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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가 마련돼 있다.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가 마련돼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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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5일, 한 노신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 노신사는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의 상징적 인물이자 통일운동에 일생을 바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었다. 88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3년 전 심장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자주 왕래했다.

심장수술을 받고도 책을 출판하고 민중들과 함께 투쟁했지만, 노신사의 몸은 더 이상 열정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민중을 향해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빛도 함께 꺼졌다. 백 소장의 죽음 이후, 민중은 그의 죽음과 함께 꺼진 빛을 되살리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대통령 조화마저 거부하다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입구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1층 현관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했다.
▲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입구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1층 현관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했다.
ⓒ 유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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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소장의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수술을 받은 이후 줄곧 이곳에서 치료를 받아온 백 소장은 마지막 안식처 역시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정문 입구는 폐쇄되어 있었고, 1층 현관을 통해서만 진입이 가능했다.

많은 조문객이 찾는 장례식장답게 입구에서부터 줄을 서야 했다. QR코드를 찍어 전자방명록을 작성하고, 체온 측정까지 마쳐야 장례식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방문객 수가 꽤 많아 직원들이 하나하나 절차를 설명하며 조문객들을 안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기완 소장의 빈소 3층 특1호실 앞 로비에는 조문 온 시민들과 정계인사들, 기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 백기완 소장의 빈소 3층 특1호실 앞 로비에는 조문 온 시민들과 정계인사들, 기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 유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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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소장의 빈소가 마련된 3층으로 올라가자 그의 생전 명성을 느낄 수 있었다. 큰 규모의 로비에는 백 소장을 조문하기 위해 방문한 일반 시민들과 정계인사, 시민단체 인사들과 빈소를 취재하러 온 언론사 기자들이 와 있었다.

한 시민단체 인사는 언론과 인터뷰를 나누며 백 소장의 삶을 회고하고, 그의 뜻을 계승해야 한다는 굳은 뜻을 밝히고 있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많은 이들이 찾아온 걸 보면서, 그가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조문객 명단을 작성하고 국화꽃을 받아들었다. 빈소가 차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갔기 때문에 예상외로 대기 시간은 길지 않았다. 헌화와 분향을 하는 과정에서도 거리두기가 철저히 시행되었고, 유족들과의 인사도 가벼운 목례로 대체되었다. 조문하는 모든 인원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방역지침도 잘 지켜는 걸로 봐서 장례절차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꽃을 들고 들어가자 백기완 소장의 영정사진이 보였다. 그는 생전 대중집회에서 연설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영정사진 속에서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마이크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민중의 삶과 고뇌를 토해냈던 그의 생전 모습, 또 그가 기억되고  싶어 하는 가장 인상적인 모습일 지도 모른다.

영정사진 옆에는 백 소장의 그림 2개가 양 옆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민중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절규했던 투쟁가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어도 그의 결연과 의지는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다.

헌화를 마치고 빈소를 지키는 유가족들에게 목례를 하고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장례식장의 풍경을 유유히 바라보다가 크게 다른 점을 한 가지 발견했다. 바로 수많은 조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백 소장의 본인의 뜻이었다고 한다. 백 소장이 생전 "나에게 보낼 조화가 있으면 소외된 사람들, 투쟁하는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라는 유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노나메기(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모두가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라는 단어처럼, 백 소장은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영예와 사치 또한 전부 투쟁하는 보통의 민중에게 전부 내주었다.

조화를 받지 않겠다는 고인과 유가족의 의지가 확고해,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 역시 거절당했다고 한다. '백기완의 장례' 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성이었다.

그가 걸어온 모든 여정에는 '민주주의'가 있었다
 
백기완 소장의 연혁과 일대기 백기완 소장의 빈소 로비에는 백 소장이 걸어온 인생연혁이 전부 설명되어 있다.
▲ 백기완 소장의 연혁과 일대기 백기완 소장의 빈소 로비에는 백 소장이 걸어온 인생연혁이 전부 설명되어 있다.
ⓒ 유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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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 밖에서 읽어보고 갈 수 있는 공부거리를 발견했다. 백 소장의 생전 연혁이 담긴 작은 전시물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그가 거친 88년의 여행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삶의 여행을 통해 이루고 싶어 했던 목표와 세상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걸어온 모든 여정에는 그가 목숨만큼 중요히 여겼던 '민주주의'가 있었으며, 민주주의의 주인인 '민중'이 존재했다. 사회가 '없는 존재'로 취급하며 울리는 소리마저 막아버린 억울한 민중들 옆에서 백기완은 권력이 가진 마이크를 빼앗아 그들과 함께 외치고, 또 외쳤다.

