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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근대 도서관 제도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도서관은 이제 시민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일상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 역사와 도서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잊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서관 선구자임에도 잊힌 사람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을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잊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기자말]
1920년 규슈(九州) 야마구치현(山口県)에 조선 서책과 문화재를 소장한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조선에도 도서관이 흔치 않던 그 시절, 조선 고서로 장서를 채운 도서관이 일본 땅에서 개관한 건 어떤 사연 때문일까? 이 도서관 이름은 '오호데라우치문고'(櫻圃寺內文庫)다.

'오호'(櫻圃)는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호다. 맞다. 이 도서관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유언에 따라 그의 가문이 세운 도서관이다. 지금부터 데라우치와 그의 도서관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한다.

그의 성이 '데라우치'인 이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계획한 이 도서관은 마사타케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남 히사이치가 세웠다. 야마구치현립 대학 정문 근처에 있다. 주소는 야마구치시 사쿠라바타케 3정목 1-49다. JR 야마구치선 미야노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다.
▲ 오호데라우치문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계획한 이 도서관은 마사타케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남 히사이치가 세웠다. 야마구치현립 대학 정문 근처에 있다. 주소는 야마구치시 사쿠라바타케 3정목 1-49다. JR 야마구치선 미야노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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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852년 2월 24일 스오국(周防国) 야마구치(山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타다 쇼스케(宇田多正輔), 어머니는 다케코다. 그의 성이 우타다가 아닌 '데라우치'인 이유는, 어머니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868년 조슈번이 만든 미타테대(御楯隊)에 들어가 보신전쟁(戊辰戰爭)에 참여했다.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데라우치가 '일본 군대의 창시자'이자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심복이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야마가타는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利益線)이라고 주장했다.

'이익선'으로 조선을 확보하지 않으면 일본의 '주권선'(主權線)이 위태로워진다고 야마가타는 강조했다. 야마가타의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걸었다. 훗날 데라우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가쓰라 타로(桂太郞)에 이어 조슈벌(長州閥)의 적통을 잇는 후계자로 부상한다.
 
야마가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함께 ‘조슈(長州) 3존’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일본 군벌과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꼽힌다. 일본 의회제도 체제에서 최초의 총리를 지냈다. 청일전쟁 후 1898년 원수가 되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공작이 되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 야마가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함께 ‘조슈(長州) 3존’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일본 군벌과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꼽힌다. 일본 의회제도 체제에서 최초의 총리를 지냈다. 청일전쟁 후 1898년 원수가 되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공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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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8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데라우치는 육군교도단에 배치되었다. 여섯 달 만에 소위에서 대위까지 승진했다고 하니, 고속 승진을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불구인 그가 육군대신이 된 이유

1877년 3월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 터졌다. 세이난전쟁 다바루자카(田原坂) 전투에서 데라우치는 오른손에 중상을 입었다. 총에 맞아 오른손이 불구가 됐음에도 데라우치는 전역하지 않았다. 조슈 군벌의 비호 속에 그는 승승장구했다.

데라우치는 육군대신 관방부장을 거쳐, 1887년 11월 대좌로 진급하면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청일전쟁에 참전해서 소장이 된 그는 1898년 1월 육군 교육총감에 취임, 육군 교육행정의 책임자가 되었다.

1902년 3월 데라우치는 1차 가쓰라 타로 내각의 육군대신이 되었다. 재임 중 터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육군대신을 연임했다. 1906년 데라우치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전장에서 제대로 싸우지 않은 그가 육군대장으로 승진하자, 조슈벌의 인사 횡포가 심하다는 비난이 일었다.

1908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고 화족이 되었다. 1908년 7월 2차 가쓰라 타로 내각에서 육군대신이 되면서 데라우치는 9년 5개월에 걸쳐 일본 육군의 최고 통수권자로 군림했다. 세이난전쟁 이후 데라우치는 단 한 번의 실전도 경험하지 않고 육군 총수 자리에 오른 것이다. 

1910년 5월 30일 데라우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 이어, 3대 조선통감으로 취임했다. 육군대신과 조선통감을 겸임한 그는 조선을 일본에 강제병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통감 취임 직후 헌병에게 경찰권을 부여한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한 그는 이른바 '무단통치'로 조선의 독립의지를 꺾으려 했다.

