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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을 약속했다. 100년 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워싱턴 대행진에서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전설로 남겼다. 그리고도 50년이 넘게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인종차별은 미국에 잔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 혁명을 상징하는 나라, 프랑스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것은 1946년이다.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할 때 중세의 봉건사회까지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는 지난 100년 안에서도 치열하게 평등과 공정을 논의해왔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021년 새해 벽두.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이 등장하자마자 (적어도 한국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저자는 무려 마이클 샌델이다. 11년 전 '정의'를 돌아보게 했던 그가 이번에는 '공정(公正)'을 화두로 삼은 것이다. 하버드에 몸담은 최고의 석학이 세계 최강대국인 본인의 나라, 미국을 겨냥하고 있어 의미가 남다르다.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기회의 땅이 아니던가!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의 전제는 기회 자체의 공평함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더없는 착각이라니! 읽다 보니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바로 내가 발 딛고 선 대한민국의 폐부를 찌르는 진단이기도 한 불공정을 '착각'이라는 단어로 세게 얻어맞을 줄이야. 

능력주의에 발목 잡힌 평등과 공정 
 
책 표지 공정하다는 착각
▲ 책 표지 공정하다는 착각
ⓒ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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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33명의 부유한 학부모가 자녀를 명문대에 입학시키기 위해 입시 부정에 연루됐던 제법 쇼킹한 뉴스였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왜 그렇게 한국의 교육환경을 칭송했는지 이해되는 뉴스이기도 했다.) 명문대를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얻게 되고, 많은 돈을 벌게 되며, 그것이 소위 21세기 상류층이 된다는 공식의 부작용이었다.

학력주의든 능력주의든 그들을 따라가면 궁극에는 돈을 포함한 부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모두 자본주의가 낳은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결탁해 '능력'이라는 기회의 공정성을 내세워 봉건사회를 과거로 밀어냈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 대한민국에서 그 공정을 얼마나 체감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공정성 체감도가 낮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있으면 가능해", "나만 잘하면 될 문제야"와 같은 믿음이다. 아니 지독히 잔인한 채찍질이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기득권이 '능력주의가 공평하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얼마나 잘 감추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종, 성별, 국경을 막 벗어나고 있는 평등과 공정은 능력주의(학벌주의)에 제대로 발목 잡혔다. 

1958년. '능력주의'라는 말이 탄생했다.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던 마이클 영에 의해서다. 그는 2034년 시점으로 저술한 <능력주의>를 통해 능력주의 사회를 견제하고 비판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이클 영의 우려와는 반대로 현재 능력주의는 수많은 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를 떠받드는 원동력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마이클 영을 지지한다. 능력주의의 맹점은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절망을 합리화시키는 것이라면서. "잘해도 내 탓, 못 해도 내 탓"이라는데 뭐가 문제야? 싶겠지만 승자가 가진 능력이 오롯이 개인의 것인지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구계 거물급 스타인 르브론 제임스가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다면 지금과 같은 인기, 부를 누릴 수 있었을까?'와 같은 질문이 주요하다. 굳이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은 개인의 영역(예;타고난 재능)에 반드시 사회의 영역(예;태어난 시대, 국가)을 맞물려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그 교집합을 '겸손'으로 채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탐욕을 부르는 능력주의(학벌주의)의 오만과 절망을 상쇄할 덕목이라며 말이다.

미국의 수많은 대통령을 비판해가며 350쪽 가까이 열변을 토한 결론이 겸손? 겸손이라고? "당신이 쟁취한 부와 명예는 오롯이 당신 능력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니 겸손해야 해." "당신이 계층 이동을 할 수 없는 건 당신 탓만은 아니야. 가진 자들이 겸손하지 않아서야." 그는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 지면을 할애한 걸까? 결론을 마주한 나는 솔직히 망연자실했다. 

마이클 샌델식 '공정론'의 한계 

16세기부터 움튼 자본주의는 현재 그 어떤 경제체제도 대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에 야심 차게 반기를 들었던 공산주의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다시금 싹틀 수 없게 됐다.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는 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다. 2008년 세계 경제를 휘청하게 했던 금융위기를 겪고도 신자본주의를 앞세워 자본주의는 더욱 공고해지는 추세다. (비록 그에 대한 반기들이 고개를 들어보기도 하지만 이렇다 할 타격을 주긴 미미해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자본주의가 낳은 자식이다. 그들은 극심한 경쟁을 부추기며 자본주의의 견고한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능력주의가 사회의 병폐가 될 정도의 문제라면 능력주의의 근간인 자본주의를 수정하지 않고는 해결책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공정하다는 착각>은 자본주의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극도로 자제한 듯하다. 정말 겸손과 같은 도덕적 함양만으로 능력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부정입학을 비판할 정도로 미국 내 학력주의가 문제라면 대학 서열화를 없애면 된다. 이미 서유럽이나 북유럽 등에서는 시행하고 있고 대학 진학률과 직장 선호도 등에서 미국만큼의 격차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그런 모델들이 미국이 지향할 방향에 있다는 정도는 언급할 수 있지 않았을까? 

1953년 생인 마이클 샌델. 그가 사는 동안 미국은 자본주의 아래 승승장구하며 단 한 번도 세계의 패권을 내어준 적이 없다.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 교수가 된 그는 누구보다 학력주의, 능력주의의 선봉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개인적으로 '철저한 미국의 아들'처럼 보이는 마이클 샌델은 미국의 패권을 내려놓을 의지도, 다른 국가의 모델을 받아들이려는 용기도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본인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더라도 이 책을 읽을 미국 독자들의 불편함을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이 학자로서 미국 현실을 진단하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만으로 유의미하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그래야 할 것 같다. <공정하다는 착각>이 갖는 의미를 맺음하기 전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자본주의 비판을 논한다고 해서 공산주의를 하자는 말이냐고 몰아붙이지 말길 바란다. 봉건사회 이후 두 가지 경제체제만을 목도한 우리로서는 자본주의 아니면 공산주의라는 이분법에 빠지게 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아무리 변화를 열망한다고 해도 익숙한 것이 편한 법이다. 수세기 동안 자본주의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 틀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또한 어렵게 변화를 결정했다 하더라도 기특한 소수의 리더십과 아이디어만으로 체제를 이끌어 갈 수는 없다. 수많은 합의가 필요할 것이며, 그에 앞서 현재를 자각해야 한다.

변화로 가는 길에 선행되는 자각의 필요성 쪽에 무게를 둔다면 <공정하다는 착각>은 꽤 의미가 있겠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철석같이 믿었던 능력주의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에 게재됩니다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은이), 함규진 (옮긴이), 와이즈베리(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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