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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희 시인.
 고정희 시인.
ⓒ 고정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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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해남의 고 고정희 시인의 생가
 전라남도 해남의 고 고정희 시인의 생가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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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잊고 있던 시 '우리 동네 구자명 씨'를 새삼 떠올렸다. 1987년 시집 <지리산의 봄>에 실린,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으로 시작하는 이 시가 2021년에도 어찌나 생생하게 느껴지던지.

"고정희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한 것 같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부각되고 있지만 여전히 아픔이 이어지는 현실을 마주하며 고정희를 너무도 부르고 싶습니다." 

한국 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시인 고정희(1948~1991). 그가 자신의 시집 이름이자 안식처로 생각했던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흘렀다. 고정희가 속해 있던 대안문화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사람들은 꾸준히 그의 고향인 해남을 찾았고, 2002년부터는 고정희기념사업회가 해남을 중심으로 추모문화제를 열어왔다.

이들에게 고정희 사후 30년인 올해는 더욱 특별하다. '안티 페미니즘'이 정치 자산이 되는 현실 속에서 고정희란 존재는 특별히 소중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난 5월 31일 해남에 남아 있는 고정희 생가에서 최은숙 고정희기념사업회장과 이명숙 고정희30주기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고정희가 떠나고 30년이 지난 시점에 그가 갖고 있던 철학을 우리가 얼마나 잘 계승하고 있을까 고민이 컸어요. 30주기를 통해 고정희를 한 번 더 돌아보고, 우리를 한 번 더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 최은숙

"굉장히 절실한 상황에서 30주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노래하고 싶고,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30주기를 기리고 싶습니다. 너무도 아파하는 여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전달됐으면 좋겠습니다." - 이명숙


"30년 지났지만 고정희의 고발, 여전히 유효" 
  
 고 고정희 시인 30주기 행사를 맡은 최은숙 고정희기념사업회장(오른쪽)과 이명숙 고정희30주기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
 고 고정희 시인 30주기 행사를 맡은 최은숙 고정희기념사업회장(오른쪽)과 이명숙 고정희30주기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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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두 사람은 생전의 고정희와 그다지 인연이 깊지 않다. 국어교사였던 최 회장은 고정희를 '상한 영혼을 위하여'란 시로 처음 만났고, 대학생 시절 문화운동단체에 몸담고 있던 이 위원장은 먼 발치에서 여성운동가 고정희를 목격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에게 고정희가 스민 것은 그들이 해남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해남에 살면서도 고정희를 잘 몰랐던" 것 때문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은" 이들은 고정희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활동을 이어왔고, 고정희를 매개로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특히 이 위원장은 "고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가 고발해왔던 문제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확인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명숙 고정희30주기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
 이명숙 고정희30주기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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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는 자신이 쓴 글을 통해 '여성이 하는 문학이나 여류문학이 아닌 실천문학으로서의 여성해방문학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성의 출연과 체험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를 여성해방문학이 보여줄 수 있었야한다'고 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여성학이 대두되면서 학계에선 고정희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돼왔습니다. 하지만 문화계에선 그러지 못했습니다. 최근 끊임없이 '미투'가 터져나온 문화계 모습을 생각해볼 때, 저는 문화계 주류가 애초부터 고정희의 주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고정희의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에 실린 시들을 보면서 숱한 사람들이 겨우 '고정희 애인'을 논하는 천박한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 이명숙
  
 최은숙 고정희기념사업회장
 최은숙 고정희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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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 하도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오니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조심스럽네요. '만일 고정희가 남성이었다면 이만한 작품을 남긴 시인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미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달라진 것 같지만 달라지지 않은 세상에서 여성해방을 이야기한 고정희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최은숙

인터뷰 초반에도 밝혔듯, 두 사람은 이번 30주기 추모제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누군가 '지금 대한민국은 사춘기를 겪고 있다'고 표현하더라"면서 "이 말이 제게 희망으로 다가왔고 사춘기인 이 시점이 더욱 고정희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아픈 일이 반복되고 용납 안 되는 사태들이 이어지면서 우린 스스로의 분노에 잠식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그런데 사춘기는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위해 내 안의 질문을 쏟아내고 곪으면 터뜨려야 하는 시기잖아요. 고정희는 '끝없는 믿음과 신뢰 속에서 혼돈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새로운 인간성의 실현으로 나가야가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이들에게 고정희의 이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랍니다." - 이명숙

"고정희는 따뜻한 사람... 넉넉한 품으로 약자 끌어안은 시인" 
 
 
 고정희 시인.
 고정희 시인.
ⓒ 고정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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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 고정희가 아닌 '인간 고정희'에 대해 물었다. 고정희의 삶을 '여성주의'만으로 국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1988년 3월 6일 일기엔 "하루 종일 광주항쟁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다. 시인은 역사의 현장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다"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고정희는 '민중'을 이야기했고, '80년 광주'를 써내려갔다. 또한 "이상과 현실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정치 현실과 예술의 혼을 따로 떼어 놓지 못한다"라고 강조한 실천가였으며, 독특한 기독교적 세계관이나 '굿'의 형식을 빌린 시들은 고정희만의 독보적 영역이었다.

두 사람에게서 "따뜻한 사람"이란 답이 돌아왔다.
  
 전라남도 해남의 고 고정희 시인의 생가에 본인이 쓴 '고행, 묵상, 청빈' 문구가 표구되어 걸려 있다.
 전라남도 해남의 고 고정희 시인의 생가에 본인이 쓴 "고행, 묵상, 청빈" 문구가 표구되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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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해남의 고정희 시인 생가에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전남 해남의 고정희 시인 생가에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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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문학의 선구자라고 말하면 요즘말로 쎈 느낌만 들잖아요. 하지만 고정희가 쓴 시 한 편, 한 편을 보면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시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여성을 위한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고 봐요. 그래서 전 그를 사랑꾼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넉넉한 품으로 약자를 끌어안았던 시인이죠. 그래서 고정희를 지금도 찾아오고 기억하며 호명하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의 마지막 문구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를 떠올려봅니다." - 최은숙

"(뒤를 가리키며) 여기 고정희가 직접 쓴 글씨 '고행, 묵상, 청빈'이 그의 삶을 응축하는 단어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역설적일 수도 있지만 참으로 따뜻한 고행자였죠. 모든 생명체에 대한 무한한 따뜻함을 내보인 시인이 바로 고정희입니다." - 이명숙


한편 6월 1일부터 시작된 '고정희 시인 30주기 추모문화제'는 고정희 생가, 녹우당 충헌각, 해남꿈누리센터, 땅끝순례문학관에서 진행되는 ▲ 시 그림전, 시 손글씨전 ▲ 학술대회 ▲ 포엠 콘서트 ▲ 아카이브전 ▲ 추모제 등으로 채워져 6월 20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고정희 시인 30주기 추모문화제' 포스터.
 "고정희 시인 30주기 추모문화제" 포스터.
ⓒ 고정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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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이희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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