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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여운형, 최운산, 신원미상
 좌측부터 여운형, 최운산, 신원미상
ⓒ 반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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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생애였다.

최운산은 질풍노도의 시대에 헌걸찬 풍운아였다. 독립운동의 여러 가지 방략 중 가장 어려운 무장투쟁의 한 길을 걷는 올곧은 장수였다.  

조선의 영토 만주에서 태어났지만 일제가 이 땅을 청국에 팔아넘기면서 국적을 잃었고, 머잖아 국권을 빼앗긴 망국노가 되었다. 10대 시절에 투철한 민족주의자 아버지가 무력으로 청나라와 대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저항은 당랑거철(螳蜋拒轍), 사마귀가 수레를 가로막는 형국이었지만 고토를 지키려는 거룩한 모습이었다. 최운산의 무장독립전쟁 정신은 이어서 발원한다. 그가 맞서는 상대는 청일전쟁에서 청국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제패한 일본제국이었다.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늘 들었다. 1894년 동학혁명군이 화승총이나 죽창으로 무장한데 비해 일본군은 무라타 소총 등 최신병기를 갖고 있었기에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그래서 무장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한말에서 국권상실 초기,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병의 수준으로는 막강한 일본군과 싸워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만주군벌 장작림 예하에서 군사훈련과 병기 다루는 법을 익히고 무기의 출처를 알아두었다. 독립전쟁의 군사를 조직하고자 둔전을 실시하고 더 많은 병력을 키우고자 사업을 벌여 재산을 모았다. 경영에도 크게 수완을 보였다. 

타고난 건강과 무인기질은 봉오동의 전략적 요충을 알아채고 이곳에 터를 닦았다. 아버지와 형제들도 마음이 통하고 뜻이 같아서 어렵게 모은 재산을 군사훈련과 무기 구입에 아낌없이 투자하였다. 누구의 지시도 없었고 모두 스스로 알아서 한 일이다. 

봉오동 전쟁은 국권상실 후 최초로 독립군이 일제침략군을 패퇴시킨 대첩이었다. 봉오동 대첩은 1598년 9월 이순신이 명량에서 12척의 남은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친 이래 실로 322년 만의 쾌거였다. 넉 달 뒤 청산리 대첩도 봉오동 대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운산 장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최운산 장군 초상화.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 최운산 장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최운산 장군 초상화.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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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대첩에는 최운산의 기여가 컸다.

하지만 최운산은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 참군인, 진정한 무장은 명예보다 역할에 만족한다. 그는 이후에도 무장전쟁으로 일관하였고, 전후 여섯 차례에 걸쳐 왜적의 감옥을 드나드는 사이 동양의 정세는 더욱 어려워지고 몸은 차츰 노쇄해갔다. 

큰 아들 봉우가 간첩누명을 쓰고 헌병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다가 기적적으로 빠져나와 평양으로 도주하였다. 이런 사실을 안 최운산은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을 살펴보러 평양을 방문했다. 고국 땅이지만 생소한 곳이었다. 

아들을 만난 아버지는 먼 길을 오느라 피로해진 데다 고문후유증이 도져서 여생이 임박했음을 인식하고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1945년 7월 5일 평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조국이 해방되기 40일 전이다. 향년 60세로 불꽃같은 삶을 소리없이 접었다.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평생 의를 구하고 조국을 위해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 동포들을 위해 일했고, 다행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가 곧 해방이 될 것이다. 당장 눈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너무 근심하지 말라. 시대가 어려운 때라 너희가 모두 고초를 겪고 있지만 내 자식들이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주석 10)

조상의 고토 만주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에서 출생하여 60평생을 국권회복을 위해 무장전쟁으로 일관하다가 왜적의 패망 직전에 조국해방의 소식을 미쳐 듣지 못한 채, 이역이 아닌 고국에서 숨지면서 그나마 안도하였을까. 

최운산 장군의 생애는 굴곡진 민족사의 표상이다. 재능이나 수완으로 보아 달리 살았으면 현실적으로 출세하고 거부가 되었을 터인데, 민족의 고난을 자신의 삶과 일치시켰고, 국민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해서 화중생연(火中生蓮) ㅡ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청초하고 향기로운 불꽃같은 생애였다. 

아들은 아버지 최운산 장군을 평양비행장 근처 야산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전쟁이 끝나면 봉오동의 할아버지 최우삼의 묘소 아래로 모셔 가리라는 생각에서 비석도 세우지 못한 채였다. 전후 한반도는 분단이 되고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은 지금도 낯선 평양의 야산에 묻혀있다.              


주석
10> 앞의 책, 11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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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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