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백성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허균의 "호민론". <성소부부고> 권 11에 실려 있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 연세대학교

관련사진보기

 
전란 뒤끝의 혼란기인 까닭인지 그의 벼슬자리는 자주 바뀌었다.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이 되었을 적에 병조정랑이 주어졌다가 8월에 성균관사예, 10월에 사복시정, 1603년 여름에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다가 해직되었다. 춘추관은 시정의 기록을 맡은 관아였다. 

해직되어 고향 강릉으로 가던 길에 금강산을 구경하였다. 이즈음 시 48수를 모아 「풍악 기행」을 엮었다. 내용 중에 "못 속에 잠겨 용으로 화하리라"는 '이무기'의 야심이 살짝 드러난다.

       금강산 구정봉

 안쪽 산은 희고도 교묘한데
 바깥 산 쪽은 푸르고도 웅장해라. 
 교묘하게 깎아 낸 솜씨는 사람의 힘을 빈 듯싶고
 웅장한 모습은 참으로 하늘의 공력이어라.
 아침 일찌기 구정봉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마음의 눈까지 열렸지만,
 두 산이 서로 모습이 달라
 어느 게 낫고 못하다 할 수 없을레라.
 바다 안개가 자욱이 깔렸는데
 동쪽에서 돋은 해는 벌써 골짜기 위에 올라,
 연기와 노을은 번득이며 비추고
 풀과 나뭇잎들도 푸르게 반짝이네.
 여러 골짜기들은 다투어 가며 솟아서
 파도와 같이 큰 바람을 불어 주는데,
 높은 산봉우리들이 깊은 못을 에워싸고
 늙은 이무기가 그 가운데 서려 있어라.
 흥도 다 스러져 가파른 골짜길 내려갔더니
 수풀 끄트머리에 절간이 나타났네.
 쓰러져서 낮잠을 한숨 붙인 새
 꿈속에서 이 몸이 백옥루에 올랐어라.
 내 언젠간 여기로 집을 옮겨 와서
 못 속에 잠겨 용으로 화하리라.
 옛 자취를 스님이 말해주니
 꿈틀거리던 흔적을 아직도 찾아볼 수 있네.
 짙은 물안개가 가랑비로 바뀌고
 한낮인데도 구름이 덮여 어둑하길래,
 바로 눈앞에 비로봉이 있었건만
 나의 지팡이를 옮겨 갈 수가 없었어라. (주석 1)


조선시대 중앙부처의 하급 관리들은 지방의 수령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중앙관리들은 급료가 지극히 적은데다 일거리는 많았다. 한 지방의 목사나 사또자리에 오르면 그 지역의 명실상부한 통치자가 되었다. 주민의 생살여탈권이 주어지고 음탕한 관리들은 온갖 환락을 누렸다. 물산이 풍족한 지방에 가면 단단히 한 몫을 챙기기도 하였다.

허균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스물여섯 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래 10여 년 동안 변변히 '기름진' 자리는 한 번도 차지하지 못하였다. 가는 곳마다 일거리만 많았다. 그래선지 자신을 한탄하는 시 「자탄(自歎)」을 지었다. '남궁선생'은 자신을 일컫는다.  

          자    탄

 남궁선생은 본디 어리석은 데다 
 서른두 살에 벌써 머리가 희어졌네.
 수레 뒤에 티끌에까지 절하던 반악을 싫어하고
 수놓인 옷에 절월(節鉞)을 지녔던 사상을 부러워했지.
 길게 늘어뜨린 인장과 인끈은 누구에게 돌아갔나
 요즘도 승상에게선 자주 꾸지람만 듣네.
 봉래산에 찾아가 학과 피리 소리나 들으려 해도
 봄날의 복사꽃 소식을 서왕모가 알려주지 않네.
 장안의 귀인들이야 모두 아는 얼굴이건만
 붉은 대문이 높아서 만나볼 수가 없네.
 사또 자리나 하나 얻으면 하늘에 오른 듯하겠건만
 약수 삼천 리가 맑아지지 않아 건널 수 없네. (주석 2) 

 
강릉 '초당마을숲' 허난설헌·허균 생가터
 강릉 "초당마을숲" 허난설헌·허균 생가터
ⓒ 신한슬

관련사진보기

 
그의 파란굴곡의 삶에서 이 때가 그나마 허균에게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여기저기 관직은 옮겨다녔지만 일정한 급료가 나왔다.

고향으로 내려와 시간을 보내면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유교를 국시로 삼아 개국한 조선왕조는 임진전쟁 때 승려들이 승병을 조직하여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하고, 1605년(선조 38) 사명당 유정(惟政)이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 3,000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등 큰 역할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천시하는 풍조는 바뀌지 않았다. 

