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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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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의 대부분을 아들인 정길주씨(70)와 며느리인 김향자씨(63)가 도맡아줬고 1시간도 안 된 짧은 인터뷰였다. 그러나 그 시간은 인생이 늘 그렇듯 웃었다가 슬펐다가하는 희노애락이, 열아홉 소녀의 얼굴에서 펼쳐졌다. 

엄마의 고향은 평일도라고 했다. 엄마의 나이, 열하고도 아홉 살이었다는데, 이곳 생일도로 시집왔던 고모가 중신을 서 시집을 오게 됐다고. '아버지는 어떠셨소?' 했더니, 그 말에 일만촉광의 빛이 방안에 켜지듯 엄마의 얼굴이 복사꽃처럼 환해진다.

옆에 있던 김향자씨가 금새 어디론가로 가, 사진 한 장을 꺼내온다. 2대8의 가르마에 정갈하게 빗어 넘긴 풍성한 검은머리, 숯검뎅이 같은 눈썹이 한 눈에 보기에도 빛나고 고결한 얼굴에 신선과 같은 뛰어난 풍채를 일컫는 옥골선풍(玉骨仙風)이다. 잘생긴 미남자, 혼잣말로 '젊으셨을 때 려인(麗人)들, 여럿 깨나 여러 울리셨겠구나!' 그 말을 들었는지 옆에 있던 김향자씨가 "하하하" 웃고, 옆에서 있던 정길주씨도 거든다. 

"한마디로 장사셨지요, 장사!"

그러자 어어지는 김향자씨의 말.

"그래서 우리 엄니가 마음 고생이 참, 많으셨지요!"
"아마 30년은 가슴앓이를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것도 지척거리에서"
"엄니는 가끔 홀로 방안에서 노래를 하셨는데, 이것이 세~상이더냐~? 이것이 무슨 세~상이더냐~?"


노래 제목은 모르겠는데, 세상을 한탄하는 노래소리였다고.

며느리는 가끔씩 엄마에게 "엄니는 참 많이 서러워것소! 아버지랑 사시느라 고생이 정말 많으셨것소." 그리해 엄마의 자식들도 "우리는 조강지처만을 사랑하자!"고 다짐했다는데,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 받는 일보단 훨씬 힘들기에 더 고차원적인 사랑. 어디 꽃이 향기를 주고도 값을 바라던가? 나무가 그늘을 제공하고도 대가를 요구하던가? 이것이 무위의 사랑. 가슴과 영혼으로 하는 그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현재적 아름다움을 마주하는 일.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란 아름다움과 마주하고 있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닌 친정엄마와 친딸 이상 같았다.

며느리인 김향자씨는 약산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다고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신우철 군수와 조인호 전 의장이 함께한 자리에서 신우철 군수가 자신의 고향인 약산을 빗대며 "왜, 더 좋은 곳으로(육지에 더 가까운) 가지, 이리로 오셨소?" 했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조인호 전 의장이 "금일이 더 좋으니까 이곳으로 온 거제"하며 맞받았다고.

현재 아들 정길주씨는 어업일을 하고 있고, 며느리인 김향자씨는 요양보호사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들 내외의 금슬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는 낯빛이었지만, 가끔은 싸우기도 했다고. 간이 안좋은 가족력 때문에 남편이 술을 먹고 올 때면 대판 싸운다는데 화해의 손길 또한 엄마가 풀어준단다.

아들 내외가 심하게 싸운 날이면, 엄마는 양푼에다 밥과 이것저것을 넣고서 고추장을 풀어 쓱쓱 비벼 내놓으며, "힘내서 싸워라!" 그러면 대개 풀어지는데, 어떤 때는 김향자씨가 너무 속상해 2박 3일까지 갈 때도 있다고.

그때의 엄마는 "미워도 그걸 참아내는 일이다"라고 하셨단다. 그랬는데도 며느리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으면 "아야! 아들은 쫒아내고 니랑 내랑만 살자!"고 하면, 그때 며느리는 "엄니도 미워요", 그러면 엄마가 다시 받아지는 말 "근디 나도 그러더라야!"

정길주 아들 내외에겐 큰 아들인 정용욱 씨(27)가 군대 제대 후 조대 건축과 졸업반이라고 했다.

엄마의 슬하엔 4남 1녀를 뒀는데, 현재는 3남뿐이란다. 큰 아들은 엄마 곁에, 둘째는 부산에서 휴양중이고, 막내아들은 인천에서 도금 공장을 운영한다고. 그리고 딸과 아들 하나를 먼저 보내야 했다고.

삶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이었지만, 남은 자식들에겐 전혀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손자인 용욱 씨가 어릴 때, 며느리인 향자 씨에게 그랬단다.

"엄마, 할머니가 밭에서 혼자 울고 있어요!"

그 말에 자신의 가슴도 그렇게 무너지는데,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져 내릴까했다는 김향자씨. 엄마는 지금도 불을 넣지 않고 주무시는데, 그건 자식들을 먼저 보낸 가슴의 한 때문이라고.

이후 4번의 수술에 등에 욕창까지. 엄마가 너무 장해보여, 두 손을 꼭 잡아주면서 "어머니, 고맙소! 정말 장하요" 하는데,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누가 해주시던가요?' 물었더니, 그 말에 엄마가 고개를 떨군다. 이어 김향자씨의 말.

"딸이 해줬어요!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입고 싶은 것 못 입으면서 자식들을 키워준 엄마에게 보은하고자 두툼한 금쌍가락지를 해줬는데, 그만 딸이 먼저 가게됐지요."

딸을 잃고서 딸과 인연이 됐던 모든 물건을 며느리에게 줬는데, 보고 있음 그 생각에 마음이 더 아파와서였다고. 반지까지 줬는데,  그것 하나만은 엄마가 간직할 수 있도록 손에 꼭 끼워드렸단다.

김향자씨에게 "엄니,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요양원엔 안 모시나요?" 물었다. 그랬더니 "제가 있는데 당연히 여기서 모셔야지요. 엄니 가실 때까지"란다. 

엄마가 사는 집까지 안내를 해줬던 금일읍사무소의 이재희씨는 "사랑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온다는데 오늘 이곳을 방문해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하루 내내 꽃만 피울 것 같다고. 사랑은 오랜 경험에서도 오지 않는데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고목나무에선 새잎 돋나니 세월 흘러도 서러워 할 것은 없는 것 같다. 꽃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가장 외롭고 쓸쓸한 나무가 진정 꽃이 되는 걸,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저 고운 꽃비를 혼자 다 맞았네
맑게 쏟아지는 꽃비의 음성,
향기롭고 달콤한 향기는
온몸으로 번져가고
온혈관에 스며드는 봄빛에
그대의 머릿결처럼 휘날리는
꽃비로 흠뻑 샴푸하고
그대 생각으로
윤기 넘치게 린스했던
봄빛 머릿결을 휘날리던 열아홉 꽃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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