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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며칠째 찌뿌드드하다. 창고 속 먼지 묻은 관절인형처럼 어깻죽지와 무릎이 삐거덕거린다. 발코니 블라인드를 젖혀보니 여간 없이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두꺼운 이불처럼 덮여 있다. 그래, 더 자야 한다. 그때 바람이 슬며시 문틈으로 들어와 뺨을 훔친다. 바람은 바다의 젖은 입김을 품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지중해성 기후로 사시사철 온난 건조한 것이 특징인데 늦봄이면 하늘이 전날 과음한 직장 상사의 낯빛처럼 잿빛이다. 이를 현지인들은 5월은 '메이 그레이(May Grey)', 6월은 '준 글룸(June Gloom)'이라 부른다. 한국에서는 가을을 만추(晩秋)라 부르며 짙은 그리움을 노래하는데, 엘젤리노는 늦봄, '만춘(晩春)'을 회색, 우울함으로 표현한다.

수평으로 낮게 형성된 구름은 알래스카만에서 내려온 차가운 바닷물이 캘리포니아 해수면의 따뜻한 공기와 만나 만들어진 해양층(Marine Layer)이다. 해양층은 낮에는 해수면 상층의 따뜻한 기온과 내륙의 고온에 막혀 바다에 갇혀 있다가, 해가 지고 지표면 온도가 떨어지면 슬금슬금 내륙 해안 산맥까지 수십 킬로미터 이동해 남부 캘리포니아 하늘을 뒤덮는다.
 
미국 캘리포니아 맨하튼비치에서 서퍼들이 파도를 타고 있다. 오전 6시쯤이라 항구에 가로등이 켜져 있다. 서퍼를 촬영하기 위해 드론으로 저공 비행을 하다 드론이 파도를 맞고 추락해 사라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맨하튼비치에서 서퍼들이 파도를 타고 있다. 오전 6시쯤이라 항구에 가로등이 켜져 있다. 서퍼를 촬영하기 위해 드론으로 저공 비행을 하다 드론이 파도를 맞고 추락해 사라졌다.
ⓒ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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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퍼에게는 이때가 황홀한 시간이다. 부지런한 서퍼는 파도가 고르고 힘이 좋은 새벽에 바다로 향한다. 파도를 잡기 위해서는 파도가 부서지는 라인업까지 보드에 몸을 싣고 팔을 휘저어 헤엄치는 패들링을 해야 하는데, 늦봄이면 바다에 새벽안개가 자욱하다. 수평선마저 지운다. 두 발을 우유처럼 미지근한 바다에 담그고 부드럽게 뺨을 간지럽히는 안개를 맞노라면,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감상을 <무진기행>의 김승옥의 문장을 빌려 가공하자면 이렇다. 

"그 안개 속에는, 수줍은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부지런한 서퍼를 에워싸며 오늘은 누구도 나를 범하지 않은 최초의 바다라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 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다."

서퍼가 아니라도 아침 창을 열고 날씨가 찌푸리다고 그날 외출을 포기하면 그건 엔젤리노의 품격이 아니다. 아니, 왜 한 달에 한화로 수백 만원 하는 월세를 내고 좁은 집에 사는가. 우리는 분명 '날씨 세금'을 내고 있다. 

구름은 오전 낮 기온이 올라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오가 되기 전 증발한다. 바다가 조제한 안개 수면제에 취하지 말고 집을 나서자. 비치 보이즈의 서핀유에스에이(Surfin USA)를 들으며 1번 서부 해안도로를 달리든지, 키 큰 시카모어 나무 아래에서 마마스앤파파스의 드림 어 리를 드림 오브 미(Dream a Little Dream of me)를 들으며 시고 달콤한 햇살을 맛보든지, 일단 나가야 한다.

추마시와 살리난의 성지, 모로락

5월 주말 아침 우리 부부는 진한 모카커피를 끓여 마시고 중부 캘리포니아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어촌 마을인 모로베이(Morro Bay)로 향했다. 인구 1만여 명의 작은 관광도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320km 떨어져 있다.

모로베이는 원주민인 북부 추마시와 살리난이 대대로 거주하던 곳이다. 추마시는 기원전 6500년 전부터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모로베이 크릭(Morro Bay Creek)에서 집단 거주했다. 바닷물고기와 민물고기, 조개 등을 잡고 베리류와 도토리, 잣 등을 채집해 먹으며 살았다. 주 정부와 연방 정부는 추마시를 지역 대표 원주민으로 지정하고 그들에게 문화재 발굴 감시 권한과 기타 이권 사업 참여 기회 등 제한적인 자치권을 주고 있다.
 
