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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이건 완전 취(향)저(격)인데?!'

단 15초짜리 광고였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암벽등반을 하고 축구공을 차는 어린아이들. 이 아이들이 거친 스포츠를 하다 다친 후에 씩씩하게 입을 앙다물고 내뱉는 말, "상처엔! 지지 않아!"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우리가 어릴 때, 아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시딘 광고에서는 주저앉아 우는 아이가 등장하고 엄마의 근심 가득한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운 채 상처를 '후~' 하고 불어주는 영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광고에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엄마는커녕 어린아이가 다쳐서 우는 모습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가 강렬하게 와닿으니 효과로 치자면 만점짜리 광고다.

이 광고가 신선했던 건, 늘 수동적으로 표현되었던 아이들을 놀랍도록 능동적으로 표현해서다. 예전 광고에서는 걱정하는 엄마가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다쳐도 씩씩하게 일어서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랄까.

그뿐만 아니라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축구 경기를 하고, 암벽등반을 하는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여자아이라는 것도 신선함의 이유였다.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이렇게 확실하게 뒤집은 예가 그동안 있었던가.

내가 이 광고에 이렇게 격하게 공감하게 된 것은 딸 둘을 둔 엄마로서 겪었던 일들이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남자니까 의사를 해야지"

지금은 코로나로 학교의 모든 외부 행사가 취소되었지만, 큰아이 때는 5학년 때 직업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단체 체험학습을 가는 행사가 있었다. 체험 전에 자기가 체험해볼 직업을 미리 신청해야 하는데, 인기 있는 곳은 금세 마감이 되었다. 그때도 비행기 조종사나 소방관 같은 직업에는 남자아이들이, 파티시에나 헤어디자이너, 비행기 승무원 같은 직업에는 여자아이들이 많이 지원했다.

딸아이가 지원한 동물병원 수술실은 유난히 경쟁률이 치열했는데, 운이 좋게도 아이는 수술실에 당첨이 되었다. 그런데 당첨되었다고 해도 끝이 아니었다. 수술방에는 수의사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간호사 등등의 역할을 정해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수의사를 차지하기 위해 또 한 번의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했다.

공정하기론 둘째가면 서럽다는 가위바위보. 다행히도 또다시 운 좋게 수의사에 당첨된 딸아이는 신나서 체험에 임했지만, 간호사 역할을 맡은 남자아이의 투덜거림을, 강아지 수술 체험을 하는 내내 들어야만 했다고 했다.

"내가 남자니까 내가 의사하고 네가 간호사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는 남자아이의 요구를 끝까지 무시했다며 딸아이는 만족스러운 반응을 전했지만, 그 아이의 말속에 공공연히 녹아있는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척이나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여자는 서울대 가는 것보다 시집 잘 가는 게 낫다'던 시대에 태어나, 자매만 있는 집에서 자라, 결혼하고 딸들만 낳다 보니 이제 나는 딱 그 반대의 말만 하며 딸 둘을 키우고 있다. 어쩌면 나의 육아는 그 말을 온몸으로 부정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처럼 전업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 가장 난감했을 때가 동화책, 특히나 <콩쥐 팥쥐> 같은 전래동화나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은 공주 시리즈를 읽어줄 때였다. 왜 여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집에서 살림을 하고, 왕자를 기다려 인생역전을 하는지.

그나마도 반가웠던 건 견고했던 디즈니의 공주 캐릭터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었다. <겨울 왕국>의 엘사와 안나(엄청난 히트를 쳤던)를 비롯해 <모아나>의 모아나처럼 아이들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캐릭터나 주제가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상으로 바뀌니 아이들도 더 자연스럽게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자유스러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시련을 극복하는 데 있어 남자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하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만 말이다.
 
 영화 <겨울왕국 2> 스틸컷
 영화 <겨울왕국 2>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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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요즘은 '쎈캐'가 대세야"

암벽등반을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축구를 하는 아이가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로 그려진 광고가 한 편 나왔다고 해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야 없을 거다. 하지만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그 바위 같던 고정관념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어쨌거나 환영할 만한 일이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가 아이의 취향도 저격했는지 궁금해져, 초등학생인 딸아이에게 한번 물어보았다.

"요즘은 어떤 여자아이들이 인기가 좋아?"
"음... 엄마, 요즘엔 '쎈캐'(센 캐릭터)가 대세야. 겉으로 보기에 약간 쎄보이는 캐릭터? 그러니까 연예인으로 치면 제시, 화사, OO, OO 같은."

아이가 줄줄이 읊어대는 연예인들의 이름 중에 내가 아는 이름은 많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좋았다. 우리 아이들이 여성성이나 남성성이라는 젠더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갈 앞으로의 미래가 그려진다는 기대 때문에. 아이가 열띤 표정으로 나열하는 그 이름들 속에서 그런 희망이 폴폴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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