유정은 전란 중 강화회담을 하러 왜군 진영에 들어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고 묻자, "네 머리를 베어오면 금 1000근과 1만 호의 고을을 봉해주겠다고 하니 네 머리가 바로 보배다"라고 대답하는 등 담대함을 보여, 백성들의 숭앙을 받았다.

허균은 어머니와 아내, 어린 자식을 떠나보내고, 전란으로 무수한 백성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차츰 생(生)에 대해 허무감에 빠지고, 젊은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뒷날 쓴 「한정록서(閑情錄序)」에서 도교와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던 동기를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오호라!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어찌 존귀한 관작을 멸기하고 산림에로 길이 가버리려 할 자가 있으리오. 오직 그 도(道)와 속(俗)이 다르고, 운명과 때가 어기어진 즉 혹 고상함을 의탁하여 세상을 도피하는 자가 있으니, 그 뜻이 참으로 슬프도다! (주석 3)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관련사진보기

 
그는 고답적인 예교주의나 세속의 권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사대부 신분이지만 그 울타리에 갇히려 하지도 않았다. 고루한 양반 사대부들보다는 방외적(方外的)인 품성 때문이었다. 방일한 기질과 직선적인 성격으로 관리들과 수시로 부딪혔다. 

현실에 동화되지 못하고 방황과 갈등과 자학 그리고 시대와 불화가 심화되어 차츰 국외자ㆍ열외자의 아웃사이더의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이 기생과 사귀고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인간의 양면성과 복잡성, 이중성과 위선을 빠짐없이 갖추는 방외적 지식인의 전형이다. 

비록 그가 유가의 집에서 태어났을지라도 불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던 모양이다. 더욱이 그의 천재적 두뇌는 백가(百家)를 섭렵하다가 보면 부지불식간에 노불(老佛)의 영향을 받게도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소동파(蘇東坡)가 역시 노불의 기호한 것에도 그의 관심이 저절로 노블에 쏠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노불에 관심 경도한 것은 비단 파면 실의로 인한 것만은 아니라 하겠다. (주석 4)

그는 설흔여섯이 되는 1604년 9월에 바라던 수안(遂安) 군수에 제수되었다. 황해도 북부에 있는 군으로 금광이 유명하며 도자기ㆍ창호지 등이 생산되었다. 가토사(駕土寺)란 절이 널리 알려진다.

부임하니 군정이 엉망이었다. 토호 몇을 불러다가 죄상을 논하고 곤장을 치게 했는데 그중 하나가 죽었다. 그 아들이 관찰사에게 뇌물을 주고, 또 불교를 믿는다고 탄핵되어 2년 만에 물러났다. 

다시 실직자가 되어 흠뻑 자유로움을 즐긴다. 불교에 더 깊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 무렵 인연이 있던 서산대사에게 서찰을 보내었다.

이 몸은 무명종자 중에서 생하여 피골이 상연하니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육진(六塵)의 죄로 서로 다투어 날마다 무기를 사용합니다. 이제 무정삼매(無静三昧)로 이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지세히 생각해보니 사람이나 만물이 다 공(空)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중생의 몸은 한 가지로 태허(太虛) 한데 번뇌가 머리에 발붙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는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오나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주석 5)
  

유학자가 불교를 믿고 불학에 정념함은 곧 이단의 길이었다. 조선사회는 '도문일치(道文一致)'라 하여 유도(유학) 이외의 것은 모두 이단사설로 배척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17세기에는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하면서 조금이라도 주자(朱子)와 의견이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처단하였다.

이 같은 시국에서 관리의 신분으로 숭불의 행위는 마치 섭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간 격이었다. 

그는 당시의 벼슬아치들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지금의 위유(僞儒)들은 공언(空言)과 허담을 농하면서 움쩍하면 이윤ㆍ도설ㆍ주공ㆍ공자의 사업으로서 스스로 기약하고, 그 세상에 쓰이게 되면 손발을 놀리지도 못하고 실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스스로 거두지도 못한다. 그러니 당세는 웃고 후세는 비난하게 된다. 좀 약삭빠른 자는 미리 이럴 것을 헤아리고 그 명망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문득 세상에 나가지 아니함으로써 그 졸렬함을 감추어 버린다. (주석 6)


주석
1> 허경진 옮김, 『교산 헌균시집』, 91~92쪽.
2> 앞의 책, 160쪽.
3> 배종호, 「허균문학에 나타난 철학사상」, 김열규ㆍ신동욱 편집, 『허균연구』, 88쪽, 재인용, 새문사, 1986.
4> 앞의 책, 89쪽. 
5> 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국역 성소부부고』, 권21, 문부 18, 임인 3월.
6> 앞의 책.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