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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22회 서울퀴어문화축제 기간 중에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인들이 소수자, 인권, 평등에 대한 감각, 차별, 대항표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칩니다. 불빛을 따라 자신만의 노트를 써가고 있는 문화·예술인 6인의 글을 릴레이 기고 "불빛과 노트들"을 통해 소개합니다.[편집자말]
드랙킹 아장맨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다원.
 드랙킹 아장맨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다원.
ⓒ 아장맨/김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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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드랙킹 콘테스트의 기획을 시작했다. 비시스젠더 게이 남성 드랙 퍼포머들이 자유로운 무대를 기획, 연출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관객과 퍼포머 모두 폭력들에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드랙'이란 '성별·지위에 기대되는 모습과 반대로 자신을 꾸미는 퍼포먼스의 일종'이다. - 편집자 주)

비교적 대관료가 저렴한 평일에 지금은 사라진 클럽 홍대 MWG(명월관)을 대관하여 2018년 10월 9일 한글날에 1회 드랙킹 콘테스트의 막을 열었다. 드랙킹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 퍼포머 모집 글을 올려 무작위로 함께 할 인원을 뽑았다. 대부분 무대 경험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드랙으로 표현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동양 문화를 사랑해서 한국에 온 백인 남성 존존슨, 다카라즈카 남역 듀오 비제비제 쟈키쟈키, 돈과 여자가 많아 고민이라는 남성 힙합 가수 달해빛, 택배 물류업에 종사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꾼 등 한국에서 여성, 퀴어로 살아가며 습득한, 혹은 해석한 다양한 남성성이 드랙 무대로 표현됐다. 전무한 자금으로 시작됐기 때문에 퍼포머들은 스스로 의상을 준비해왔고, 음향기기는 전부 제일 저렴한 것 아니면 대관한 클럽에 기본으로 준비되어 있던 것들을 사용했다.

한정적인 자원과 시간으로 만들어낸 것임에도 퍼포머와 관객들은 해방감이 든다며 호응을 했고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2회도 몇 달 뒤 2019년 5월 26일에 같은 장소에서 진행됐다. 드랙을 활용해서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기획과 퍼포머들을 가시화시키고 싶었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으니 비슷한 레파토리의 공연기획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3회를 준비할 때는 1회와 2회의 퍼포머이자 미술 작가인 상훈님이 서울문화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자고 제안해서, 소정의 지원금을 받아 정동극장에 딸린 정동마루를 대관할 수 있었고, 여성국극을 접목한 <DRAGx여성국극; 춘향전>을 만들 수 있었다.

퀴어, 클럽 문화로 치부되는 드랙을 재단 지원을 받아 기관에서 진행시켰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4회 때는 더 많은 기금을 받아 드랙킹 콘테스트를 조금 더 양지로 가져와 예술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올해 세종문화회관서 공연... 믿기지 않았다

지난 4월 4일 제4회 드랙킹 콘테스트 <DRAGx남장신사 (드랙바이 남장신사)>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열렸다. 세종문화회관의 대관이 성공하자 4기 공연의 기획인 나와 상훈님은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기뻤다. 다른 극장에서 '저희 극장은 가족 단위가 많이 오는 곳인데, 작품이 너무 선정적이다'라는 평가를 들으며 대관을 거절당해 불안한 와중 보수적이라던 세종문화회관이 우리의 편을 들어준 것이 믿기지 않았다.

<드랙 바이 남장신사>는 중장년의 여성, 퀴어의 인생사를 중심으로 한 공연이다. 60대 레즈비언이자,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를 운영하는 사장님 명우형, 남성 대명사를 선호하는 불다이크 부치 레즈비언이자 한국 최초 레즈비언 모임 사포를 만든 테리님, 제1세대 트랜스젠더 퍼포머 색자님,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활동가이자 여성 소방관인 나비님 4분이 주인공인 무대이다.

