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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밥상머리에서 씩씩댄다. 또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유튜브를 봤나 보다. 이놈의 유튜브, 못 보게 할 수도 없고. 딸은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자극적인 영상 위주의 플랫폼인 유튜브를 통해 민감한 문제들을 접하고, 너무 과민하게 반응할 때면 부모로서 걱정이 앞선다.

"유튜브 좀 그만 봐!"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심호흡이 필요하다. 이번엔 또 뭘까. 10대인 딸이 속사포처럼 쏟아놓은 급식체(초성체, 줄임말 등 10대들의 은어)를 다 이해하려면 고도의 집중력과 민첩한 맥락적 눈치가 필요하지만 결국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딸아이가 사용한 한 용어부터 아무리 앞뒤 맥락을 따져보아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O이루'가 뭐야?"
"아, 'OO'의 'O'와 '하이루'의 '이루'를 합친 말이야."


이쯤 되면 OO이 사람 이름임을 짐작할 수는 있겠다.

"OO이가 누군데?"

주로 게임 방송을 하는 유명 유튜버란다. 그제야 딸이 전에도 몇 번 이름을 언급했다는 생각이 스치며, 침 튀기던 딸의 말들의 씨실과 날실이 맞춰진다. 최근 젠더 이슈와 관련해 이 단어가 논란에 휩싸였나 보다. 

요즘 아이들이 보는 유튜브 내용이 다 이런 것인지, 알고리즘의 영향으로 딸아이가 한 번 본 주제를 자꾸 접하게 되는 것인지, 아이는 자주 이런 문제를 언급한다. 정체성에 민감한 시기어서인지 젠더 이슈에 유독 민감해 한다.

유튜브의 특성상 이슈에 대해 좀 더 과격한 어휘와 어조로 다루다 보니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큰 것 같아 걱정이다. 나무만 보다가 숲을 보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딸, 네가 초등학교 다닐 때 너희 반에서 여자애들이 그룹 지어 서로 자주 싸웠던 거 알아?"

딸이 초등 3학년 때부터 딸아이 반에서는 여자아이들이 그룹을 지어 서로 대립각을 세우던 일들이 많았다. 딸아이 입으로 들었던 내용이 아니라 학부모 상담을 갔다가 담임 선생님께 들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또래에 비해 좋게 보면 무던하고, 반대로 보면 둔감한 딸은 반에서 일어나는 소동에서 벗어나 있었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알지도 못할 때가 많아서 너무 눈치가 없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응, 난 잘 몰랐어."
"네가 지금 얘기하는 문제는 그런 문제가 아닐까?"


딸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딸아이가 속해있지 않은 일이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문제라 신경 쓰이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때 딸아이의 관심사는 다른 것이었을 테니까. 현재 자신에게 더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시끄러운 문제들은 들어오지 않는 법이니까.

그러므로 지금 스스로에게 더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알 필요가 있다. 나의 신경을 어디에 써야 좋을지, 고민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이 너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인지 찾아야겠지. 네 안에 너의 곧은 생각이 채워져야 그런 복잡한 문제가 생겼을 때 휩쓸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결국 책을 좀 많이 읽으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데, 번들거리던 딸아이 눈빛이 갑자기 따사로워진다. 왜 또 저런 눈빛일까. 하루에도 12번 변덕을 부리는 표정이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딸아이가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말한다.

"이런 말을 해주는 어른이 있어서 좋아."
 
딸과 엄마
▲ 딸과 엄마 딸과 엄마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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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딸은 고3 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도 이렇게 흥분했었다. '한창 공부할 학생들에게 투표를 하라고 하면 공부하지 말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는 거'냐며. 내 딸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깜짝 놀랐다. 어른들이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교육 정책을 결정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 때는 언제고 목소리를 낼 기회를 준다는데도 싫다니.

그때 알았다. 요즘 아이들이 하도 아는 것도 많고 말을 잘하니 가끔은 생각도 다 자란 것 같이 착각하지만, 유튜브에 넘쳐나는 수많은 이슈들 속에서 자신만의 바른 생각을 정립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딸은 80%에 달하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투표율에 따라 프랑스 정치권이 젊은 유권자들의 권익을 반영하기 위해 얼마나 눈치를 보는지 알고 난 후에야 자신의 생각을 다시 고쳐 세웠다.

딸과의 대화를 통해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딸에게 스스로 바른 생각을 정립할 수 있도록 책을 읽으라고만 얘기했는데, 어른인 난 내 입맛에 맞는 것들만 취사선택해 오지 않았나. 나와 다른 의견,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었던가. 숱하게 내 속을 헤집어놓았던 세상의 일들과 만날 때, 휘둘리지 않을 '굳건한 나'가 내 안에 잘 새워져 있는가.

어른인 내가 먼저 생각을 바르게 해야겠구나.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어야겠구나.

영국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가 노래했듯,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인 게 맞다. '어른'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나를 제법 고민하게 하는 것을 보니.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brunch.co.kr/@gruzam47)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


태그:#유튜브, #밥상머리교육, #사춘기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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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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