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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태안문화원이 발간한 <일제 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 표지
 사진은 태안문화원이 발간한 <일제 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 표지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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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문화원에서 특별한 책을 발간하게 됐습니다. 1933년 일본인 하야시세이죠가 쓴 안면도라는 책자입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아소상점'의 안면도 임업소장으로 근무한 일본인의 시각에서 정리한 글이지만, 당시 안면도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사료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태안문화원이 발간한 '일제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 책자에 대한 정낙추 태안문화원장의 서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면도는 일제강점기 당시였던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아 갈 목적으로 설치한 국책회사이자 식민지 착취기관이었던 동약척식주식회사와 아소 가문이 안면도의 소유권을 놓고 경쟁한 곳이었다. 안면도의 경매는 그만큼 총독부의 큰 사업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신문지상에 "도끼 하나 있으면 누워서 먹을 수 있는 안면도"라고 소개될 정도로 안면도의 산림은 총독부 산림정책의 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1927년 3월 23일 경매에서 주식회사 아소상점이 823,000원으로 안면도 산림과 토지를 낙찰받아 안면도 임업소를 개설해 경영하게 됐다.

일본어로 쓴 <안면도>를 번역해 10여년 만에 빛 본 <일제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

 
일제강점기 당시 안면도 승언리 마을
 일제강점기 당시 안면도 승언리 마을
ⓒ 태안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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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소상점으로 대표되는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안면도의 산림 형태와 주민들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그 당시를 짐작할 수 있는 책 <일제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이 충청남도와 태안군에서 지원하는 '2020년도 지방문화원 활성화 및 향토문화발굴육성사업'으로 태안문화원(원장 정낙추)에서 발간해 눈길을 끌고 있다.
 
2011년 안면도휴양림의 산속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하야시 세이죠’의 비석.
▲ <안면도>의 저자 하야시 세이죠의 비석 2011년 안면도휴양림의 산속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하야시 세이죠’의 비석.
ⓒ 태안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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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도 안면도자연휴양림의 산속에 묻혀 있던 일본인 '하야시 세이죠(林省三, 임성삼)'의 비석이 발견되어 관련된 사료의 수집과 연구를 시작하고 그가 일본어로 쓴 <안면도>를 번역하여 10여년 만에 이 책을 출간하게 됐다.

일본인 하야시 세이죠가 일제강점기 안면도에 거주하면서 쓴 책인 <안면도>는 100여 년 전 안면도의 사람들과 안면송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이 책은 <안면도>를 번역함은 물론 이해를 돕기 위해 최석영(국립극장공연예술박물관장), 오석민(지역문화연구소장), 김월배(하얼빈 이공대학교, 안중근 유해 찾기 본부장) 박사가 각각의 관점으로 식민지 상태의 안면도에 대한 논고를 덧붙여서 당시의 시대상과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구성했다.

당시 탄광 재벌인 아소상점은 조선시대 궁궐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할 적송 생산지인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관리되던 안면도를 1925년 조선총독부의 임업정책에 따라 국가 보존산림(要存國有林)에서 해제되자 미츠이물산(三井物産),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와 입찰에 참여해 경쟁 끝에 불하받았다. 아소상점이 안면도를 탐낸 건 소나무를 탄광의 갱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나이 지긋한 안면도 어른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마생이'(麻生)-아소상점(麻生商店)은 일제 강점기인 1927년부터 1945년 패망까지 안면도의 임야를 거의 소유했던 일본 재벌이다.

일본 총리를 역임했고 현 내각의 재무대신이며 '식민지근대화 망언제조기'로 유명한데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먹어도 된다고 막말한 아소 타로(麻生太郞)의 가문이 바로 아소상점이다.

하야시 세이죠는 아소상점이 안면도를 불하받게 되자 소나무 관리를 위해 임업사업소장으로 부임한 사람이다. 그는 아소상점의 안면도임업사업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섬의 경계 조사와 침간지 정리사업, 적송의 벌목과 반출 등으로 일본 재벌의 식민지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이 사업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근대생활을 가장해 안면도민들의 삶을 식민지적으로 변용한 각종 조합(산림조합, 납세조합, 장학조합 등)을 운영했다. 아소상점과 하야시 세이죠는 거기에다가 간척지 개발을 통한 농지확보 외에 목재 반출에 편리한 지형변형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안면도를 식민통치의 실험대상으로 삼아 여러 시도를 했다.
 
하야시 세이죠가 <안면도> 책자를 발간한 것은 1931년이다. 그가 발간한 <안면도>의 책 표지.
▲ 하야시 세이죠와 그가 저술한 <안면도> 하야시 세이죠가 <안면도> 책자를 발간한 것은 1931년이다. 그가 발간한 <안면도>의 책 표지.
ⓒ 태안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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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세이죠가 <안면도> 책자를 발간한 것은 1931년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하야시 세이죠가 안면도에서 느낀 점과 그가 시도했던 다양한 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그는 안면도를 자신의 작은 식민지로 만들려는 이상향의 꿈이 있었으며, 그 과정과 성공담을 총독부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 발표해 만주국 통치에 적용하기를 바랐다. 1931년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해 만주에 괴뢰국을 세운 해다.

