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 지원단체로,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리산권 지역에서 직접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 모임, 공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기자말]
'청소년자치공간 명왕성'에서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는 김한범씨
 "청소년자치공간 명왕성"에서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는 김한범씨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관련사진보기

 
평일 오후 네다섯 시. 학교 수업을 마친 중학생들이 학원으로 흩어지기 전에 두셋씩 짝을 지어 들르는 곳이 있다. 경남 산청읍 친환경로 2693에 자리한 '청소년자치공간 명왕성(이하 명왕성)'이 그곳이다. 무뚝뚝한 인상을 주는 건물 입구며, 무수한 걸음의 흔적이 거뭇하게 남아 있는 계단이며, 열린 화장실 문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냄새까지, 겉으로 봐서는 아이들이 왜 굳이 이곳을 찾는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2층에 다다라 명왕성 문을 열면, 그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악기와 음향시설이 갖춰진 작은 무대, 만화책들로 빼곡한 책장, 인스턴트식품 정도는 조리가 가능한 주방시설, 그리고 무엇보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칸칸이 구획된 공간이 적당히 아늑하고 편안해 보인달까. 아이들이 여기 와서 주로 무얼 하느냐고 묻자, 일주일에 4일 명왕성을 지키는 '코디네이터' 김한범씨는 말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주로 라면을 끓여 먹었어요(웃음). 그거 말고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려요. 뭘 열심히 하지 않아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이들이 오는 거죠."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는 유일한 곳            

서울과 울산을 거쳐 경주에서만 꼬박 8년간 영어교사로 일해온 김한범씨는 나이 마흔에 학교를 그만두고 산청으로 건너왔다. "교사가 옛날 방식으로 옛것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닌, 청소년이 주도적으로 자기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을 한 번쯤은 시도해보고픈 오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꿈의 실현지로 산청을 선택한 데는 먼저 이 지역에 정착한 한 지인(시천면 청소년대안공간 모하노 유훈정 샘)의 영향이 컸다. "이곳에는 대안적인 교육과 삶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에 앞뒤 재지 않고 이삿짐을 쌌다는 것. 

"2016년 말에 이사 와서 처음 일 년간은 이 지역과 사람들을 알아가는 데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2018년 초부터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리고 다니기 시작했죠. 당시 제가 원한 건 올바른 교육과 이상적인 관계가 실현되는 배움의 공간이었어요. 현대판 '서당' 같은 거였다고 할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내가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건가? 그래서 이런 공간을 준비하는 건가? 뭔가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어떤 선생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이 한참 제 말을 듣더니 불쑥 이러시는 거예요. '애들이 이걸 좋아할까요?' 그때 든 생각이 아, 내가 아직도 '훈장질'하고 싶어하는구나!(웃음)"


흡사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얼얼함 속에서, 그는 어른이 아닌 '청소년 중심의 공간'을 준비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함께할 아이들도 몇 명 모았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지역 청소년들이 눈치 보지 않고 잘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고, 빠듯한 예산 안에서 어찌어찌 사무실을 구한 다음에는 휑한 콘크리트 바닥에 지역 어른들을 앉혀놓고 사업설명회도 진행했다. 

"아이들이 발표를 너무 잘해서 그런지 호응이 기대 이상이었어요. 많은 주민이 격려와 응원은 물론 물질적인 지원도 해주셨죠. 이것이 말로만 듣던 산청의 힘인가 하는 생각이 그때 들더라고요(웃음)." 

공간 설계와 리모델링까지 직접 끝내고 마침내 명왕성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 2018년 10월 22일. 먼 산꼭대기에서 시작된 단풍이 고운 빛을 몰고 빠르게 하강하던 어느 가을날의 일이다. 그 후 세 번의 가을을 더 보낸 명왕성은, 이제 몇 달 후면 만 네 살이 된다.              

조금씩, 천천히, '자치'의 궤도를 그려가다               
 
경남 산청읍에 위치한 '청소년자치공간 명왕성'의 전경
 경남 산청읍에 위치한 "청소년자치공간 명왕성"의 전경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관련사진보기

  
깨끗한, 배려하는, 안전한 명왕성을 만들기 위한 이용수칙
 깨끗한, 배려하는, 안전한 명왕성을 만들기 위한 이용수칙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관련사진보기

 
"명왕성을 움직이는 건 청소년 운영진이고 저는 그들에게 고용된 코디네이터예요. 저의 주된 역할은 운영진이 뭔가를 결정할 때 하나만 보고 선택하지 않도록 다양한 정보와 참고 사례를 제시하고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라 생각해요. 청소와 건물 관리와 회계 같은, 현실적인 여건상 청소년이 하기 어려운 일들도 맡아 하고요."