4인의 인생사를 기반으로 하여 만든 4편의 독립적인 대본을 이리, 권은혜, 라소영 배우가 연기하고, 그 인생에 관한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그 끝마다 당사자들이 나와서 화려하게 드랙킹 퍼포먼스를 하는 공연이다. 천재적인 연출과 통통 튀는 음악이 더해져 퀴어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아름다운 공연이 만들어졌다. 나는 이번 기획에서 여태껏 드랙킹 콘테스트에서 해 왔듯이 MC이자 작은 조연으로 무대 위에 올랐다.

공연이 끝난 후, 나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울어버렸는데, 그 이유는 이때 함께 무대에 서 있던 선배님들의 존재에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소수자들에게는 더욱 잔혹했던 전염병 시대에 모두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공연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단어로 정리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선배들은 공연 뒤풀이에서 '이거 또 해야지 너무 좋아서 안 되겠다'고 흥분하며 말씀하셨고, 그때만큼은 그간의 고생이 잊힐 만큼 뿌듯했고, 다가올 내일이 기대됐다.

변한 게 없다? 

그러나 소수자 당사자들의 인생에 관한 공연을 백오십 명 정도의 사람들이 봤다고 해서, 소위 '관 냄새난다'는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랐다고 해서, 당사자들의 삶에 변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놓고 차별적인 전염병 관련 법에 따라, 인생의 3분의 2를 트랜스젠더 바의 퍼포머로 살아오신 색자님이 일하시는 가게 <아나따>는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코로나가 터져 유흥업소 집합 금지 명령이 떨어진 이후에도, 색자 님은 다시 공연하게 될 날을 위해 부지런히 공연을 구상하셨다. 와중 난생처음으로 공연할 공간을 잃으신 것이다. 색자님은 20대의 여름을 보내던 날 남자가 여장하고 술을 판다는 이유로 풍기문란죄로 경찰들에게 잡혀 즉결 심판을 받으러 가는 길에 닭장차(죄인 수송 차량)에 몇 시간을 갇혀 질식할 뻔한 일이 있었다.

<드랙 바이 남장신사>에서 색자님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지금은 그때보다는 많이 살만해졌다."고 말한다. 그 시대를 모두 거쳐 현재를 감당하는 60대 트랜스젠더 여성의 불행은 너무나 쉽게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됐다. 유흥업소에 종사한 것도 트랜지션을 한 것도, 그리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주민등록번호를 바꾸지 않은 것도, 살아남은 것마저 개인이 감내해야 할 업보가 되어버린다.

색자님의 드랙킹 무대는 <아나따>에서 공연했던 레파토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는데 세종문화회관은 되고 <아나따>는 안됐다. 광화문은 괜찮고, 이태원은 안됐다. 이태원은 쇼 문화를 꽃피운 곳이다. 1~2세대 트랜스젠더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발레, 재즈 댄스, 전통춤 등을 전문가를 초빙해 춤과 연기를 배우며 가게에서 선보일 쇼의 기본기를 탄탄히 했고, 수준 높고 파격적인 공연을 했다.

1980~1990년대 당시 연예계 종사자들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트랜스젠더 바들을 넘나들며, 선생님들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베껴가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한 예시로 한 유명 여성 코미디언을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준 쇼는 <여보여보>에서 일하던 한 선생님의 공연 레파토리였다고 한다. 베끼는 입장에서는 원본이 숨겨져야 자신의 공이 더 인정받았겠지만, 만약 쇼 문화만 베껴갈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분들을 양지로 데려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가 화가 났다.

퍼포머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기획하고 연출하는 쇼들이 당당하게 표절해가도 될 정도로 대중문화와 퀴어 문화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 트랜스젠더 바의 메인은 공연이었다. 끼가 있고, 끼를 발산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자신이 규정하는 모습대로 살아가는 소수자들이 모여서 개척해낸 공간이다. 손님들에게 술을 파는 유흥업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서 그 내부 예술가들의 공로가 무시돼도 괜찮은 걸까?

'드랙킹 콘테스트' 하위문화? 예술?

