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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중항쟁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덕공동체를 구현했다. 이는 파리 코뮌을 능가하는 것으로 오월 광주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의다. 나의 자식만 자식이 아니고 나의 부모만 부모가 아닌 사회를 이룩했다. 모두가 나의 자식, 나의 부모이자 우리의 자식, 우리의 부모로 생각한 시간들이었다. 모두가 하나 되는 세상, 바로 대동(大同)사회를 연출해 낸 것이다.

특히 오월 광주 정신은 5월 26일 밤과 27일 새벽에 새겨져 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시민군은 공수부대와 탱크에 저항했다. 그리고 죽음이 자신을 향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서질 않았다. 진압 전날인 5월 26일 외신기자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죽음을 예감하듯 초연한 모습이었다.

민주주의가 뭔지, 자유와 인권이 뭔지 몰라도 전두환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하면서 시민들은 불의에 저항했다. 야만적인 공수부대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 광주시민들은 눈물로 연대하고 함께 싸웠다.
 
오월 광주항쟁 당시 트럭 위에서 짓밟히고 끌려가는 시민들 조형물
▲ 광주 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에 끌려가는 시민들 조형물 오월 광주항쟁 당시 트럭 위에서 짓밟히고 끌려가는 시민들 조형물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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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인들이 언론을 통해 가짜뉴스를 마구 퍼뜨렸지만 광주 시민들 누구도 믿지 않았다. '광주사태', '무정부 상태', '폭도', '간첩' 등 조작된 언어가 대중의 의식을 통제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누가 박달나무 몽둥이로 잔혹하게 사람을 쳐 죽였는지, 누가 총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짓이겼는지, 누가 대검으로 19살 처녀의 가슴을 도려냈는지 광주 시민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오월 광주 항쟁 당시 전시사진 조형물
▲ 오월 광주 항쟁 당시 전시 사진 오월 광주 항쟁 당시 전시사진 조형물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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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조차도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했고 진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 광주에선 5‧18 항쟁 기간이 돌아오면 5‧18 하루를 휴업일로 하는 학교가 50%에 이른다. 교사-학생들이 추모행사에 참여하고 5‧18 운정동 국립묘지를 참배하기 때문이다.

절반에 이른 나머지 학교들은 다른 시도와 달리 학교에서 글쓰기, 주먹밥 행사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언젠가 전두환이 광주 법정에 출두할 때 근처 초등학교 학생들이 구호를 외친 것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5‧18은 초등학생을 포함해 모든 광주 시민들 영혼에 스며든 울림이자 삶의 정신적 기둥이다.

5월 26일 밤과 27일 새벽 광주항쟁의 마지막 보루인 전남도청엔 죽음을 결심한 사람들만 남았다. 도청 진압 직전 살고자 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자신의 의지대로 도청을 떠나거나 아니면 너무 나이가 어려서 강제로 내보내졌다.

시민군은 가두방송을 통해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고 애절하게 호소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그 처연한 방송 소리에 이불 속에서 숨죽이며 듣고 있던 광주 시민들은 시민군이 '폭도'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순간 함께 하지 못함을 이불 속에서 흐느꼈다.

80년 5월 광주가 잔혹하고 처참하게 진압당한 지 7년 뒤 6월 시민 항쟁이 전국을 강타했다. 그것은 그때 살아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이 저항의 불길로 용솟음친 탓이다. 군부독재의 불의에 맞서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게 했던 저항의 불길은 광주 항쟁 당시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 만들어 낸 절규였다.

그렇게 오월 광주는 6월 항쟁으로 오롯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다시 군부독재의 적폐세력인 박근혜 정권에 맞서 촛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2016-2017년 촛불항쟁, 그리고 2019 광화문과 서초동 촛불시위는 오월 광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교대역에서 서초역으로 가는 대로변에 공수처 설치와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촛불 시민들로 가득하다.
▲ 공수처 설치와 검찰개혁을 촉구한 서초동 촛불 시위 장면(2019. 9. 28)  교대역에서 서초역으로 가는 대로변에 공수처 설치와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촛불 시민들로 가득하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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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촛불의 힘으로 어렵게 공수처를 탄생시켰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모두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광주의 정신을 부활시키고자 애쓴 결과였다. 한 마디로 공수처는 5‧18 광주 정신의 산물인 셈이다.

그런데 그 공수처가 교육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진보교육감을 수사 대상 1호로 삼았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난 해직교사들을 진보교육감이 본래 자리로 복직시킨 것은 과거사를 바로 잡는 행정행위로 화합 차원에서 정당했다. 한 마디로 무너진 교육정의를 서울교육 수장이 바로 세운 것이다.

조희연 교육감이 누구인가! 대학 시절 박정희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9호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던 사람이다. 80년대엔 학술운동을 통해 비판사회학자로서 한국 사회 변혁이론을 연구했던 인물이다.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은 그런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80년대 한국 사회변동과 사회변혁에 대한 이론을 정리한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박현채, 조희연 선생이 편집 출간했다.
▲ <한국사회구성체 논쟁> 이론을 정리한 책 표지 80년대 한국 사회변동과 사회변혁에 대한 이론을 정리한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박현채, 조희연 선생이 편집 출간했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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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사회가 시민사회로 첫걸음을 떼자 90년대에 시민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1994년 창립된 참여연대 초대 사무처장이 바로 조희연 선생이다.

2010년 공정택이 강행한 학교선택제는 학교현장을 강타하면서 고등학교조차 서열화시켰다. 자사고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일반 인문고는 교육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교권은 추락했고 경쟁이 격화된 속에서 아이들은 상처를 받았다.

2014년 교육감에 당선되자 조희연 선생은 망가진 교육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대안교실, 희망교실, 오딧세이학교 등 대안교육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혁신학교를 확산시킴으로써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노력 또한 멈추질 않았다.
 
혁신교육을 확산시키고자 서울시 교육청에서 만든 혁신학교 포스터
▲ 서울시 교육청 혁신학교 포스터 혁신교육을 확산시키고자 서울시 교육청에서 만든 혁신학교 포스터
ⓒ 서울시 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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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희연 서울교육청은 군부쿠데타로 고통 받는 미얀마 시민들을 위해 투쟁기금을 모았다. 무려 2500만 원을 모아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기부했다. 답장으로 감사 편지까지 받았다. 그는 과거 학생운동으로 70년대 말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2013년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억울하게 옥살이한 조희연 선생은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배상금 5,600만원을 받았는데 전액을 아시아 민주주의와 정치적 난민 지원에 기부했다.

특별채용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절차를 보완하면 될 일이지 감사원의 행태처럼 경찰에 고발할 일은 아니다. 더구나 공수처의 수사 대상 1호로 삼을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5‧18 광주항쟁 기간 첫날 공수처는 서울시 교육청을 전격 압수수색을 강행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처사였다.
 
서울교육감을 수사 대상 1호로 발표한 공수처의 압수수색을 규탄하는 플래카드
▲ 공수처 수사를 규탄하는 항의 플래카드(서울교육청 앞) 서울교육감을 수사 대상 1호로 발표한 공수처의 압수수색을 규탄하는 플래카드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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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광주의 정신과 6월 시민항쟁, 그리고 촛불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공수처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의를 성찰하고 역사적 책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 길만이 공수처가 사는 길이자 정도를 걷는 공수처의 제대로 된 모습이다.

태그:#공수처, #6월 항쟁, #진보교육감, #오월 광주정신, #촛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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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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