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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제 카톡 보여주기 싫다니까요."

아들을 깨우러 방에 들어갔다가, 아들이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는 새에 머리맡에 둔 핸드폰에 카톡 메시지가 번쩍 올라왔다. 눈도 침침하고 궁금해서 핸드폰을 들어 올려 메시지를 슬쩍 보았을 뿐이다. 아들의 핸드폰 비밀번호는 일찌감치 비밀이므로 고작 바탕화면에 뜬 메시지에 눈길 한 번 준 걸 가지고 녀석이 예민하게 군다.  
  
"얘, 너는 엄마, 동생 비밀번호까지 다 알면서, 네 것은 고작 바탕화면에 뜬 카톡조차 읽으면 안 된다는 거니?" 

야속한 마음에 항변해 보지만, 보여주기 싫다는 아들의 태도는 단호하다. 어젯밤에는, 합격한 대학의 온라인 카페에 신입생으로서 자기 소개글을 올렸다는데, 뭐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무슨 내용의 댓글들이 달렸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러나 아무리 간청을 해도 아들은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아무리 간청해도 소개글과 댓글을 보여주지 않는 아들이 야속하다.
  아무리 간청해도 소개글과 댓글을 보여주지 않는 아들이 야속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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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자신이 만나는 세상은 '엄마 출입금지'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아이가 나에게 심리적 거리를 둘 때면 녀석을 위해 바친 지난 세월이 스쳐 지나가며 서운함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게 사실이다. 벌써 좀 컸다고 그깟 카톡 가지고 철벽 치는 녀석이 생각할수록 매정하다. 

비슷한 시기에 한 친구도 자녀한테 서운한 일이 있나 보다. 이제 갓 20살이 된 아들한테 '고지식한 엄마'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단톡방에서 하소연을 한다. 우리 또래 사이에서는 자녀와 소통 잘하고 이해심이 넓어 '보헤미안 영혼급'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녀인데, 고지식하다니... 

입시를 마친 그녀 아들이 귀가 시간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 중이란다. 이제 좀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유롭게 즐기고 싶다고 말이다. 아직도 귀가시간을 지키라는 엄마가 너무 고지식한 게 아니냐며 아들이 엄마의 지인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라는 내용이었다. 아들을 걱정하는 친구의 심정이 충분히 공감되는 동시에 슬슬 세상을 자유롭게 겪어보고 싶어 하는 친구 아들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되었다. 

가만 보니, 엄마 간섭에서 벗어나고파 철벽 치는 내 아들이나 귀가시간 해방을 요구하는 친구 아들이나 비슷한 입장인 것 같다. 그간 엄마의 간섭과 통제를 곧잘 따르던 자녀들이 이제 막 성인이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당당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아이들이 왜 갑자기 이런저런 마뜩잖은 주장들을 펼치는 걸까?

어쩌면 나와 친구는 서운한 마음을 비워내고, 아들들이 주장하는 바를 수용하려고 노력해 볼 때인지도 모른다. 제 목소리를 높이는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야말로 자녀가 자율적으로 성장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중요한 시기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론적으로야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율적으로 키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허용한 자율의 대가가 혹여라도 어떤 혹독한 결과로 돌아오게 될지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니 늘 불안한 부모는 자녀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선뜻 간섭과 통제를 거두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자율의 과정에는 늘 혼란이 따르고, 그 혼란기를 제대로 통과해야만 뭔가를 배우게 되는데, 그 혼란한 시기를 부모로서 함께 겪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믿고 자율적으로 키워낸 한 지인이 계시다. 워킹맘이었던 그분은 두 아들들이 초등 저학년일 때부터 부엌을 아예 아이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하교한 아이들은 좌충우돌이었지만, 어쨌든 알아서 간식과 때로 저녁까지 챙겨 먹었고, 한 음식이 질리면 새로운 메뉴를 시도하고 나중에는 파스타 같은 것도 해먹었단다. 부엌은 늘 난장판이었고 심난했지만, 아이들이 자라며 점차 정돈되어 갔고, 아이들에게는 요리라는 즐거운 취미가 생겼다고 한다.
 
   초등 저학년 자녀에게 부엌을 맡긴 지인이 대단하다.
  초등 저학년 자녀에게 부엌을 맡긴 지인이 대단하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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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이 대학생이 된 후, 한 아들은 섬세하게 단련된 미각으로 아는 선배와 아이스크림을 개발해 홍대 쪽에서 잠시 큰돈을 벌었다고도 하고, 또 한 아들은 외국으로 가족 캠핑을 갔을 때 현지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를 도맡는 바람에 온 가족이 호강하고 왔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다. 코로나로 만나 뵙지 못해 그 후 소식들은 아직 듣지 못했지만, 아마 그 두 아들들은 어디서든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내며 잘 살고 있을 듯하다. 

나라면 아마 불날까 걱정, 부엌을 치울 걱정에 아예 생각지도 못할 양육 방식이다. 그 지인은 부엌을 맡기며 불안하지 않았을까? 분명 불안했을 것이다. 불안했지만 그래도 아들들을 믿고 기다려주신 것이다. 자식을 믿고 버텨주는 힘, 그분에게서 늘 본받고 싶은 점이다. 

자율과 통제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예전에 아들이 진학할 고등학교를 고민하며 읽었던 책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책 내용은 교육의 참 가치를 가르치고 배워 실현하는 거창고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부모가 지닐 덕목들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 
 
생명과 건강에 지장을 주는 일이 아니라면 아이들이 자기 일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자율성과 자치를 인정해줄 때 비로소 도덕적 결정권을 갖게 되고 자신의 결정권을 발휘할 때 도덕적 결정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 속에 신의 형상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부모는 늘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해도 아이에게 믿음을 주면 통제 속에서 큰 아이보다 훨씬 더 성숙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믿어주는 부모 되기의 첫걸음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무언가를 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자율이 있는 곳에 성숙도 따라온다.

자녀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때는 사실 생각보다 아주 어려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 어릴 적 아침상에 앉으며 누가 내 국에 밥 말아놓았냐고 투정 부리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아이가 자율적으로 성장할 기회들을 이미 많이 지나치고 놓쳐온지도 모른다. 이젠 정말 더 늦춰서는 안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 글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태그:#부모, #자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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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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