중부 캘리포니아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모로베이다. 그 마을의 랜드마크인 화산 봉우리 모로락이다. 봉우리 아래 내륙과 이어지는 길은 퇴적층인 육계사주다.
 중부 캘리포니아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모로베이다. 그 마을의 랜드마크인 화산 봉우리 모로락이다. 봉우리 아래 내륙과 이어지는 길은 퇴적층인 육계사주다.
ⓒ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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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또 다른 원주민 네이션인 살리난은 원주민 사이에서도 약자다. 캘리포니아주는 그들을 원주민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지만 연방정부는 명확한 사유 없이 그들을 원주민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살리난은 카지노 사업이라든지 토지와 관련한 권리 행사에 있어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이에 살리난 원주민들은 비싼 돈을 들여 민속학자와 족보학자, 인류학자, 변호사 등을 고용해 2011년 12월 연방 정부를 상대로 소송했다. 그들은 1만 년 전부터 이 일대에 살았다는 증거를 모아 법원에 제출했는데 서류 무게만 417킬로그램 이상이었다. 하지만 아직 연방 정부와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모로베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스페인 선교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42년 스페인 탐험대인 후안 로드리게즈 카블릴로(Juan Rodriguez Cabrillo)가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땅을 밟았고 이후 아시안 최초로 필리핀 선원이 스페인 대형 범선을 타고 1587년 10월 18일 상륙했다.

이어 1769년 9월 8일 스페인 포톨라 탐험대가 이 지역에서 캠프를 했는데 당시 기록 담당 대원이자 선교사인 후안 크레스피가 화산암 봉우리를 보고 문서에 "만조시 해안가와 분리돼 고립되는 둥근 형태(a round morro)의 거대한 암석(a great rock in the form of a round morro which at high tide is isolated and separated from the coast)"라고 썼다. 여기서 말하는 모로가 바로 모로베이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화산암 봉우리 모로락(Morro Rock)이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모로베이(모로만)라고 불렸다.
 
드론으로 모로베이를 근접 촬영했다. 화산 봉우리의 역동적인 표면이 실감나게 포착됐다.
 드론으로 모로베이를 근접 촬영했다. 화산 봉우리의 역동적인 표면이 실감나게 포착됐다.
ⓒ 황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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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Morro)는 스페인어로 푸르스름한 색깔을 가리킨다.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서는 둥그런 언덕을 모로라고 부른다고 한다. 모로록은 높이 약 177미터로 2600만 년 전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폭발한 뒤 빠르게 굳은 화산암이다. 석영 안산암과 사장석 등으로 구성해 있다. 동쪽 면 침식이 더 심한데 그곳 바위 파편 위에 주차장이 만들어졌다. 

생김새는 제주도 산방산과 비슷하다. 산방산이 높이 395미터로 모로락에 비해 배는 더 크다. 하지만 산방산의 생성 시기는 80만 년 전으로 나이로 따지면 모로락이 산방산의 '까까마득한' 조상뻘이다. 모로락 인근 오소스 밸리(Los Osos Valley)를 따라 비슷한 모양의 화산암 봉우리가 9개가 있는데 이를 나인 시스터즈(Nine Sisters)라고 부른다. 200여 년 전 모로락은 만조 때 육지와 연결된 길이 바다에 잠겼다. 현재는 모래와 자갈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층인 육계사주가 높이 만들어져 24시간 차로 이동할 수 있다.

모로락 남쪽에는 모래톱이 6.5킬로미터쯤 쌓여있다. 연안류가 남동쪽으로 사선으로 흐르면서 모래가 쌓였는데 모로 사구 보호지역(Morro Dunes Natural Preserve)으로 지정돼 있다. 가장 큰 사구의 높이는 9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방문객은 몬타나데오로 주립공원(Montana de Oro State Park)에서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갈 수 있다. 비치 솔트부시(Beach Saltbush)와 비치 버(Beach Bur), 샌드 벌비나(Sand Verbena) 등 사막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바닷모래에서 자라고 있다. 해변 사구는 사막처럼 물이 잘 빠진다. 이 때문에 식물들이 다육식물처럼 수분을 보다 많이 저장하기 위해 이파리가 도톰하다.
 
연안류에 의해 형성된 모래 퇴적층이다. 이곳은 모로 사구 보호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연안류에 의해 형성된 모래 퇴적층이다. 이곳은 모로 사구 보호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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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바람이 대화하고, 독수리가 너를 창조하노니

추마시는 모로락을 그들 언어로 리사무(Lisamu)라고 부르며 신성시했다. 살리난은 모로락을 레사모(Lesamo)라고 부르며 일 년에 두 번 봉우리에 올라가 천도재를 지냈다. 

살리난의 창세기 주인공은 독수리다. 홍수가 나면 모로베이 북쪽에 있는 산타 루시아 봉우리(santa lucia peak) 이외에는 모든 곳이 물에 잠겼다. 어느 날 하늘에서 아침 별이 떨어졌다. 그날부터 태양과 달, 별 등 모든 것이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 바다가 바람에 안부를 묻고 코요테가 자갈에 인사를 했다. 이때 독수리가 딱총나무 가지를 꺾어 최초의 인간을 만든 뒤 생명을 불어넣었다.