공식 직함과는 상관없이 한범씨가 명왕성에서 가장 많이 듣는 호칭은 "저기요"다. 심지어 "사장님"이라 불릴 때도 있다. 명왕성이 청소년자치공간임을 알고는 있지만, 아이들은 이처럼 공간의 '주체'가 되기보다 '이용자'에 머무는 게 아직은 더 편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은근슬쩍 드러낸다. 더군다나 운영진으로 일한다는 것은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일 뿐 아니라 약간의 책임감마저 가져야 함을 의미하기에, 이런 점이 부담이어서인지 선뜻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많지는 않다.

"연초에 운영진을 새로 구성할 때면, 일단은 자주 와서 잘 노는 친구들에게 '이런 거 있는데 해볼래요?' 하고 운을 띄우죠. 아무 반응이 없으면 '회의비도 드린다'고 하고(웃음). 저는 회의도 노동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봐요. 학생들에게 뭔가를 시키고 자원봉사점수로 퉁치곤 하는데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다행히 올해는 운영진으로 아홉 명이나 들어왔고 지금까지 다들 안 빠지고 잘 나오고 있어요."

그러면 회의 분위기는 어떨까. 학교와 가정에서 '자치권'을 행사할 기회를 제대로 누려본 적이 없다면, 제아무리 운영진이어도 어른과 함께 하는 회의에서 청소년이 제 목소리를 내는 게 어디 그리 쉽기만 할까?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음을 한범 씨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또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이들은 기회만 주면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서로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속에서 합의를 이뤄간다는 것을.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스스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한번은 바깥에서 제안이 들어왔어요. 지역주민과 청소년이 어울려 보드게임 하는 자리를 마련하면 어떻겠냐고. 명왕성이 지역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 같아서 회의 때 얘기했다가 바로 '까였'죠(웃음). 저희는 저희끼리 놀고 싶은데요? 그러더라고요.

아이들이 어른인 제 말에 '노'라고 할 수 있다는 게 저는 좋았어요. 가끔은 저도 아이들의 결정에 '그건 좀 아닌데' 싶을 때가 있는데, 대개는 그 결정을 존중하고 어떻게 되어가는지 지켜봐요. 그러면 문제가 드러났을 때 아이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바로잡더라고요. 청소년들이 이와 같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되도록 많이 경험하도록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는 게 어른의 역할이 아닐까 싶네요."


꿀알바부터 스튜디오명왕성까지, '청소년시점'의 사업들                 

일상적인 공간 운영 말고도 명왕성에서 진행하는 몇 가지 굵직한 사업이 있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19년에 시작한 '꿀알바 프로젝트'다. 청소년의 다양한 활동에 급여를 지급하는 이 사업은, 겉보기에는 보통의 '알바'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그 안에 깃든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 사회는 시험성적을 기준으로 청소년의 능력을 평가하잖아요. 그 외 다른 능력이나 자질은 하찮게 여기거나 소홀하게 취급하고요. 그러다 보니 청소년 스스로도 자기의 관심사나 재능에 자부심을 갖고 계속해나가기가 어려워지죠. 이런 문화를 바꿔보자는 뜻에서 시작한 게 꿀알바예요." 

꿀알바는 크게 지역연계활동, 공익활동, 개인활동으로 나뉘는데, 지역 모임이나 단체에서 의뢰한 일을 맡아 하는 것이 지역연계활동이라면, 장애아동과 놀이 프로그램을 함께 한다든지 공적 가치를 지닌 행사의 진행을 돕는다든지 하는 것은 공익활동에 속한다. 또 그림 그리기나 악기 연주 같은 개인활동은, 혼자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녹음이나 촬영 등을 통해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형식을 갖출 때 꿀알바로 인정된다. 

아이들은 이 세 영역 가운데 본인이 가장 잘하는 것, 혹은 하고 싶은 것을 골라 지원할 수 있으며, 알바비도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스스로 정해본다. 그러면 운영진이 회의를 통해 누가 무엇을 해서 얼마를 받을지를 결정한다고. 이때 가장 중요시되는 원칙은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꿀알바를 경험하도록 고르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알바비 역시 개인 간 차이가 크지 않게, 또 너무 과하거나 적지 않게 조율된다. 

