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의 전성기다. 애정하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 몇 개 중 절반 이상은 남자 연예인들의 요리 솜씨 배틀의 장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의 요리는 '요리 좀 해 본 여자'인 나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남편의 요리가 심상치 않다. 멸치와 건새우, 다시마 등으로 육수를 내어 좀처럼 맛 내기 어려운 맑은 국물 요리까지 도전한다. 가격에 비해 내용물이 부실해서 자주 못 시켜 먹는 해물찜을 하는가 하면, 배달 음식의 최강자인 치킨까지 오븐에 구워 간장 양념을 입혀 내온다.
오늘 아침엔 입맛이 없어 전날 오븐에 구워둔 군고구마로 대충 때우려고 했더니, 딸을 대동하여 마트에서 재료를 사 와서는 북엇국을 끓여냈다. 일단 집 안으로 들어오면 웬만해선 다시 바깥출입을 안 하는 사람이. 해장할 일도 없는데 아침에 웬 북엇국? 내가 요리할 것이 아니라면 이런 생각은 머릿속에만 묻어두어야 한다.
국물을 한 번 떠먹어보니 와, 진짜, 미쳤다. 도대체 뭘로 간을 낸 것인가. 학교 급식으로 나온 북엇국보다 몇 배는 훌륭한 맛에 맛 본 혀가 먼저 놀란다. 캬, 소리가 절로 나는 시원한 감칠맛을 어찌 이리 잘 살렸는지, 남편의 오늘 요리는 절로 엄지 척!을 안 날릴 수가 없다.
북엇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잘해 먹지 않는 나지만, 오늘 아침 큰 사발로 담아준 북엇국을 거의 다 비우고는 아침부터 포만감에 작은 눈이 더 가늘어졌다. 그러다 궁금해진다. 남편은 왜 이렇게 틈만 나면 요리를 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맛있는 걸 자꾸 해서 나를 뚱땡이를 만들려고 하냐, 고 물어보니 뚱땡이가 되어야 그만둘 거 아니냐고 남편은 농을 친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남편이 30대였을 때, 아침 일찍 출근해 밤 늦게 퇴근하느라 주중에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족 중 나 한 사람뿐이었다. 아이들은 주말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잠자는 아빠 얼굴을 동물원의 곰 보듯 겨우 구경(?)할 수 있었다.
아빠가 고팠던 아이들은 주말이면 아빠와의 재밌는 놀이 시간을 기대했을 거다. 하지만, 일주일간 못 잔 잠을 몰아 자야 했던 남편은 아침도 거른 채 반나절을 잠으로 날려버려서 아이들의 원성을 사곤 했다. 잠이 깨어 있을 때도 못 다 풀린 피곤을 온몸에 검정 롱패딩처럼 두르고는 TV와 핸드폰만 멍하니 보며 나머지 주말 시간을 보내던 사람이었다.
딸은 그 시절의 아빠를 '항상 뭔가에 화가 나 있는 사람' 같았다고 회상한다. 대한민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는 30~40대 가장들의 삶은 얼마나 여유가 없고 각박한 것인가. 퇴사 관련 책이 지칠 줄 모르고 유행하는 걸 보면 짐작은 되지만, 맞벌이를 하는 아내의 입장으로 무한한 아량을 베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40대가 넘으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30대 끝자락에 이직한 회사에서 업무 강도면에서 조금은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였는지. 40대가 진행되면서 급격히 아내의 에스트로겐이 옮겨간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내 몰래 손댄 주식이 쪽박을 차는 바람에 이제는 정말 까딱하면 쫓겨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던 건지.
언젠가 퇴직 이후 그동안 'OOO한 사람'으로 불렸던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져 버리면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불안과 우울을 겪을 수 있다는 내용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OOO한 사람'이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 뿐 아니라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 '때때로 오카리나를 즐기는 사람', '오마이뉴스에 가끔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사로 보내는 시민기자'와 같이 스스로에게 여러 정체성을 부여하려고 노력 중이다. 남편에게도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은 그런 건 생각하기도 싫다고 손사래를 쳤다. 퇴직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놀 거라면서.
처음 만났던 20대 때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인 사람이었으니, 퇴직 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면 그걸로 된 거다. 그런데 요즘 남편은 '아무것도 안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뭔가 복잡하게 만들어 먹는 부산함이 부담스러워 대충 먹자고 해도 남편의 요리는 영역의 경계를 허물고 그 지평을 넓혀가는 중이다. 아무것도 안 할 거라며 귓등으로 흘린 척하더니, '요리하는 남자'로 정체성을 더하기로 작정한 것일까?
밥 식(食)에 입 구(口) 자가 합쳐져 '한 집에서 함께 끼니(밥)를 같이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식구(食口). 우리 4인 가족, '식구'들의 입맛을 책임지는 주방장인 남편이 저녁 요리로 택한 메뉴는, 비교적 쉬운 조리법인 '카레'다. 유통기한이 거의 되어 얼른 처분해야 할 돼지고기 식재료 때문에 택한 메뉴였다.
남편은 음식의 맛뿐만 아니라 비주얼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대충 물 붓고 모든 재료를 통째로 넣어 끓여 내는 손쉬운 조리법을 두고, 돼지고기 특유의 노린내를 잡기 위해 와인과 후추로 재어 놓는 과정을 건너뛰지 않는다.
감자와 당근, 사과의 모양이 뭉그러지지 않도록 기름 둘러 볶는 과정을 절대 거르지 않는다. 지나치게 끊여서 모양이 퍼져 보이게 놔두지 않는다. 밥 위에 카레를 얹은 뒤엔 부족한 초록 빛깔을 더하기 위해 파슬리 가루를 톡톡톡 뿌려주는 걸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들이는 정성이 한가득이니 어찌 맛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아빠가 만든 거 진짜 맛있지 않니? 이제 아빠는 백종원 주니어라 불러야겠다."
맛있는 요리를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기 미안해서 나도 칭찬이라는 '양념'을 뿌려본다. 딸은 나보다 한 술 더 뜬다.
"주니어라니! 아빠가 백종원보다 몸집이 훨씬 큰데! 아빠는 빅big종원이지!"
그래, 맞다. 아빠는 이제부터 'Big종원'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