욕망과 당사자 정체성으로 뭉친 퀴어 예술은 대부분 검열과 폭력을 피해 음지에서 시작이 되고 하위문화 취급을 받는다. 동시에 퀴어 예술이 인정을 받으려면 하위문화적인 특성을 버려야 한다. 5회 드랙킹 콘테스트를 준비 중이니만큼 벌써 드랙킹 콘테스트도 3회째 지원금을 받는다. 다양성 파트나 하위문화 예술을 지원해 준 서울문화재단은 유흥업소나 일반 술집, 식당으로 지정이 된 곳은 대관을 허락해 주지 않기 때문에 재단의 지원을 받으면 무대나 갤러리를 대관해 진행해야 한다. 레즈비언 바나 게이 클럽처럼 처음 퀴어 예술이 시작되었던 장소도 안된다.

드랙킹 콘테스트 1, 2회 때의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와 관객과 퍼포머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소통하는 방식이 퀴어적이었다며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본인의 욕망과 변태성, 국가와 사회에게서 받은 폭력들을 드러내기 위해 맨몸으로 무대에 올라 뿜어내는 에너지는 수행하는 이에게도 보는 이에게도 해방감을 줬다.

드랙킹 콘테스트가 만일 지금까지 1,2회 드랙킹 콘테스트의 레파토리를 반복하고 발전시켜 진행됐다면 퀴어 문화로서의 가치는 더 단단해졌을 것 같다. 그러나 예술로 인정을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2020년부터는 공간적 특성 때문에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멈춰졌어야만 할 것이다. 홍대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드랙킹 콘테스트 1, 2회가 열렸던 클럽 MWG도 코로나 시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드랙킹 콘테스트는 가장 퀴어적일 때 의미가 있지만, 예술로 인정을 받지 못한 창작물은 그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부당하게 표절돼도, 아카이브 되지 못해 역사로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함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퀴어 예술은 퀴어가 받는 대우와 닮아있다.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인정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모습으로 살아갈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마치 그 두 선택지가 온연히 같은 무게를 가진 듯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시기상조라며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네 명의 선배 이야기가 드랙킹 콘테스트를 통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진 것은 축하받을 일이다. 그러나 드랙킹 콘테스트 1, 2회는 변태 짓이지 예술이 아니었던 걸까? <여보여보>와 <아나따> 내부의 쇼는 유흥이지 예술이 아니었던 걸까? 단 하루 퀴어 퍼레이드를 즐기는 것도 문란하다고 눈총을 받는 시대에, 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되지 않은 사회에서 당사자성에 안주해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퀴어 예술을 하는 퀴어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생각은 이렇다. 퀴어 예술은 퀴어의 산물이고, 퀴어가 퀴어가 되기 위해 투쟁하듯 퀴어 예술도 마찬가지로 투쟁해야 한다. 압박감과 차별에도 모습을 바꾸지 않도록, 비정상적이라고 규정하는 기존 예술의 규범에 대항하고 좌충우돌하며 예술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경계에서 꾸준히 존재해야 한다. 기관 외 예술, 주체와 주제가 분리되지 않는 예술, 작품과 작가가 생존을 위해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예술이 지속되어야 한다.

이미지, 공간성, 순간성 등 다양한 요소들을 차별하지 않고 사용하여 기존의 체제를 타파할 수 있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앞으로도 고민과 자기 검열, 인정 욕구의 고통 속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눈부신 퀴어들과 소통하며 작업을 이어가려 한다.

덧붙이는 글 | 아장맨/김다원 : 2017년부터 드랙킹 아장맨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다원이라고 합니다. 2018년부터 여성과 퀴어들이 안전할 수 있는 드랙 퍼포먼스 공간을 만들기 위해 <드랙킹 콘테스트>를 만들었고, 퍼포머, 기획으로 활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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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퀴어문화축제(Seoul Queer Culture Festival, SQCF)”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비롯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어우러져 즐기는 장을 만드는 것”을 비전으로 삼아 매해 여름 서울에서 개최되는 복합/공개/문화행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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