그는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독재 투쟁에 뛰어든다. 통일문제연구소와 민족학교 등의 설립 과정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오던 백 소장은 1974년 '유신 헌법 100만인 철폐 운동' 에 앞장섰다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투옥되어 12년 형을 선고받고 다음 해 석방되었다. 이후 1979년 YMCA 위장결혼식 사건, 1986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12년이 넘는 옥살이하는 동안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백 소장은 투옥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반인권적 고문에 시달리며 신체적, 정신적 피해와 장애를 입었다. 81kg까지 나가던 건장했던 몸뚱아리도 순식간에 야위어버릴 만큼 그가 겪은 고문은 심각했다.

그러나 백 소장은 투쟁가에게 남은 결연 하나로 고통의 옥살이를 버텨냈다. 권력이 망가트린 그의 몸뚱아리가 투쟁의 종결의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부서진 몸뚱아리를 이끌고 다시 거리의 민중에게로 나갔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그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그의 결연함을 기다리는 민중들 곁이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군정종식을 위한 단일화 명분으로 사퇴한 백 소장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출마했으나 저조한 성적으로 낙선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받아든 성적표는 백기완의 삶을 결코 상징하거나 대변할 수 없다. 그는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부여하는 명예와 권력을 종착지로 삼고 거리에서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민중의 곁에, 그 민중이 어떠한 주제와 행색으로 앉아있든, 그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백기완의 삶이었다.

그는 고령이 된 2000년대와 2010년대까지도 꾸준히 원로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했다. 연설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권력을 향해 돌진하던 그의 젊음과 힘은 사라졌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영향력이 존재했고, 많은 이가 그를 필요로 했다.

양심수 석방부터 부당해고 문제, 청년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등 그가 목놓아 외치며 풀어야 할 억울한 민중의 이야기는 산더미 같았다. 자신이 평생을 몰두해온 통일운동과 행복한 공동체, 민중 모두가 자신의 마이크를 잡고 어떠한 권력 앞에서도 자유롭게 투쟁할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그는 마지막까지 거리에서 싸웠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 소장의 발자국 그가 평생을 뛰어다녔던 길거리에, 하나의 비석처럼 새겨져 있을 그의 발자국.
▲ 백기완 소장의 발자국 그가 평생을 뛰어다녔던 길거리에, 하나의 비석처럼 새겨져 있을 그의 발자국.
ⓒ 유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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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혁 밑에 새겨져 있는 그의 발자국은 사실 평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그의 발자국은 곧 '거리'라는 장소와 함께했다. 많은 민중이 세상을 향한 외침을 위해 모이는 곳은 거리였다.

거리라는 거대한 장소에 모인 민중들은 힘을 결집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세상을 향해 변화를 요구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여러 시위와 운동도 전부 거리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수많은 거리에서 변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권력과 고난스럽고도 긴 투쟁을 벌이고 있다.

민중의 삶을 뛰어다녔던 그가 가장 많이 방문했을 장소도 바로 '거리'였을 것이다. 이 발자국은 백기완이라는 사람을 기념하는 장례식장이나 기념관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흔적이 아니다. 그가 투쟁했던 거리, 또 그가 사랑했던 민중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의 발자국은 남아있을 것이다. 그 발자국을 따라 마이크를 뺏긴 수많은 대중이 그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변화를 쟁취할 것이다.

백기완 소장은 19일 영결식 후 노제를 치른 뒤, 마석모란공원에서 영면에 들어간다. 그와 함께 투쟁하고 싸웠던 수많은 동지가 잠든 역사의 현장에서 그 역시 영원한 운동가로서의 훈장을 달고 영면에 들게 된다.

백기완의 삶에 대해 평가하는 관점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민중과 함께한 그의 삶에 존경을 표하는 반면, 누군가는 그의 길을 지지하지 않고 반대한다. 그의 삶은 이제 역사 안에서 수많은 이의 관점을 통해 평가되고 남은 이에게 숙제를 던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관점과는 별개로 백기완의 부재는 이 세상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고민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억울함에 몸서리치던 이들 옆에서 함께 울고, 고통을 나누길 자처했던 그가 없는 세상은 모든 이에게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백기완의 부재가 세상을 살아가는 민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그의 대표적인 저작 중 가장 많이 불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한 대목이다. 광주 시민들의 절규와 함께 시작된 이 곡의 정신은 이제 수많은 이들에게서 불리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구성하는 여러 대목 중 백기완의 삶이 녹아든 가사는 바로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다.

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통해 민중에게 전했던 위로이자 포고처럼, 그는 늘 앞서서 나갔던 개척자였다. 권력 앞에서 체념한 망설인 이들에게 "따르라!"라고 소리치며 그들과 함께 권력 앞으로 전진해나가던 그의 삶. 그의 삶을 통해 세상이 민중과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를 고민하고 모두가 자신의 마이크를 뺏기지 않는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할 때이다.

88년의 여행을 마치고 영면한 통일운동가 백기완.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위로자이자 투사였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민중 곁에서 어떤 형태로든 함께하길 바라며.

태그:#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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