현실감 떨어지는 신화지만 사실 과학적이기도 하다. 생태작가 페터 볼레벤의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에 따르면, 우주에서 날아오는 미세한 입자인 우주선(Cosmic Ray)이 침엽수가 내뿜는 향긋한 향의 불포화 탄화수소인 테르펜(Terpene)의 방출을 10배에서 최대 100배까지 높여준다. 이 테르펜은 물과 쉽게 결합해 대기에서 비를 만든다. 비 혹은 안개가 땅의 습도를 높이며 다시 온갖 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우주가 비를 만들고 땅을 적시는 것이다. 아침 별이, 세상 모든 것들을 이어 놓은 것이다.

살리난 신화는 성스로운 땅, 모로락에도 스며있다. 어느 날 송골매와 큰 까마귀가 머리 두개 달린 대형 뱀인 탈리에카타펠타(Taliuekatapelta)를 제거하기 위해 공격했다. 하지만 뱀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새들은 모로락으로 후퇴했다. 모로락은 큰 까마귀의 정령이 깃든 곳이었기 때문이다. 뱀은 계속 쫓아와 모로락을 감싸 올랐다. 그때 뱀이 가까이 접근하자 송골매와 큰 까마귀가 칼을 뽑아 뱀을 산산 조각냈다. 이후 샐리난은 태양이 가장 높이 멀리 뜰 때 모로록에 올라 큰 까마귀에게 기도를 한다.

모로락 등반은 불법이다. 1891년부터 채석 작업이 이뤄져 파괴가 심한 데다 독성 살충제인 디클로로디페닐트라클로로에탄(DDT) 남용으로 송골매(Peregrine Falcon)가 멸종 직전까지 가자 샌루이스포 카운티가 1968년 캘리포니아 역사 랜드마크(California Historical Landmark)로 지정하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모로락 아래서 봉우리를 올려다보면 송골매가 옥빛 창공을 미끄러지듯 비행하며 검은 획을 그린다. 무당이 붉은 글씨로 부적에 영험한 기운을 그려넣듯, 새는 활처럼 굽은 양 날개로 하늘을 읽고 그날의 운명을 날갯짓으로 그린다. 북부 추마시의 원로인 프레드 콜린스는 2015년 3월 14일자 로스앤젤레스타임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이곳은 믿을 수 없는 새들이 사는 서식지다. 많은 종류의 철새가 이주하는 경로다. 신성한 곳이라는 점을 제쳐두더라도, 왜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가."
 
모로락을 등반하는 것은 불법이다. 표지판에 경고 표시가 돼 있다.
 모로락을 등반하는 것은 불법이다. 표지판에 경고 표시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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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락 등반을 두고 흥미로운 법정 다툼이 있었다. 1999년 살리난 남성 버치가 낚시수렵국의 특별허가를 받아 천도재를 지내기 위해 암벽을 올랐는데 탐조객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당국에 신고한 것이다. 버치는 천도재가 전통문화라고 주장했지만 이 일대 토지 사용 권한이 있는 추마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침 주변에 건설 호재도 있어 단단히 의심을 샀다.

추마시는 2014년 12월 5일 원주민헤리티지커미션(Native American Heritage Commission)과 캘리포니아주 등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 샌루이스오비스포 고등법원은 추마시의 손을 들어줬고 살리난의 등반이 금지됐다. 살리난 입장에서는 조상 대대로 살아왔지만 타 원주민과 사실상 침략자인 미 연방정부로부터 이중 설움을 당한 꼴이었다. 이런 원주민 네이션이 미전역에 40여 곳이다.

이후에는 2019년 10월 펜실베니아에서 온 한 남성이 모로락을 올랐다가 내려오지 못해 911 구조대에 구조 요청을 했다. 그에게는 구조대를 부른 비용 2000달러와 불법 등반 혐의로 벌금이 부과됐다.

모로락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서쪽 면까지 걸어가 보자. 2600만 년 된 암석이 부서져 돌무덤을 이루고 있다. 마음에 드는 돌을 집어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빌자.

- 2편 석유를 찾다가 발견한 온천수, 피로가 쫙 풀린다으로 이어집니다. 
 
모로락 서쪽 면이다. 돌탑 수백개가 바다를 바라보고 쌓여있다. 한 부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모로락 서쪽 면이다. 돌탑 수백개가 바다를 바라보고 쌓여있다. 한 부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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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미국여행, #온천, #서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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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가정 폭력 생존자를 돕고 있다. 한국에서는 경기방송에서 기자로 일했다.

소울트레블러17 대표 인스타그램 @rreal_la 전 비영리단체 민족학교, 전 미주 중앙일보 기자, 전 CJB청주방송 기자 <오프로드 야생온천>, <삶의 어느 순간, 걷기로 결심했다>, <내뜻대로산다> 저자, 르포 <벼랑에 선 사람들> 공저 uq26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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