하야시 세이죠는 1941년까지 아소상점의 안면도 임업사업소장으로 근무했는데 이 무렵 송진채취 수탈을 시작했다. 그는 송진채취의 세계적 권위자(?)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으로부터 수입이 단절되면서 전쟁물자의 보급이 어려워지자 일제는 항공유, 페인트 등의 원료인 송진을 식민지 한국에서 수탈했다. 송진 채취의 기술과 도구를 개발한 사람이 하야시 세이죠이며, 실험하고 수탈한 대상이 안면도 소나무였다.
 
지금도 안면도 휴양림 뒤 조개산에 가면 수령 150년이 넘는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져 힘들게 송진을 쏟아 내고 간신히 상처를 봉합한 채로 서있는 처참한 흔적을 볼 수 있다.
▲ 상흔 지금도 안면도 휴양림 뒤 조개산에 가면 수령 150년이 넘는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져 힘들게 송진을 쏟아 내고 간신히 상처를 봉합한 채로 서있는 처참한 흔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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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안면도 휴양림 뒤 조개산(蛤山)에 가면 수령 150년이 넘는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져 힘들게 송진을 쏟아 내고 간신히 상처를 봉합한 채로 서있는 처참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는 송진채취를 통해서 일본의 대륙침략을 황전(皇戰) 또는 성전(聖戰)으로 인식하고 적극 협력하는 데 안면도 젊은이의 징병면제를 이유로 그 노동력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일제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과 관련해 태안문화원 관계자는 "안면도와 섬사람들을 사랑한 것 같지만 실제는 고달픈 역사의 현장을 진두지휘한 기록을 담은 하야시 세이죠의 <안면도>라는 책을 번역하고 그의 행적과 자서전을 추적한 세 가지 논고를 통해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 책은 전국에 소개될 예정이며 군내 행정기관과 도서관에 비치되므로 태안군내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은 옛 안면도와의 끊임없는 대화

책을 펴낸 태안문화원의 정낙추 원장은 "하야시 세이죠가 쓴 <안면도> 책자는 싫든 좋든 우리에게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데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면서 "아소상점이 안면도 소나무를 반출한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됐지만, 소나무 벌채에 관한 이야기와 1920년대 안면도의 사회상은 그 당시 안면도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 원장은 "역사는 미래이고 모든 삶의 시간은 역사"라고 전제한 뒤 "90여 년 전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이 쓴 <안면도>라는 글을 읽으면서 태안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가세로 태안군수도 축하의 글을 통해 "<일제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은 우리만의 기록이 단절되었던 일제강점기 당시 태안지역의 자원수탈현황을 비롯한 안면도의 전반적인 경제, 산업구조, 문화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면서 "또한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관리할 정도로 재질이 우수한 안면송과 함께 태안의 명소인 안면도의 역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가 군수는 덧붙여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안면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안면도의 역사와 문화의 발전상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다"면서 "앞으로 이 책자가 안면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 향토사 연구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끝으로 <일제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을 집필한 최석영, 오석민, 김월배 저자의 논고 중 일부를 기록에 남기고자 한다.

「안면도 하면 보통 함께 떠오른다는 '마생(麻生)이' 임업소장 임성삼(하야시세이죠) 혹은 하야시가 1911년 3월 3일에 조선에 건너와서 패전을 맞이하여 일본으로 돌아가 가나기와현 사가미하라시에 정착할 때까지 부산 구포와 안면도, 그리고 전후 일본의 역사 무대에서 농장 야석원 경영주와 일본 재벌 아소상점 직원, 그리고 미츠비시의 촉탁으로써 재조일본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울린 이중변주곡(식민지통치에 대한 비판과 협력, 그리고 식민지 기억의 지속)을 스케치해 본 것이다.」 -최석영 논고-
 
「현재까지 아소상점에서 추진된 간척사업 대상지와 그 과정 및 결과에 대한 조사는 진행된 적이 없다. 또한 안면도 간척사업에는 다양한 외부 자본이 참여한 듯한데, 이러한 조사연구가 축적된다면 일제강점기 이후 안면도의 생태환경 자체를 변화시켰던 간척사의 전모가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석민 논고-
 
「안면도는 만주 건설의 낙토 부제목을 생각해 보면 일본인들의 본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만주 경영을 위한 기초적 실험장 역할을 안면도에서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김월배 논고-

덧붙이는 글 | 태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안면도, #아소상점,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 #하야시 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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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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