조선을 강제병합한 '조슈의 사무라이'
 
1848년 태어났다. 본명은 기요즈미(淸澄)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때 활약했고, 메이지유신에 기여했다. 영일동맹을 체결하며 러일전쟁 승리의 발판을 놓았다.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2,886일 동안 총리대신으로 재임했다.
▲ 가쓰라 타로 1848년 태어났다. 본명은 기요즈미(淸澄)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때 활약했고, 메이지유신에 기여했다. 영일동맹을 체결하며 러일전쟁 승리의 발판을 놓았다.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2,886일 동안 총리대신으로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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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성격의 그는 '조슈(長州)의 사무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데라우치는 조선 총독 다음으로 내각 총리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 데라우치인 만큼 조선의 저항을 완전히 잠재우고, 총리대신으로 가는 포석으로 삼으려 했다. 통감으로 부임하기 위해 경성으로 온 데라우치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제 조선 백성은 굴복 아니면 죽음뿐."

1910년 8월 한일 강제병합 후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자,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 총독이 되었다. 조선 총독은 오직 천황의 명령만을 따르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총독은 무소불위의 독재자였다.

한일 강제병합이 발표되던 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로 알려져 있다. 8개 조항으로 이뤄진 <일한 합병 조약안>은 두 사람이 체결했다. 한 사람은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고, 다른 한 사람은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8월 29일 밤, 데라우치는 총독 관저에서 축배를 들며 이런 즉흥시를 읊었다.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살았더라면 오늘 밤 저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

임진왜란 당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루지 못한 조선 정벌의 꿈을 자신이 이뤘다고 득의양양해서 한 말이다. 조선을 식민화한 공로로 데라우치는 1911년 4월 백작이 되었다.

데라우치가 총독이었던 1910년 11월,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관습과 제도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불온서적'을 압수했다. 이를 위해 전국에 있던 군과 경찰을 동원했다. 압수 대상이 된 책은 단재 신채호의 소설 <성웅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같은 책이었다. 조선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책은 모두 불온서적으로 분류했다.

일제는 종로 일대 서점뿐 아니라 향교, 서원, 사찰, 양반가처럼 책이 있을 만한 곳은 어디든 수색했다. 당시 일제가 불온서적으로 압수한 책은 51종 20여만 권에 달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책을 빼앗아 불태웠다.

데라우치는 조선 책을 불태우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귀중한 서책과 고문서, 서한집을 일본 본토로 무단 반출했다. 가야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조선의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던 데라우치는 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명목으로 문화재를 긁어모았다. 이 중 1,500여 점의 문화재를 개인적으로 빼돌렸다.

데라우치가 일본으로 반출한 고서화는 신라 김생(金生), 고려 시대 유신(柳伸)과 탄연(坦然), 최우(崔瑀) 같은 신품사현(神品四賢)의 글씨, 각 시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학자의 책과 고문서였다.

불온서적의 압수와 분서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 년 후 완성됐다. 석굴암은 1913년 이후 일제가 여러 차례 해체, 조립, 수리하면서 원형이 파손되었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 벽으로 막아 보존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보 24호다.
▲ 1909년 무렵 석굴암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 년 후 완성됐다. 석굴암은 1913년 이후 일제가 여러 차례 해체, 조립, 수리하면서 원형이 파손되었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 벽으로 막아 보존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보 24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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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화재에 대한 데라우치의 관심은 엉뚱한 '파장'을 일으켰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은 1913년 10월 창건 이래 처음으로 완전 해체 후 콘크리트를 부어 넣는 보수 공사를 했다. '보수'가 아닌 '참사'로 결론 난 이 공사는, 1912년 11월 8일 데라우치 총독이 석굴암을 방문한 후 시행되었다.

데라우치는 최신 재료와 설비로 석굴암을 보수해서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려 했다. 데라우치의 조치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가 탄식한 것처럼 '수리'가 아니라 '파손'이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규장각과 지방 4대 사고에 있던 장서를 모두 접수했다. 총독부는 그렇게 접수한 장서 중 무주 적상산 사고에 있던 책을 이왕가에 '기증'하며 생색을 냈다.

자신의 책을 '기증' 받은 조선 왕실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총독부는 "조선총독부 기증"이라는 도장까지 찍어 이왕가에 전달했다. 이 장서인을 찍은 사람은 훗날 22년 동안 조선총독부도서관장을 지낸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로 알려져 있다.

