. 나는 운이 좋았다. 관광객들이 가져 온 독도경비대 위문품. 여기서 저 위 초소까지 곤돌라로 옮기는가 보다. 난 왜 풍경보다 저런 장면에 더 눈이 갈까.
 운이 좋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독도. 나는 운이 좋았다. 관광객들이 가져 온 독도경비대 위문품. 여기서 저 위 초소까지 곤돌라로 옮기는가 보다. 난 왜 풍경보다 저런 장면에 더 눈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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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던 날, 김나영 분회장과 다른 조합원들은 새로운 노동조합 조끼를 입었다. '민주노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연맹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강원경북충북지역본부 울릉군지부'. 이름이 길다. 울릉군에 하나밖에 없는 화장장에서 일하는 이서연, 하구희씨 두 분도 그날 젠에 와서 노조에 가입하고 새 조끼를 입었다.
 
돌아보면 나는 참 운이 좋았다. 울릉도를 처음 들어갔는데, 김나영 분회장의 소개로 싸고 좋은 숙소에 묵고, 유명한 식당에서 따개비 칼국수도 먹고, 공무직 노조 핵심 멤버 세 분의 배려로 승용차로 울릉도 순환로 일주도 했다. 또 날씨도 좋아 혼자 성인봉 정상도 밟았고, 28일은 독도 가는 배를 타고, 1년에 60일 정도밖에 발을 못 들여놓는다는 독도를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 생애 울릉도 방문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갔지만 꼭 한 번 더 들어가 공무직 노동자들이 더욱 단합되고,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너무 폐를 끼치고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닌가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31일에 서울에 와서 김나영 분회장 페이스북을 보니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시간 참 빠르네
작년 이날 페부기를 처음 시작한 날
울릉도에서 우리 투쟁을 알리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날이 난 엊그제 같은데
 
노조 시작하고 처음 나오는 나들이인 것 같다.
힘들고 눈물 나는 시간들이 계속되고 있지만
오늘만은 그 힘듦과 눈물과 함께 힐링하는 날
사랑하는 내 고향 울릉도, 좋다. 너무
 
내가 갔을 때가 페이스북을 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는 말이다. 그날 나들이가 노조 시작하고 처음이었다니, 그동안 얼마나 바쁘게 살았으면 그랬을까. 나 때문에 시간만 뺏기는 줄 알았더니, 내 덕분에 힐링도 했다니 마음이 아주 쪼끔 덜 미안하다. 하하하! 울릉군지부 동지들, 부디 건강하게 당당하게 삶을 꾸려 나가시길.

덧붙이는 글 | 월간 <작은책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울릉군, #작은책, #김나영, #울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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