"아이들의 활동이 좀 서툴지라도 꿀알바는 그걸 문제 삼지 않아요. 사실 완성도라는 건 그 활동을 계속할 때 높아지는 거 아니겠어요? 이 사회가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에게는 계속 노력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의욕을 꺾어버린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죠. 저는 아이들이 하고자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지속하려면 동기부여가 필요하고, 그래서 칭찬과 응원과 보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청소년에게 굳이 '돈'으로 보상해야 하느냐는 말을 간혹 듣는데, 지금 시대에 어떤 일의 가치를 인정하는 가장 분명한 지표는 돈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고 봐요. 다만 아이들에게 얘기는 합니다. 결과물이 훌륭해서라기보다는 계속 이런 활동을 해나가라는 의미에서 돈을 지급하는 거라고."  


꿀알바 외에 올해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으로는 '스튜디오명왕성'이 있다. 코로나19로 마비된 일상에 숨구멍을 내고자 작년에 시도했던 온라인방송 '명왕성라이브'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면 된다. 다만 이제는 코로나19라는 상황에 따른 궁여지책이 아닌, 청소년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좀 더 집중해서 듣고 이를 많은 이들과 공유하려는 의도에서 준비 중이라니, 이런 점이 어떻게 반영될지 기대해도 좋겠다. 

"지역에서 청소년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방식은 보통 설문조사로 한정되죠. 질문을 던져주고 정해진 답에 체크를 하게 해요. 매우 그렇다, 조금 그렇다, 아니다, 매우 아니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숫자일 뿐, 거기엔 아이들의 표정이 없잖아요.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요. 스튜디오명왕성은 숫자로 치환될 수 없는, 저마다 다른 표정과 목소리를 지닌 개개인의 메시지를 잘 담아내서 '이런 사람이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세상에는 더 많은 '명왕성들'이 필요해      
 
코디네이터 김한범씨와의 인터뷰 현장
 코디네이터 김한범씨와의 인터뷰 현장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관련사진보기

 
청소년자치공간이라는 모델이 드물다 보니 명왕성을 궁금해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산청과 가까운 구례, 산내, 함양 등지에서는 명왕성이라는 선례를 탐색함으로써 지역 내에 청소년 공간을 시도해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최근엔 이런 흐름을 만들어가는 활동가들이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의 도움에 힘입어 '지리산권 청소년활동공간 네트워크'를 꾸렸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같은 청소년 공간이라 해도 지역에 따라, 또 그걸 만들고 운영하는 주체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만큼 서로 조언과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네트워크를 제안했어요. 또 개인적으로는 '외로워서'죠(웃음).

명왕성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처음 같지 않아요. 현재 상황이 어떤지, 고민은 무엇인지 물어주는 이도 별로 없고요. 그래서 힘들기도 하고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의심이 들 때도 있죠. 다른 지역 활동가들도 사정은 비슷할 테니까 그럼 나라도 그들을 열심히 칭찬해주고 응원해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우리 잘하고 있어요, 하면서 확신도 심어주고 싶고요."


한범씨는 언젠가 청소년자치공간 이름이 명왕성인 것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때는 태양계 행성이었다가 작고 영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 지위를 박탈당한 명왕성처럼, 청소년 또한 이 사회에서 타자가 정한 기준에 의해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있다고. 그런 점에서 둘이 참 닮아 보여 이름을 그리 지었다고. 

듣고 나면 서글퍼지는 이야기다. 그 서글픔이 깊을수록 이 지상에 더 많은 '명왕성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자신을 흔들어대는 외력 속에서 아이들이 중심 잡고 똑바로 서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뭉뚱그려진 무리로서가 아닌, 저마다 다른 눈코입과 마음과 이야기를 지닌 고유의 '나'로 존재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그러려면 지금 발 딛고 선 자리에서 각자의 명왕성을 운행하고 있거나 준비 중인 이들이 덜 외로워야 하고 더 응원받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이런 사람이 살고 있어요' 하고 그들이 신호를 쏘아 올릴 때, 그것을 알아보고 화답해 주는 눈 밝은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글 | 자야
사진 | 임현택
기획/진행 | 누리

-
Author 자야
새벽 요가, 산책길의 노래, 지치지 않을 정도의 텃밭일,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 용기 있고 다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 을 좋아하는 함양 주민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태그:#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 #산청군, #청소년공간, #지역청소년
댓글3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합니다.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공동운영하며, 지리산을 둘러싼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의 시민사회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