적상산 사고 장서 중 <조선왕조실록>은 창경궁 장서각에 보존되다가 한국전쟁 때 북한 인민군에 의해 평양으로 옮겨졌다. 적상산 사고 <실록> 823책은 김일성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번역해서 발간한 <리조실록>은 적상산 사고본을 바탕으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을 일본으로 반출한 사람
 
도쿄대학(University of Tokyo)은 1877년 4월 개교했다. 일본 최초로 문을 연 제국대학이다. 일본 패전 후 국립대학으로 재편되었다. 오대산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으로 반출된 후 보관된 곳이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이다.
▲ 도쿄대학 도서관 도쿄대학(University of Tokyo)은 1877년 4월 개교했다. 일본 최초로 문을 연 제국대학이다. 일본 패전 후 국립대학으로 재편되었다. 오대산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으로 반출된 후 보관된 곳이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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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제국대학 요청을 받은 데라우치는 오대산 사고(史庫)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일본으로 반출하기도 했다. 1909년 당시 오대산 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 761책, <의궤> 360책, 기타 서책 2,469책을 보관 중이었다.

데라우치는 오대산 사고에서 반출한 <조선왕조실록>을 한일병합 기념으로 도쿄제대에 '기증'했다. 데라우치가 기증한 <조선왕조실록>은 도쿄제대 도서관이 소장하다가 1923년 간토대지진(関東大震災) 때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대출 중이던 74책만 살아남았고, 이 중 27책은 1932년 경성제국대학에, 나머지 47책은 도쿄제대에 그대로 남았다.

2004년 혜문 스님은 도쿄대학 도서관 귀중본 서고에 <조선왕조실록> 47책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혜문 스님은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만들어 반환 운동을 전개하였고, 2006년 도쿄대학은 소장했던 47책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기증'했다. 오대산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92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데라우치는 1915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3질 인쇄해서 총독부 참사관실과 총독부박물관에 한 질씩 소장토록 하고, 나머지 한 질은 교토 센뉴지(泉涌寺)에 봉납하기도 했다. 한일 강제병합 5주년을 기념한답시고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명목으로 경복궁을 파괴한 것도 데라우치 총독 시절이다.

경복궁에 세워진 조선총독부는 1926년 완공되었지만, 신축 계획과 청사 부지, 설계와 예산 배정은 데라우치 시절에 이뤄졌다. 완공 당시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본 제국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빼돌린 규장각 귀중본
 
1841년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학 후 일본에 돌아와 독일을 모델로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45세에 총리 자리에 올랐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다.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 이토 히로부미 1841년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학 후 일본에 돌아와 독일을 모델로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45세에 총리 자리에 올랐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다.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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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이전에 조선 통감을 맡았던 이토 히로부미 역시 조선 귀중본을 일본으로 대량 반출한 인물이다. 한일 강제병합 전인 1908년 이토는 일본 본토에서 전문가를 불러 규장각 서고에 있던 옛 책을 전부 포쇄하면서 <규장각폭서목록>(奎章閣暴暑目錄)을 만들었다.

목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귀중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옮겨 조선 역사에 대해 연구하도록 했다. 1911년 5월 15일 일본 궁내부 대신 와타나베 치아키(渡邊千秋)가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보낸 공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관계 사항의 조사를 목적으로 일본에 가져온 조선의 서적이 다수 있는바, 이토가 죽은 후로 이 책은 궁내성(宮內省) 도서료(圖書寮)에 보관되고 있음. 이는 일본 왕족 및 공족(公族)의 실록편수(實錄編修)에 참고도서로 필요하며, 또한 이 조선 책들은 일본의 제실도서관에도 없는 것이니 아주 양도되기를 원함."

1968년 이 사실을 밝힌 사람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일한 사서 백린(白麟)이다. 백린은 규장각 자료를 정리하다가 1911년 총독부 취조국 서류를 발견했다. 이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일본으로 빼돌린 귀중본 목록도 찾았다.

이토가 빼돌린 66종 938책 중에는 국내에 없는 유일본과 낙질본이 다수 있었다. 이토가 반출한 귀중본은 1965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으로 모두 돌아왔다. 이토는 1909년 죽었지만, 그가 가져간 조선 귀중본은 100년이 지나서야 우리에게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우리는 나라만 잃은 것이 아니다. 많은 것을 함께 잃었다. 해방 후 긴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나라와 함께 잃은 것들을 얼마나 되찾은 걸까.

- 2편 한국 도서관 역사상 '최고 악당'은 이 사람입니다로 이어집니다. 

태그:#데라우치 마사타케, #오호데라우치문고, #일제강점기, #도서관,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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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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